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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사상 - 노장이후

東洋哲學

by 巡禮者 2010. 8. 18.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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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사상 - 노장이후

 

도가학파는 춘추(春秋)시기의 노자에 근원을 두고 전국(戰國)시기에 형성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백가쟁명(百家爭鳴)' 중의 한 학파로써 유가와 대립하면서 존재하였다.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주로 법가(法家)에 의존하여 통치함에 따라 도가는 유가와 함께 배척되어 하나의 학파로써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대(漢代) 초기에 이르러 도가사상은 다시 흥성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주로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어떤 문사(文士)의 '무위치국(無爲治國)'의 의견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즉 진(秦)왕조가 멸망하게 된 원인을 황제의 지나친 욕망, 법령의 과다함, 형벌의 잔혹함으로 초래된 결과로 보고 '무위(無爲)'가 치국(治國)의 가장 좋은 원칙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도가사상은 중시를 받게 되었다.

 

유방이 죽은 이후에도 조참(曹參)은 승상이 되어 줄곧 무위(無爲)로써 다스리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황제는 솔선하여 근검절약하고 백성의 조세를 감면하였으며 형법이 완화되고 사회 경제가 발전하여 도가사상은 확실히 긍정적인 역할을 발휘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상하의 위계질서를 중시하지 않거나 제후들이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는 등등의 약간의 문제도 초래되었다. 그래서 한(漢) 무제(武帝)에 이르러서는 다시 유가사상으로써 통치를 강화하고 천하를 다스리려는 의도로 '백가를 배척하고 오직 유학만을 존중한다(罷黜百家, 獨尊儒術)'는 정책을 실행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도가사상의 황금시대도 그와 함께 끝나게 되었다.

 

그렇지만 동한(東漢) 이후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를 거쳐 수당(隋唐)에 이르면서 유가와 도가에는 인도에서 전래된 불학(佛學)이 첨가되어 점차 유(儒), 도(道), 불(佛)이 융합되는 현상이 출현하였다. 이상에서 도가사상은 비록 성쇠의 기복을 여러차례 겪었지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지위를 한번도 차지하지 못하고 단지 유가사상에 대한 보완적인 역할과 지위를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동한(東漢)시기에 국가의 정치가 갈수록 악화됨에 따라 일부의 사람들은 그 원인이 유가사상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새롭게 도가사상을 일으켜 사회적 위기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당시에 사회에는 '태평교(太平敎)'라고 하는 일종의 도교(道敎) 조직이 출현하였는데 그들은 ≪태평경(太平經)≫이라는 책을 경전으로 삼았다. ≪태평경(太平經)≫은 비록 '치국의 도(治國之道)'를 연구한 것이지만 거기에는 신비한 종교 미신적 색채가 충만하며, 또한 노자를 신격화하여 '태상노군(太上老君)'이라 칭하고 사람들에게 그를 공양하고 숭배할 것을 요구하였다.

 

동한(東漢) 말기에 장각(張角)이 영도한 농민봉기도 ≪태평경(太平經)≫을 선전하면서 노자를 숭배하고 도교를 신봉할 것을 기치로 내걸었다. 그러나 새롭게 흥기한 도교는 결코 동한(東漢) 후기의 쇠미해진 운명을 구원하지 못하였으며, 장각(張角)의 황건(黃巾)봉기도 실패로 끝났다. 위진남북조 시기에는 '현학(玄學)'과 도교 미신이 성행하였는데, 사람들은 도가사상의 치국구세(治國救世)의 도를 불로장생(不老長生)을 추구하는 수련성선(修煉成仙)의 도로 완전히 변화시켰다.

 

이렇게 하여 도교는 노자와 장자의 원래의 사상에서 갈수록 멀어져 중국의 한 종교가 되었으며, 많은 유파가 출현하여 국외에도 전파되었다. 따라서 도교는 도가사상과 비록 관계가 있긴 하지만 양자는 결코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 혼돈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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