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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하느님을 노래할 때: 결국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

宗敎哲學

by 巡禮者 2012. 8. 18.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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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하느님을 노래할 때] 결국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
 
정영철
 
 
과학적인 관점으로 판단하면, 생물학 안에는 하느님께서 계실 적절한 자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의 하나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탕에 두고 하느님의 존재를 논의해 온 서구의 종교가, 자연 현상을 객관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현대의 서양 과학보다도 선행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인류 문화의 일반적인 전개 과정일 터이다.
 
오늘 나는 이 글에서 ‘수학이라는 언어로 설명되는 과학’과 ‘신학의 언어로 구술되는 종교’의 ‘논쟁’을 되풀이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오히려 “결국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라는 지혜의 말을 전하는 시애틀 추장의 연설에 내가 겪은 경험을 추가하여 글을 시작하고, 이어서 현대 과학문명이 봉착한 위기 문제에 대한 환경 생태적인 진단과 그에 대한 돌파구의 하나로서 ‘불환빈 환불균(不患貧 患不均)’이라는 논어의 한 구절에 나의 소박한 생각을 얹어 소개하고자 한다.
 
 
시애틀 추장의 연설 “우리는 결국 모두 형제들이다”
 
벌써 이십 년 전의 일이다. 그때 나는 한국과학재단의 지원을 받아 미국 뉴욕 주의 ‘이타카’라는 조그만 도시에 있는 코넬 대학에 교환교수로 파견되어 있었다. 1991년이었으니 아메리카 대륙 발견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1992년)를 앞두고 많은 행사가 열렸다. 그 해 초겨울 저녁, 학교 인근의 한 강의실에서 영어회화를 공부하고 있었다. 그날 강의에서는 아메리카 대륙발견 500주년에 대한 짧은 글을 소개하고, 이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발표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나는 아메리카 대륙은 백인이 발견한 것이 아니라, 침략한 것이라는 취지의 내용으로 짧은 영어 실력을 동원하여 설명하였다. 왜냐하면 서구의 백인들이 미국 대륙을 발견하기 이전에 이미 최소한 5만 년 전에 베링해를 건너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한 홍인(紅人)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상당한 문화수준에 대한 사실을 우리는 ‘세계사’라는 과목을 통하여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세계사라는 동일한 과목의 교과서에서는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을 역사적 사실로 또 기록하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을 평소에 갖고는 있었지만, 미국의 역사를 결코 부정하거나 과소평가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렇지만 부강한 미국의 역사 속에 내재되어 있는 ‘큰 것이 아름답다.’거나 ‘흰 것이 우월하다.’는 것에 대한 터무니없는 자만심에 대해서는 연민의 정을 감출 수 없었다.
 
미국의 건국 과정과 팽창 건설 과정 그리고 1 · 2차 세계대전을 겪은 뒤, 세계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보여준 미국 중심주의(팍스 아메리카나)에 대하여는 결코 찬양하기 힘든 측면이 많다. 이러한 나의 편견에 불을 붙인 것이 시애틀 추장의 연설이다. 이 연설문에는 새겨볼 만한 지혜의 한 자락이 깔려있다고 생각되기에 녹색평론사의 김종철 선생이 번역한 글을 여기에 소개한다.
 
“워싱턴 대추장(대통령)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대추장은 우정과 선의의 말도 함께 보내왔다. 그가 답례로 우리의 우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이는 그로서는 불친절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대들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해 볼 것이다. 우리가 땅을 팔지 않으면 백인이 총을 들고 와서 우리의 땅을 빼앗을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중략)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대들에게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땅의 모든 부분이 거룩하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 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는 신성한 것들이다. 나무 속에 흐르는 수액은 우리 홍인의 기억을 실어 나른다.
 
백인은 죽어서 별들 사이를 거닐 적에 그들이 태어난 곳을 망각해 버리지만, 우리가 죽어서도 이 아름다운 땅을 결코 잊지 못하는 것은 이것들이 바로 우리 홍인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땅의 한 부분이고 땅은 우리의 한 부분이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의 자매이다. 사슴, 말, 큰독수리 이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바위산 꼭대기, 풀의 수액, 조랑말과 인간의 체온 모두가 한 가족이다.”
 
같은 내용의 철학이 담겨있는 인디언 추장의 연설문의 중간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하고, 마지막 자락을 이어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 보겠다. 우리가 거기에 동의한다면 그대들이 약속한 보호구역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거기에서 우리는 얼마 남지 않은 날들을 마치게 될 것이다. 마지막 홍인이 이 땅에서 사라지고 그가 다만 초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구름의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기억될 때라도, 이 기슭과 숲들은 여전히 내 백성의 영혼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새로 태어난 아기가 어머니의 심장 고동을 사랑하듯이 그들이 이 땅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땅을 팔더라도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 달라. 우리가 돌본 것처럼 이 땅을 돌보아 달라. 당신들이 땅을 차지하게 될 때, 이 땅의 기억을 지금처럼 마음속에 간직해 달라. 온 힘을 다해서, 온 마음을 다해서 그대들의 아이들을 위해 이 땅을 지키고 사랑해 달라.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이.
 
