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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의 '만종'이야기

인문계 자료

by 巡禮者 2010. 10. 9.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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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종으로 유명한 '밀레'는 고흐보다 한세대 앞선 이른바 '바르비종파의 대표적 화가로서 후기 인상파의 대가인 고흐에게 가장 큰 예술적 영향을 미친 화가로 꼽히고 있어 그에게 친근감을 더해줍니다.


밀레가 사망한 해인 1875년 그의 전시회를 관람한 고흐는 가장 큰 감명을 받은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당시 한 미술상의 점원이었던 고흐는 밀레의 그림으로부터 큰 감명을 받았으며 나중 점원을 그만두고 화가로 전환했을 때 밀레를 추종하고 나섰는데 고흐로서는 밀레의 그림이 당시의 화단의 조류로서는 가장 현대적이어서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두 사람 작품의 소재나 대상도 상당히 유사하며 자연과 소박한 인간의 삶을 표현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 이삭줍는 사람, 탈곡하는 농부등 시골 들판 농부들의 소박한 모습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요. 자연주의 화파의 대표적 화가였던 밀레는 자연과,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들의 모습에서 삶의 진면을 찾았으며 고흐 역시 밀레의 이같은 사조에 전적으로 동감, 농부들이나 자연의 모습을 즐겨 소재로 삼았습니다.


해질녘 들판에서 부부가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멀리 마을 교회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밭일을 하던 남편은 모자를 벗고 여인은 두 손을 모아 기도를 드립니다. 종일 열심히 일하여 힘들고 고단한 하루였지만 일을 끝내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경건하고 평화로운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며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그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857년 장 프랑수아 밀레가 그린 '만종(晩鍾)'입니다.

본래의 제목은 The Angelus기도로, 해질 무렵의 빛의 효과를 이용해 시적 정감이 넘치는 분위기를 창조한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겉으로 평화롭게  보이는 이미지와는 달리 이 그림뒤에는 슬픈 이야기가 숨어있습니다.


◆ 세계사 오류사전/조병일 이종완 남수진 지음/연암서가 출판


해질 무렵 농촌 들판에서 기도하는 농부 부부를 그린 밀레의 그림 ‘만종’은 ‘가난한 농부가 교회에서 들리는 종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수확의 기쁨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죽은 아이를 묻으며 기도하는 농부의 슬픔’을 표현한 그림이었다고 밝힌다.


부부 앞에 놓인 감자 바구니는 원래 죽은 아이를 담은 관이었다. 밀레는 관을 그렸다가 그림을 본 친구의 만류로 시체를 감자 바구니로 덧칠했다. 루브르 박물관은 자외선 투사작업을 통해 그 감자 바구니의 초벌 그림이 실제로 어린 아이의 관이었음을 입증했다.


여기에 덧붙여 이야기를 좀 더 실감나게 만들어주는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너무도 가난했던 부부가 겨울을 지나며 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봄이 오면 밭에 감자를 심고 그것을 잘 가꾸어 수확함으로써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몹시도 춥고 배고픈 겨울을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어린 아기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봄이 오는 길목에서 죽고 말았다. 부부는 너무도 슬펐다. 아기를 감자밭 속에 묻어 주려고 작은 관 속에 넣어서 나갔다.


배고파서 죽어간 아기가 너무도 불쌍해서, 먹을 것이 많이 자라는 밭 속에 묻어주려는 것이었다. 밭을 파고 묻기 전에, 마지막으로 죽은 아기를 부부 사이에 놓고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께서 그 불쌍한 아기에게 기쁨과 축복 많이 내려 주시기를 소원하는 기도를 드린다. 이런 슬픈 이야기를 들어 알게 된 밀레는 그 내용을 한 폭의 그림 속에 담고 싶었다.


아기의 시체를 놓고 기도하는 슬픈 부부의 모습을 밀레가 그림으로 그렸는데 그것을 본 친구가 그림이 너무 침울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조언하며 아기의 시체를 다른 소재로 바꿀것을 제안했다. 그래서 밀레는 아기의 시체를 그렸던 그림 위에 물감을 덧칠하여 감자 바구니를 그려 넣었다.


그 이후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채 그저 평화롭고 목가적인 풍경이 담긴 세계적인 명작으로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밀레가 그당시 사회 부조리를 꼬집는 그림을 너무 사실적으로 고발하는 스타일로 그려서 비평가들에게 혹평을 받았다고 합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의식화된 화가였던 셈이다.


이렇게 그림 뒤에 숨은 이야기들을  들여다보면 당시의 사회상이 잘  드러나 보이며 사실을 알고 나서 그림을 보게 되면 그 느낌이 달라집니다.

 

  Salvador Dali(1904-1989)作 Atavism at Twilight

 

  Archaeological Reminiscence of Millet"s Angelus

 

피카소와 함께 스페인이 낳은 현대미술의 거장으로, 초 현실주의의 대가이자 20세기 최고의 예술가 살바도르 달리는


-광기와 모순과 신경증을 예술로 승화시킨 미치광이로 불린, 삶이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작품이었다 - 어린 시절 루브르박물관에서 처음 만종을 보고 사람들이 느끼는 평화적이고 목가적인 느낌보다는 까닭모를 불안과 의문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의 의문은 "멀리 있는 탑에서 만종이 울릴때 부부가 경건하게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게 되었다"는 기존의 평이한 해석만으로는 이그림의 강인한 흡인력을 도저히 설명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거지요. 또한 그 까닭모를 불안함에 대하여 손수레에 얹혀진 감자자루가 사실은 아기의 시신을 담은 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933년 달리는 '만종'을 변형시켜 그림을 그렸고,


<밀레의 만종의 비극적 신화>라는 책을 쓰며 '만종'에 대한 기존의 이미지에 반하는 전혀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지요.


하지만 워낙 괴짜에다가 미치광이 소리를 듣기도 했던 달리의 이런 주장을 그 당시 사람들은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 후, 이러한 달리의 투시력이 환각이 아니라 실제로 정확한 관찰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루브르 미술관이 1832년 정신 이상자에 의해 두개의 칼자국이 난 이 그림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만종의 적외선 투사작업을 통해 바구니 안의  그 감자 바구니가 초벌 그림에서는 죽은 어린아이의 관이었다는 것을 밝혀낸 것입니다.


또한 밀레가 초상화를 그려주기로 했던 가난한 부부의 갓난아기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숨지자, 죽은 아기를 묻기 전에 마지막으로 부부가 기도하는 그 가슴 아픈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다가, 친구의 우려와 권유로 지금처럼 수정했다는 사실도 밝혀졌지요. 달리는 밀레의 그림에서 원래 담겨있던 비극성을 특유의 직관력으로 감지해 낸 것이지요. 


밀레는 '사실적 자연주의', 달리는 '초현실주의'라는 기교적이고 시대적인 확연한 차이가 있었음에도, 역시 천재들의 감성은 통했던 것일까요?  실지로 그는 '나는 천재다'라는 책을 쓰기도 했는데 공감이 갑니다.


또한 그는 '현실 생활에는 서툴렀지만 그럴수록 더욱 더 삶에 대한 투시력을 갖게 되었다'는 고백을 했는데  그런 그의 고백이 진심으로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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