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 하느님을 노래할 때] 우주를 창조한 물리법칙?
심종혁
21세기의 아인슈타인이라 불린다는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이 최근 “위대한 설계”(The Grand Design)라는 책을 출판하여 과학계와 종교계를 비롯한 지성계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우주는 중력이라는 물리법칙에 의해 만들어졌지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호킹 박사의 무신론적 주장은 종교계를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그의 주장은 과학의 영역을 넘어선 오만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책의 진지한 내용보다는 언론에서 표제로 사용하는 제목이 더 문제인 것 같다. 영국의 ‘더 타임즈’가 그랬듯이 우리나라의 모 일간지도 “스티븐 호킹, ‘우주는 신이 아니라 물리학 법칙이 만들었다.’” 하면서 대중들의 관심을 끌려 했다.
‘어떻게’와 ‘왜’
가톨릭 사제인 나는 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 그리고 대학원에서 이론물리학(입자물리)을 전공했기에 여러 과학도들과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해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이 있었다. 나도 그랬지만 막상 자연과학자들은 성경이나 신앙의 진리와 과학적 진리 사이에서 갈등을 겪지 않는다.
흔히 과학은 ‘어떻게(how)’라는 물음으로 자연세계의 현상들에 관해 연구하고, 종교는 ‘왜(why)’라는 질문으로 세상과 인간의 의미에 관해 탐구하기에, 이 둘은 서로 모순되지 않고 단지 서로 다른 각도에서 진리에 접근해 간다고 한다. 그 반대는 있을지언정 과학자들은 보통 자신들이 탐구하는 과학적 진리의 범위를 종교적 또는 철학적 진리의 범주와 혼동하지는 않는다.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관하여 체계적으로 분석하여 정리한 이언 바버(Ian Barbour)라는 학자는 갈등, 독립, 대화, 통합이라는 네 가지 이론 유형으로 둘 사이의 관계 양상을 분류했다.
‘갈등이론’은 과학과 종교는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서 양 극에 각각 성서 문자주의와 과학적 유물론이 있다.
‘독립이론’은 종교의 교리나 과학적 주장은 인간의 삶에서 완전히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기에 서로 비교할 수 없는 두 가지 언어로 취급되지만, 각각 이 세계에 대한 상호 보완적인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고 본다. 곧 종교와 과학이 서로 다른 영역을 다루기에 그 경계를 넘지 않는 한 서로 충돌할 이유가 없다고 보는 입장이다.
‘대화이론’에서는 연구 영역의 한계에 이르러 과학 자체가 답할 수 없는 극한 질문들이 제기될 때 비로소 종교와 대화가 가능해질 수 있고, 아울러 특정 과학 이론과 종교적 믿음 사이의 개념적인 유사성은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관한 더욱 깊은 이해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본다.
마지막 ‘통합이론’은 말 그대로 과학과 종교 간의 좀 더 체계적이고 폭넓은 동반자 관계를 찾아 두 원리의 긴밀한 통합을 모색한다. 현대 과학의 새로운 발견과 업적을 바탕으로 기존의 교리적 체계와 사고 구조를 재정립해 나가려는 노력이 신학자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갈등이론
이러한 분류를 적용해 보면, 호킹의 책은 분명 갈등이론에 속한다. 그는 책을 시작하면서 이전에는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이 제기할 만한 질문들을 제기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우주는 어떻게 움직이는 것일까? 실재의 본질은 무엇일까? 이 모든 것은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 과연 이 우주는 창조주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 통상 이러한 질문들은 철학에서 상대해 왔지만, 현대의 과학 특히 물리학의 발전을 따라잡지 못한 철학은 이미 죽어버려 더 이상 이러한 질문에 해답을 줄 수 없기에, 이제는 오직 과학자들만이 지식을 추구하는 인간의 탐구에 올바른 답을 줄 수 있다고 선언한다.
우주의 신비를 더 깊게 이해하려면, 우주가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대한 탐구뿐 아니라 “왜 무(無)가 아니라 무엇인가가 있을까? 왜 우리가 존재할까? 왜 다른 법칙들이 아니라 이 특정한 법칙들이 있을까?” 등의 생명과 우주에 관한 ‘왜’의 질문을 과학자들도 상대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어떻게’와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창조주가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끝이 없고 시간적으로도 시작과 끝이 없는 우주 그 자체에서 찾는다.
하지만 나의 견해로는 호킹 자신도 “위대한 설계”에서 대답하고자 하는 ‘왜’도 결국은 ‘어떻게’를 수사학적으로 ‘왜’라고 쓰고 있을 뿐 의미에 대한 질문인 ‘왜’에 대하여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다.
우주의 기원에 대한 교황청과 호킹 박사 사이에 전해지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1981년 바티칸에서 현대 우주론에 관한 학회가 열렸는데, 그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자연과학자들이 우주의 근원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지만 늘 해결되지 않는 질문, 곧 궁극적 미해결점을 안고 있습니다. 우리 종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질문이 요구하는 것은 물리학이나 천문학적 지식이 아니라, 이를 초월한 어떠한 형이상학적인 진리일 것이라 믿습니다.”
