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에게 길을 묻다] 선을 가장한 악
황영애
생물체가 생명을 유지하는 데 어떤 원소들이 필요하며 또 이로울까요? 수소, 산소, 탄소, 질소, 인 등의 비금속원소 외에 철, 칼슘, 마그네슘, 나트륨, 칼륨 같은 금속원소까지 최소한 30개 정도의 원소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흔히 들어본 적 있는 원소들이 대부분이니 왠지 마음이 놓이지요?
이 가운데 몇 가지 원소의 역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칼슘은 뼈나 치아, 갑각류의 껍질을 형성하면서 몸의 구조를 이루고, 헤모글로빈의 중심에 있는 철은 온몸에 산소를 운반해 줍니다. 칼륨은 세포 내액의 산 · 알칼리 평형에 가장 중요한 미네랄입니다. 혈장 속의 칼륨은 근육과 신경의 기능 조절에 필요하고 이것이 만이 저하되면 근육 마비를 일으킵니다.
소량이지만 사악한 중금속
앞에서 말한 필수 원소들 이외의 원소들 대부분은 일정한 농도 이상이 되면 독성을 나타냅니다. 그 원소들의 수가 훨씬 많다고 너무 불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행히 창조주께서는 독성을 띠는 원소의 양은 필수 원소들의 양에 비해 지구상에 극히 소량만 존재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독성을 가지게 되는 메커니즘은 여러 가지이나 그 가운데 중금속이 하는 짓을 보면 참 사악해 보입니다. 주기율표에서 자신과 같은 족(族)에 있는 필수 원소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슬쩍 바꿔 들어가서 암과 같은 병변을 일으키니까요. 원래 생물체는 필요한 원소가 아니면 흡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같은 족에 있는 원소들은 그 화학적 성질이 비슷하기 때문에 중금속을 필수 원소로 오인하여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관련되어 자주 언급되는 방사성 동위원소들이 왜 위험한지 궁금하시지요? 바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이유, 곧 필수 원소의 자리에 이들이 대신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늘 깨어있어라
동위원소란 양자수는 같지만 중성자수가 다른 원소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의 화학적 성질은 같습니다. 마치 한 원자의 형제와 같은 원소들이지요. 그리고 방사성 동위원소는 동위원소 가운데 불안정한 원소인데 방사선, 곧 알파선, 베타선 또는 감마선을 방출하며 계속 분해하여 안정한 원소로 변해갑니다.
그 가운데 이번 사고로 우리나라에서 검출된 것은 핵분열 생성물인 세슘(Cs-137, Cs-134), 요오드(I-131), 스트론튬(Sr-90) 등입니다. 방사성 물질은 반감기가 있어 저절로 사라지는데 요오드의 경우는 8일이 지나면 반으로 줄고 두 달 정도 지나면 거의 없어집니다.
자연 상태의 세슘은 Cs-133인데 방사성을 가진 것은 Cs-137로 체외에서의 반감기는 30년이지만 체내에서의 반감기는 약 110일입니다. 하지만 생물체는 Cs-133과 Cs-137을 구별 못할 뿐 아니라, 같은 족에 있는 필수 원소인 칼륨으로 착각하여 체내로 그냥 흡수하므로 앞에서 말한 칼륨 결핍의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데 Cs-137에 피폭된 사람에게 푸른색 염료인 프러시안 블루(Prussian Blue : Fe4[Fe(CN)6]3 · xH2O)를 투여하면, 체내에서 세슘과 착물(錯物)을 만들어 몸 밖으로 배출시기 때문에 반감기가 30일 정도로 짧아져 그 위험성을 줄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요오드나 세슘은 상대적으로 반감기가 짧고 배설이 가능하기 때문에 피폭량이 적으면 위험도가 낮을 수 있습니다.
