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 하느님을 노래할 때] 사실에서 진실 찾기
홍승수
벼락 · 난기류 · 테러 … 하늘의 진실은?
승객과 승무원 228명을 태우고 대서양 상공을 비행하던 에어프랑스 소속 여객기 한 대가 감쪽같이 사라진 적이 있다. 그 사건을 보도하는 신문 기사의 제목이 사고 원인, 곧 하늘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여객기의 실종이라는 ‘사실’에서 사고 원인이라는 ‘진실’을 찾고자 한다. ‘사실에서 진실 찾기’는 사건의 원인을 규명하는 과정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에도 ‘사실에서 진실 찾기’가 그대로 들어있다. 청마 유치환의 단 한 줄짜리 시 ‘낙엽’을 보자. 김경미 시인은 청마의 독백 “너의 추억을 나는 이렇게 쓸고 있다.”를 두고 “이 한 줄짜리 우주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다 읽고, 언제 다 얘기해 대나. … ‘지금도’ 그대를 추억하는 그 현재형은 너무 아프고 아름답고 서럽다.”고 했다.
청마의 ‘낙엽’에 주어진 하나의 사실인 ‘쓸고 있다’에서 김 시인은 ‘현재진행형’의 진실을 찾아냈던 것이다. 현재진행형이 담긴 진실은 ‘너무 아프고 아름답고 서러운’ 얘기였다. 김 시인이 찾아낸 진실인 ‘서러운 얘기’가 독자에게는 하나의 사실이 된다. 그리고 그 사실에서 찾아낼 수 있는 진실은, 유치환과 시조시인 이영도의 ‘사랑 이야기’일 것이다. 사실에서 진실 찾기는 이렇게 진실 너머 진실로 이어진다.
사진 예술에서의 ‘사실에서 진실 찾기’
나는 김아타의 2006년 작품 ‘On-Air’를 보면서 한동안 멍해진 적이 있다. 뉴욕 맨해튼 타임스퀘어의 야경이 분명한데 어쩐 일인지 그 사진에는 움직이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다. 휘황한 네온사인이 그대로인 채 괴괴한 고요만이 전면에 그득하다.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카메라의 셔터를 장시간 열어둠으로써 움직이는 광원의 영상들은 서로 중첩되어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뭉그러진 것이다. 하지만 고정된 광원의 영상은 아주 생생한 모습이다.
작가는 자신의 사진에 드러난 ‘없음’이란 사실에서 ‘있음’이란 진실을 알아보라고 나를 윽박지르는 듯했다. 눈앞에 드러난 현상(現象)에서 그 내면에 켜켜이 쌓여 있을 중층성(重層性)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진실, 진실 너머의 진실, 그 너머에 있을 또 다른 진실, 그리고 또 …. 진실에서 진실로 이어지는 저 심연의 밑바닥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을까? ‘계시’, 너 깊고 무서운 침묵의 바다여!
통(桶)장사의 봄철 돈벌이
이야기가 너무 무겁게 흘렀다. 우스개를 하나 하겠다. 필자가 중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공동 목욕탕엘 가면 얇고 긴 사다리꼴의 나무 조각들을 이어 붙여 만든 나무통이 오늘의 플라스틱제 바가지를 대신했다. 옛날에는 동네마다 통을 만들어 파는 전문인이 있었다. 그런데 이 통장사가 봄철만 되면 어김없이 돈을 많이 버는 것이었다. ‘통장사의 봄철 돈벌이’라는 사실에 숨은 진실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봄철이면 중국에서 불어오는 황사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봄에 눈병이 걸린다. 선비가 안질이 걸리면 바깥출입을 삼가게 마련. 집안에 틀어박혀 거문고만 뜯다보니 거문고 줄이 자주 끊어진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거문고 줄은 고양이의 힘줄로 만든다. 그러니 고양이가 수난을 당할 게 뻔하며, 쥐의 수가 급증한다. 쥐가 나무통을 마구 쏠아서 구멍이 나니까 통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통의 가격이 따라서 오른다. 이렇게 해서 봄이 오면 통장사가 한몫을 톡톡히 챙길 수 있었다.
이 우스개에서 우리는 논지의 전개를 1차원으로 제한했다. 곧 단선적이다. 분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서양 과학에서의 ‘사실에서 진실 찾기’는 단선적이며 단면적이기 십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매일의 삶에서 다양한 사건과 인물, 그리고 늘 변하는 환경과 만나게 된다. 예를 들어 쥐약을 준비해 둔 약방도 봄이 오면 돈을 벌 수 있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약방에 돈이 많이 쌓일수록 통장사의 수입은 준다.
사실에서 진실 찾기가 평면이나 입체로 전개되게 마련인 우리네 삶에서 우리는 하나의 사실이 내포하는 진실의 중층성뿐 아니라 그 다면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교통사고 한 건이 수십 종의 직업군에게 직 · 간접의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중층성과 다면성이 증가할수록 신의 영역이라 할 우연과 사람의 몫인 필연의 구별이 점점 더 모호해진다. 가벼운 우스개가 무거운 우연과 필연의 관계로 이어졌다.
과학에서 듣게 되는 ‘진실 너머의 진실’ 이야기
문학과 예술은 물론이고 경제활동 역시 ‘사실에서 진실 찾기’의 큰 틀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이제 과학에서 ‘사실에서 진실 찾기’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둘러볼 차례다.
덴마크의 천문학자 튀코 브라헤(1546-1601년)는 일생을 걸고 행성의 천구상 운동을 관측했다. 이 방대한 자료가 하나의 사실로 요하네스 케플러(1571-1630년)에게 주어졌다. 거기서 케플러가 찾아낸 진실은 행성 운동에 관한 그의 세 가지 경험 법칙이었다.