곧 우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밝히는 것은 과학자들의 몫이지만 우주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종교인들이 고민할 문제이니 과학자들은 입을 다물라는 뜻이 담긴 말씀이셨다.
호킹은 이 학회에서 기조강연을 했는데 교황님을 알현하고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했던 강연의 주제가 우주에는 시초나 창조의 시기가 없었을 가능성에 관한 것이었음을 교황님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신다는 것을 아주 다행으로 여기고 기뻤습니다.”
“위대한 설계”를 통하여
호킹은 앞에서 ‘왜’라고 제기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우주의 양자역학적 본성을 바탕으로 탐구한다. 양자역학적 본성은 필연적으로 불확정성 원리를 수반한다.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하나의 물리량이 정확하게 측정되면 다른 하나는 필연적으로 덜 정확하게 측정될 수밖에 없다. 공간이 비어있다는 것은 장(場)의 값과 그 변화율이 둘 다 정확히 0이 된다는 말인데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이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빈 공간이란 있을 수 없다. 다만 양자역학적인 무(無)는 가상의 입자쌍들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양자적으로 요동치고 있는 진공이라는 최소 에너지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양자요동에 따라 양자역학적인 무(無)의 상태로부터 무수히 많은 미세한 우주들이 창조되고 소멸될 것이다.
이들 미세 우주들 중 일부는 임계점을 넘어서 각자 다른 물리법칙을 갖는 어떤 ‘우주’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자연발생적으로 탄생한 수많은 ‘어느’ 우주들 중 하나는 급팽창을 겪고 별과 은하를 만들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가 되었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양자요동의 산물인 셈이다.
이에 따르면 어떤 물리계의 초기 조건이 미리 주어진 상태에서 예측되는 미래는 결국 근본적으로 불확실한 과정으로서, 모든 역사의 경로를 따라 서로 간섭을 일으키며 최종 상태에 이른다. 이에 따르면 우주는 단순히 하나의 과거나 역사만을 갖지 않는다. 이로부터 호킹은 “이 역사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무엇이 측정되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존재한다. 역사가 우리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관찰을 통해서 역사를 창조한다.”라고 말한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끈 이론’에 바탕을 둔 일종의 네트워크 이론인 ‘M-이론’을 들어 물리법칙에 따라 지배되는 우주 창조, 곧 자발적 우주 창조를 설명한다. “무가 아니라 무엇인가가 있는 이유,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자발적 창조이다.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우주의 운행을 시작하려고 신에 호소할 필요는 없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창조하는 우주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된다. 이 우주는 철저히 물리법칙에 의존해 만들어지는 세계인 것이다.
“위대한 설계”를 통해서 호킹이 근원적인 ‘왜’라는 논의를 과학의 영역에 끌어오려 시도하지만 결코 성공하지는 못한 듯하다. 과학적 인식 체계를 통해 과학이 ‘왜’라는 질문에 어떻게 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 하지만, 결국 그가 상대하는 ‘왜’는 왜가 아니라 ‘어떻게’의 왜곡된 표현일 뿐이다.
갈릴레오 시대의 과학과 종교의 갈등을 통해서 잘 알고 있듯이 둘 사이의 마찰은 제도적 교회가 진리를 독점해서 사회에 일방적으로 제공하려는 역할을 하려 했기 때문에 빚어졌을 것이지만, 그만큼 종교가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온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는 과학이 진리를 독점해서 사회를 통제하는 시대가 왔나 보다. 과학과 종교의 관계는 시소놀이라고나 할까, 이 과정은 마치 한 어린이가 차츰 성장하면서 조금씩 나름대로의 상식과 진리의 범주가 확대되어 가고, 나름대로 어릴 때 지닌 신화적 요소들을 배척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단순하고 유치하게 보였던 그 신화적 요소들이 다시금 다른 의미로 파악되고 이해되는 과정을 통해서 새롭게 자신의 인생관과 가치관 속으로 융화되는 과정과 비슷할 것이다.
신학자들은
진리에 대한 인식도 역사의 흐름 안에서 과학과 문화가 확대되면서 차츰차츰 변하게 된다. 다른 체계의 진리와 다른 차원의 도덕적 개념들을 접하면서, 자신의 고립된 가치와 진리의 체계에서 벗어나고, 그러면서 더 확실하게 자신이 위치한 진리의 범주를 알게 되고 더 분명하게 새로운 의미를 찾게 되는 것이다.
신앙의 진리와 실증 과학이 밝혀낸 진리는 결코 모순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 대중들이 철학적으로 세련된 진리관을 가지기를 요구할 수는 없다. 과학적 입장과 새로운 정보는 우리가 지닌 가치관과 세계관을 수정하도록 요구한다. 하지만 어떤 새로운 과학적 정보가 인간의 삶에 즉각적이며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그냥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신학자들은 좀 더 진지한 인내심과 노력으로 새로운 과학적 증거들을 이해하고 성찰하면서 인간과 세계 그리고 하느님에 관한 의미들을 밝히려 애써야 할 것이다.
심종혁 루카 - 신부. 예수회 회원으로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이다. 서강대학교에서 수학과 이론물리학을 전공하고, 미국 보스톤의 웨스톤 신학대학원에서 영성신학을 전공하였으며, 로마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교의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0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