[과학과 신앙] 갈등과 공생의 역사
이원민
랑카스터의 역사학자 브루크가 정리한 바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이해하는 입장에는 크게 세 가지의 유형이 등장한다. 첫 번째는 과학적 사고방식과 종교적 심성에는 근본적인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주장을 옹호하고자 등장하는 전형적인 예가 베니스의 유명한 성 마르코 성당 종탑에 얽힌 이야기이다.
1745년 성 마르코 성당의 종탑이 벼락을 맞아 대파되었다. 얼마 뒤 벤저민 프랭클린이 피뢰침을 발명하여 벼락을 막을 수 있는 길이 열렸으나 성직자들은 종탑에 피뢰침을 설치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천둥번개를 하느님의 소리, 하느님의 무기로 보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무기에 감히 방패를 들이대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1761년과 62년 연이어 두 번씩이나 벼락에 맞은 뒤 1766년에야 피뢰침이 세워졌고 성 마르코 성당의 종탑은 벼락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면 이 입장은 과학적 사고방식이나 종교적 태도, 둘 중 하나는 잘못되었다는 것인데 문헌에 등장하는 대개의 경우, 위의 예에서와 같이 과학적 사고방식의 손을 들어주기 위한 논리가 전개된다.
두 번째의 것은 과학과 종교가 서로 견제하는 세력이 아니라 각기 서로 다른 인간의 요구에 부응하는, 그러면서도 본질적으로 상호보완적이라는 입장이다. 덧붙이면 과학적 언어와 종교적 언어는 서로 다른 실천 영역에 관한 것이라는 말이다. 창조론을 예로 들면, 그것은 글자 그대로 모든 종의 개별적인 창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만물이 궁극적으로 창조주를 의존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며, 인간을 바라보는 올바른 자세를 인간의 내면에 창조해 내는 것이야말로 창조교리의 올바른 사용이라는 것이다.
‘물리적인 현상을 성서나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해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자기반성과 가치판단, 하느님을 숭배하는 일에 과학적 판단으로 일관하는 것 또한 천박한 일이다.’ 이런 식으로 과학과 종교의 영역을 분리하는 것이다. 과거의 충돌이나 알력은 대개 오해 때문이었다는 논증이 가능했으므로 역사의 분석은 이런 분리입장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바탕 위에 서있는 사람들은 ‘자연 작용에 대한 성직자들의 독단적인 견해만 없었더라면’ ‘과학적 지식이 인간의 깊은 요구까지 충족시켜 주리라는 과학자들의 오만한 믿음만 없었더라면’ 모든 것이 부드럽고 가벼웠을 것이라고 말한다.
세 번째 입장은 더 긴밀한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첫 번째 입장과 달리 어떤 종교적 믿음들은 과학적 활동에 그대로 전용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며 또한 두 번째 입장과도 달리 종교와 과학 사이의 상호 작용은 전혀 해롭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양자의 이익에 보탬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머튼에 따르면, 17세기 청교도 정신이 지배하던 데에서는 자연의 질서를 탐구하는 이성적인 활동이 높이 평가되었으며, 감성에 의존하는 삶보다 훨씬 건강하고 성실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자연을 탐구함으로써 창조주의 위대함을 드러낼 뿐 아니라 인간의 생활에 편의까지 꾀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찬미하라는 영적 가르침을 쫓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 일반적인 분위기였으며, 그런 곳에서 뉴튼을 태두로 하는 대과학자들이 등장하고 근대 과학이 꽃피기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뉴튼의 과학은 이성의 힘으로 세상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사조를 불러일으켰고 산업혁명,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자리잡은 이성 위주의 세계관은 종교뿐 아니라 문학, 예술 등 여러 분야에서 갈등과 반작용을 일으켰다. 문학에서 낭만주의는 과학의 한계를 지적하고 이성의 시대에서 소외되어 온 경험적 측면, 상상력과 직관의 가치를 부각시켰다. 워즈워드나 콜리지에게는 ‘신앙은 지적인 문제가 아니라 충심, 헌신, 선택의 문제’였다. 그러나 결정론과 환원주의, 이신론(理神論, deism) 나아가서는 유물론과 무신론으로 이어지는 이성주의 세계관은 여전히 시대를 풍미하면서 ‘고전적인 신앙’의 자리를 위축시켜 왔다.
개신교 세계의 여러 곳에서는 팽배한 이신론의 추상적인 주장과 신관에 대한 반작용으로 개인의 종교적 경험과 삶의 변화를 중시하는 운동이 일기도 하였다. 칸트가 종교의 근거로 내적 경험의 세계를 중시하면서 그의 철학체계에서 종교와 과학을 서로 충돌할 수 없는 영역으로 분리시킨 것도 그런 경건주의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결정론과 환원주의의 시동을 걸었던 뉴튼의 물리학은 ‘낡은’ 것이 되고 새로운 역학이 등장하였다. 이 흥미로운 새 물리학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눈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종교와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주목할 만한 내용은 물리학이 ‘손에 잡히지 않는’ 실체를 모델로서 다루게 되었다는 사실과, 본질적으로 우리가 본질적으로 모든 것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는 불확정성, 그리고 서로 배타적인 것으로 보이는 입자성과 파동성이 교묘히도 함께 동원되어야만 물질의 성질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상보성 같은 것이었다. 사물을 기술하는 데 이전과 같은 결정론은 통하지 않게 되었다.
하이젠베르크는 그런 상황을 19세기에 과학이 잃었던 겸손을 현대 물리학이 되찾아주었다고 표현하였다. 보어의 상보성 원리는 그가 개인적으로, 하나의 가치를 받아들이기 위한 선택에는 언제나 ‘믿음에 바탕을 둔 도약’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에서 깊은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서 위에 든 세 번째의 경우에 또 다른 보기를 하나 보탠 셈이다.
현대물리학에서 탐구의 대상은 따로 존재하는 자연이 아니라 나와 연결된 자연이다. 내가 탐구하는 대상은 본질적으로 나의 탐구 행위에 영향을 받는다. 내가 어떤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과 나를 포함한 전체 세계를 고려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동양철학적인 냄새까지 풍기게 된 물리학의 언어는 과학과 신학 그리고 다른 인문학과의 대화 창구를 어느 때보다 크게 열어주고 있다.
그러나 나와 대상의 관계, 불확정성, 상보성 등 현대물리학적 내용은 엄격히 정의된 범위 안에서만 타당성을 갖는 것이지 그 밖에서도 같은 효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물리적 표현은 어디까지나 물질세계에 관한 서술인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신과학이나 정신과학은 상상력과 직관을 과도히 동원한 사이비 신낭만주의일 수도 있다.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세대가 과학과 종교의 정확한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역사의 진로가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종교적 상징들과, 자연환경을 임의로 조작할 수 있게 하는 과학적 모형들’이 갖는 힘을 지적한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과학기술은 지금 대단한 위력으로 세상을 바꾸어놓고 있다. 종교, 종교인과 일반 신자들이 이 와중에서 선택할 적극적인 역할은 무엇인가. 역사 속에서 해답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숙제일 듯하다.
이원민 마티아/ 물리학자
[경향잡지, 2000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