스트론튬의 경우는 훨씬 심각합니다. Sr-90의 반감기는 보통 28.9년으로 독성을 오랫동안 유지합니다. 이 물질은 세척해도 없어지지 않을뿐더러 배설해도 따라 나오지 않기 때문에 더욱 무섭지요. 또한 같은 족에 있는 필수 원소인 칼슘 대신에 동물의 뼈에 스며들어 골수암이나 백형병을 유발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위험한 방사성 물질이나 중금속이 생물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필수 원소를 가장하여 체내에 스며들어 병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니, 도둑이 언제 올지 모르며,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니 늘 깨어있으라(마태 24,42-44 참조)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겸손과 사랑을 가장한 교만과 탐욕
우리는 살아가면서 눈에 띄게 악한 사람이나 불행의 전조가 확실한 일에는 경계나 준비를 열심히 하기 때문에 이들이 끼치는 악과 불행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만나는 일상에서는, 처음에는 선한 일인 줄로 믿어 방심하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악의 유혹에 빠져드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하느님과 이웃 사랑으로 시작한 봉사활동이 어느 순간부터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활동이 되어버립니다.
기도를 과도하게 많이 하면서 인정할 수 없는 사적인 이적 행위로 사람들의 간심을 받으며 지배하려 하고, 자신을 반대하면 그들이 성직자든 누구든 가리지 않고 비난하는, 허영심에서 비롯된 중독성 기도, 또 자기성찰을 하다가 자기비하를 너무 많이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측은지심을 유발해 관심과 동정을 받으려는 중독성 자기 비난식 기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하는 척하면서 그 중심에는 자기 자신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겸손과 사랑을 가장한 교만과 탐욕이랄까요?
묵상이나 관상기도 등을 통하여 영을 식별하며 하느님과 일치하도록 이끄는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은, 악한 영이 선을 가장할 때 처음에는 거룩하고 좋은 생각이 들게 하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본모습을 드러내어 은밀한 계교와 흉악한 음모에 빠지게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악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다음과 같이 신중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분별하라고 합니다.
‘처음, 중간 그리고 끝이 다 좋아서 온전히 좋은 것으로 기울어진다면, 그것은 선한 신의 표적이라 믿어도 된다. 그러나 결과가 원래 결심한 것보다 덜 좋은 것으로 기울어지거나 전에 영혼이 갖고 있던 평화와 안식을 빼앗아 그 영혼을 혼란스럽고 당황하게 만들었다면 이는 악한 영에서 왔다는 표시로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이 선으로 위장하여 들어오는 악한 영을 분별하려면 결과를 보기까지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고 시간을 두고 기다리는 참을성이 있어야겠습니다.
인내와 믿음으로 겸손하자
그리고 필수 원소를 가장한 방사성 동위원소들을 흡수하는 것이 생물체에게 치명적이듯 선의 가면을 쓰고 다가오는 악을 분별하지 못함으로써 인간의 영혼이 받게 되는 위험도 그 정도가 결코 덜하지 않습니다. 실망과 좌절에 빠져 극단적인 선택으로 불행하게 인생을 끝막음한 이 시대의 많은 사건들이야말로 악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결과일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자신의 선택이 가장 옳다고 느끼게 했으니 악은 얼마나 교묘한지요?
이냐시오 성인은 이를 극복하고자 다음과 같은 노력을 하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 괴로운 순간에도 좌절하지 말고, 하느님께서는 영혼 구원을 위하여 충분한 은총을 남겨두셨음을 잊지 말아야겠고, 자기가 받고 있는 괴로움에 대해 인내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그렇게 계속하면 머지않아 위안이 올 것을 믿어야 한다. 이를 위해 영적인 생활을 게을리하거나 소홀히 하지 말고, 봉사와 찬미를 드리는 데도 우리의 자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되는 것임을 깨달아 겸손해져야 한다.
우리는 이냐시오 성인의 식별을 위한 지혜를 따름으로써 선을 지향하는 한편, 설령 악의 유혹에 빠졌다 하더라도 이를 이겨내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영신수련이 목적으로 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적 인생관을 파악하고, 양심을 성찰하고 통회함으로써 더욱 성화되어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나라를 건설하는 협력자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황영애 에스텔 - 이학박사(미국 오하이오주립대 화학과), 상명대학교 교수이며 저서로 “화학에서 인생을 배우다”(2010, 더숲)가 있다.
[경향잡지, 2011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