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의 원어는 dhyana(禪)이다.
반야심경 전체가 명상의 핵심에 관한 언급이다. 명상은 집중이 아니다. 집중속에는 집중하고 있는 자기 자신과 그 집중의 대상으로서의 객관이 있다. 이원성이 있다. 그러나 명상 속에는 명상하는 주체도 없고 명상의 대상으로서의 객관도 없다. 그러므로 명상은 집중이 아니다. 명상속에는 명상하는 것과 명상되어지는것의 구별이 없다.
집중은 이원적 의식의 차원이다. 이 때문에 집중을 계속하게 되면 피로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 24시간 동안 계속 집중의 상태로 있을 수 없다. 사이사이에 휴식이 필요하다. 집중은 결코 그대의 본성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명상은 아무리 해도 지치지 않는다. 명상속에서는 피로해지는 일이 없다. 하루 24시간 동안 줄곧 명상할 수가 있다. 아니 이 명상의 상태를 영원히 지속시킬 수도 있다. 명상은 그 자체가 가장 깊은 휴식이기 때문이다.
집중은 행위이다. 하나의 의지적 행위이다. 그러나 명상으 행위가 아니라 비의지적인 경지다. 휴식의 차원이다. 이 명상의 차원에서 존재는 그 자신의 본질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그 자신의 본질은 곧 모든 존재의 본질로 연결된다. 집중속에는 계획이 있다. 선입견, 관념이 있다. 집중속에서의 마음의 기능은 결론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명상 속에는 거기 명상 그 자체를 하기 위한 결론이나 결정 따위는 없다. 여기 어떠한 행위도 필요가 없다. 노자는 이를 爲無爲라 불렀다. 전혀 조작이 없는 행위, 비행위적 행위라 불렀다. 禪師들의 언어는 바로 이 차원을 말하고 있다.
집중은 인간의 차원이요, 명상은 성스러운 차원이다. 집중은 그대 속에 하나의 중심감을 형성한다. 집중은 그대속에 에고를 심는다. 집중을 많이 하면 할수록 거기 강화되는 것은 그대 자신의 에고다. 그대는 점점 더 강해질 것이다. 그대의 의지는 더욱더 굳세어질 것이다. 그대는 보다 완벽해 보이려고 보다 든든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명상가는 강해지지 않는다. 강해지는 대신 묵묵해 진다. 명상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은 평화다. 집중은 의지의 사나이로 만들고 명상은 텅빈 공간으로 만든다. 붓다가 사리자에게 말한 바로 이것이다. 반야바라밀다는 바로 명상을 뜻한다. 지혜의 완성, 초월의 지혜를 의미하는 것이다.
명상을 위해서는 마음의 기능이 완전히 정지되어야 한다. 집중이 마음의 노력이라면 명상은 아예 마음이 없어져 버리는 경지다. 명상은 순수한 각성이다. 그러므로 명상속에는 어떠한 동기도 목적도 없다. 명상은 씨앗이 없이 싹터져 자라는 나무와 같다. 이것이 명상이 기적이요 신비이다.
집중은 그속에 씨가 있다. 어떤 목적이 있다. 동기가 있다. 그러나 명상 속에는 아무런 동기도 없다. 신을 느끼려는 그 명상조차 이제는 통속적이다. 또한 니르바아나에 이르기 위해서 명상한다면 그 역시 통속적인 범주룰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명상은 신앙이 아니다. 붓다에게서 예수에게서 얻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명상은 결코 지식이 아니다. 명상이란 그대 삶의 그 순간순간과 동시에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명상은 자유의 이 심연에 들어가는 그 준비작업이다. 명상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거기 그대 자신은 점점 사라져 간다.
붓다는 사유의 세단계를 말한다.
첫째 단계는 까르마 아바라나(karma‐avarana, 業障)다. 불완전하게 끝나버린 행위를 뜻한다. 행동에는 하나하나의 행동마다 완전해지려는 성질이 있다. 모든 것은 그 자체를 완전무결하게 나타래는 속성이 있다. 이 본질적인 욕구가 있다. 미적지근하게 끝나버린 행위들은, 언제까지라도 그대 주위를 맴돌고 있다.
둘째단계는 끌레샤 아바라나(klesa‐avarana, 煩惱障다. 탐욕, 미움, 시기, 질투 등이다. 이런 것들을 모두 묶어서 클레샤(번뇌)라고 한다.
세 번째 단계는 불완전하게 끝나버린 행위도 아니고 불순한 번뇌도 아닌 즈네야 아바라나(jneya‐avarana)이다. 믿음, 의견, 이데올로기, 지식의 장애를 뜻한다. 이것들은 그대의 시력을 가린다. 이들은 그대가 올바르게 볼 수 있도록 넉넉하게 공간을 주지 않는다. 그대 본질의 하늘을 가리는 이 세가지의 티끌을 털어버려야 한다.
이 세가지의 덮게가 걷혀질 때 비로소 비사유의 차원에 살 수 있다.
B.S 라즈니쉬의 반야심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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