한 가지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모두의 하느님은 하나라는 것을. 이 땅은 그에게 소중한 것이다. 백인들도 이 공통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한 형제임을 알게 되리라.”
 
이상의 내용은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그들의 피부색이나 성별이나 민족이나 계급이나 나아가서 재산의 많고 적음이나 지식, 심지어 지혜의 많고 적음을 초월하여 모두가 한 조상에서 유래한 형제들임을 우리는 생물학을 통하여, 또한 진화학을 통하여 알고 있다. 시애틀 추장은 이러한 사실을 당시의 미국 대통령에게 준엄하게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나아가서 우리들이 인식의 지평을 조금만 확대하여 관조해 본다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이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사실을 생물학과 진화학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이렇듯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동일한 기원에서 유래한 모든 생명체들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현대 생물학의 가르침의 하나이다.
 
이 지구상에는 수천만 종류의 생물들이 각자의 환경 조건에 적응하여 그들의 생명현상을 제대로 발현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생식을 통하여 자신의 다음 세대를 생산하여 끊임없이 지구의 표면을 공간적으로 채우며 시간적인 영속성을 유지시키고 있다.
 
이러한 무수한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데 적절한 환경과 생태적인 조건은 무척이나 다양하다. 이처럼 다양한 환경에 서로 다른 종류의 생명체들이 적응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은 오묘하고 신비스러운 생명현상의 특성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논어 계씨편 ‘불환빈 환불균(不患貧 患不均)’
 
그런데 19세기 후반, 전기와 석유의 이용에 따른 중화학 공업의 발달로 초래된 제2차 산업혁명과, 원자력의 이용으로 촉발된 제3차 산업혁명은 이른바 ‘에너지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현대인들의 삶을 안락하고 풍요롭게 한 측면이 분명히 있기는 하지만, 환경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특히 화석연료를 과다하게 사용하여 초래한 지구온난화의 문제는 현재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들 인간을 포함하여, 뭇 생명에게 커다란 재앙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최근에야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재앙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를 연기시키거나 완화시키는, 또는 재앙의 근본적인 원인을 구명하여 이에 대비하는 인류 전체의 노력은 안타깝게도 지지부진하기만 한 것 또한 사실이라는 진단이다.
 
이러한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태도에 획기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해 볼까 한다. 현대 문명이 직면하고 있는 환경과 생태계의 변화는 서서히 침몰하는 거대한 배와 같지 않은가.
 
이 배에는 에너지를 과도하게 소비하는 초선진국인들도 타고 있고, 에너지를 적게 소모할 수밖에 없는 후진국들의 주민들도 동승하고 있다. 선진국을 지향하는 대한민국의 온 국민들도 함께 타고 있다. 나아가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다고 전해지는 북녘의 동포들도 함께하고 있다.
 
이 배는 초만원이다. 60억을 상회하는 인류가 동일한 배를 함께 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배에는 100일 동안 60억 명이 먹고 마시는 데는 부족하지 않은 만큼 충분한 식품과 물이 저장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돈이 많아 다른 사람보다 몇 배를 충분히 구입해 먹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돈이 없거나 적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먹을거리를 충분히 구매할 수 없다면, 이 배가 과연 100일 동안 안전하고 행복한 그리고 즐겁고 희망찬 항해를 할 수 있을까?
 
이는 배를 타고 가는 60억 명이 갖고 있는 관습적이고 법률적인, 나아가 윤리적인 판단과 선택에 따라서 충분히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인간들의 미래, 나아가 이 지구에 살고 있는 뭇 생명의 운명은 결국은 우리 인류가 판단하고, 선택하고, 실천하는 데 따라서 충분한 가변성이 있지 않을까?
 
우리들이 어떻게 판단하고, 선택하여 행동하는지에 따라서 그 배에 함께 타고 있는 사람들의 운명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현대 문명의 미래는 결국은 우리들의 가치판단과 윤리적인 실천에 따라서 좌우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러한 까닭에 나는 나의 주변 사람들이나 나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한다. “불환빈 환불균(不患貧 患不均).” 구태여 풀어 쓴다면 ‘부족하거나 가난함을 걱정하기보다는, 오히려 불평등하거나 균등하지 못함에 관심을 더욱 쏟아라.’이다. 이 말씀은 내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작고한 지 15년이 넘은 김남주 시인이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이다. 이 말씀의 출전이 논어의 계씨편(季氏篇)임을 최근에 나는 알 수 있었다.
 
이에서 나아가 생물학에서 말하는 생명다양성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문화적 다양성을 이해하는 것을 화두로 삼고, 자신이 전공하는 학문, 특히 과학이나 또는 자신이 받아들이는 종교의 모습에 구애받지 말고, 서로 다른 문화, 다른 생각들을 어떻게 상호 이해하고 초월하며 수용해야 하는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관점에서 함께 걱정하는 것이 현재를 숨쉬고 있는 이 시점에 필요한 화두의 하나가 아닐까?
 
정영철 아우구스티노 - 순천대학교 생물학과 교수. 한국식물학회와 한국식물분류학회 이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전국교수노동조합 위원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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