뉴턴(1642-1727년)은 케플러의 경험 법칙을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여 거기에서 진실을 찾아냈으니,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중력의 세기가 둘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면 질량의 곱에 비례한다는 만유인력 법칙이다. 뉴턴의 중력을 아인슈타인은 하나의 경험적 사실로 받아들여 중력의 실체를 시공간의 곡률로 해석한다.
시인 김춘수의 ‘꽃’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자면, 브라헤의 방대한 관측 자료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케플러가 브라헤의 자료에 ‘이름’을 불러주자, 곧 타원 궤도의 가능성을 열어놓자, ‘행성 운동의 세 가지 경험 법칙’이란 ‘꽃’이 되어 케플러에게 돌아왔다. ‘몸짓’과 ‘이름’과 ‘꽃’의 관계는 케플러와 뉴턴 사이에서 다시 성립한다. 그러고 뉴턴과 아인슈타인으로 이어진다.
나는 몸짓이 꽃으로 되는 과정을 미사에서 면병이 사제의 축성으로 성체로 변하는 성체성사에 대비하곤 한다. 사실에서 진실이 밝혀짐은 계시의 열림이다. 신앙인으로서 나는 계시의 열림이 나를 하느님께 데려다줄 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나는 또 과학도로서 계속 찾아지는 진실의 궁극에 하느님이 자리하시리라 믿는다. 믿기 위해 알아야 하고, 알기 위해 믿어야 하는 이유가 ‘사실에서 진실 찾기’의 반복에 있다.
종교와 과학의 언어
과학이란 이름의 ‘청동 거울’은 하느님의 모습을 희미하게만 비춰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앞에서 ‘증명한다’나 ‘이해한다’가 아니라 ‘믿는다’는 표현을 썼다. 내가 믿는 하느님은 과학의 힘으로 증명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사실에서 진실이 찾아질 때마다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되므로 사실의 단계에서 유용했던 표현은 계시의 열림과 더불어 그 효력을 잃는다. 새로 찾아진 ‘진실’도 언젠가는 ‘사실로 변할 운명’이므로 그 ‘진실’마저 힘을 잃기는 앞 단계에서의 ‘사실’과 마찬가지다. 이런 이유에서 삶의 구석구석에서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사실에서 진실 찾기’가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해 주지는 못한다. 여기가 언어의 맹점이다.
시로 돌아가 보자. 낙엽 = 추억 ; 깃발 =소리 없는 아우성 ; 몸짓 +이름 ⇒ 꽃. 이렇게 써놓고 보면 시인의 언어가 모순과 억지로 가득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모순과 억지 덕분에 겉으로 드러난 현상의 내면세계를 진지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모순과 억지는 시인에게 허락돼야 할 특권이다. 시는 이렇게 언어의 한계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과학은 수학을 포함한 언어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과학이 늘 증명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학자에게는 모순과 억지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과학도로서 나의 두 발을 언어의 맹점에 올려놓을 때마다 하느님께 조금씩 다가설 수 있었다. 나의 신앙은 언어의 맹점, 다시 말해서 과학의 한계에서 비롯한다고 하겠다. 구체적 통계 자료를 본 적은 없지만 자연과학대학에 신자 교수들이 의외로 많다. 연구를 깊이 해본 경험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과학의 한계를 인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나는 ‘가톨릭 성가’ 2번, ‘주 하느님 크시도다’를 좋아한다. 나의 종교적 경험을 노래하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종교적 경험과 종교를 이렇게 정의했다.
“경험할 수 있는 무엇인가의 이면에 우리 마음이 파악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으며, 그 [무엇인가가 지닌] 아름다움과 숭고함이 오직 간접적으로만 또 희미하게만 우리에게 도달한다고 느껴질 때, 그것이 바로 종교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종교적이다.”
위의 내용을 ‘사실에서 진실 찾기’의 틀에서 분석하면, ‘경험할 수 있는 무엇’이 사실이고, ‘파악할 수 없는 무엇’이 진실이며, ‘아름다움과 숭고함’, 곧 성스러움이 진실 너머 진실이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종교 정의에서 자신을 ‘종교적’이라 했지만 그는 우리가 지향하는 ‘신앙인’은 아니었다. 신앙인이라면 ‘성스러움’을 ‘초월적 실재’의 현현(顯現)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아인슈타인은 그런 실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자주 인용되는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았다.”는 그의 언급도 아인슈타인이 초월적인 존재를 믿어서 한 소리가 아니라, 자신이 확신하는 자연법칙의 결정론적 특성을 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한 하나의 수사였다.
그렇지만 아인슈타인의 종교 정의는 하늘, 곧 자연에서 하느님을 찾으려는 우리에게 좋은 안내자가 된다. 문제는 ‘진실 너머 진실’을 찾아 그 무엇을 초월적 존재의 현현으로 받아들일 것이냐에 달려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나 자신의 몫으로 남아있는 현실적 제약이다. 그 선택은 누구도 나를 대신해 줄 수 없다.
나는 천문학도로서 “경험할 수 있는 무엇”으로 현대 천문학이 찾아낸 우주의 오늘과 어제의 모습을 알고 있다. 현대 천문학은 우주의 내일 모습도 점친다. 나는 우주의 모습과 진화상에서 성스러움을 느끼며, 그 성스러움에서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하고 고백한다.
홍승수 라파엘 - 서울대학교 물리 · 천문학부 명예교수. 국립고흥청소년우주체험센터 원장.
[경향잡지, 2010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