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을 바꿔 놓은 예수회원
학자들과 유력자들은 당대의 가장 민감한 과학적 문제들을 그에게 위탁하였다. 케플러, 데카르트 그리고 라이프니츠와 같은 수학자들도 그를 영감의 원천으로 인정하였다. 그의 이름은 도서관의 기념비에 그리고 소르본느와 같은 대학들에 새겨져 있으며, 그의 초상화는 전세계의 박물관에 걸려 있다. 그는 바티칸에 있는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의 묘비에서도 나타나며, 달 표면에 있는 가장 큰 분화구들 중의 하나는 그를 기념하여 명명되었다.
그는 크리스토퍼 클라비우스라 불리는 16세기의 예수회 천문학자이었는데, 그는 당대에 명성을 떨친 것은 물론이지만 자연과학 분야에 있어서의 업적은 아직도 더욱 인정받아야 한다. 즉 그의 가르침과 저술 활동이며 수학적 혁신, 달력 개정, 갈릴레오 시대에 천문학에 끼친 기여 등에 대해 그의 공로가 제대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
클라비우스는 예수회가 설립되기 몇 해 전인 1538년에 태어났다. 그는 1555년에 예수회에 들어갔고, 로마 대학에서 45년 동안 가르쳤으며 1612년에 사망하였다.(그가 일곱 교회를 방문할 때 황소에 짓밟혀 죽었다는 로마 공문서의 주장은 입증할 수가 없다.)
초기 예수회원들은 인쇄된 책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기하학 분야만 해도 631명의 예수회 저자들이 있었으며, 그들 중 많은 사람이 한 권 이상을 저술했다. 클라비우스는 19권의 책을 저술했다. 그의 Euclidis Elementorum(1589년)은 단순히 유클리드의 번역이 아니라, 유클리드의 공리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그는 주어진 세 개의 크기에 비례하는 네 번째의 것이 존재한다고 보장하는 공리가 없음을 언급했다. 그는 또한 다섯 번째의 가정이 필요하다는 유클리드의 통찰을 평가했다. 이것에 대한 그의 작업은 예수회원인 지롤라모 사케리에 의해 이어졌는데, 그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창설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지기도 한다. 이 책은 클라비우스로 하여금 ‘16세기의 유클리드’라 불리도록 해주었다.
클라비우스의 영향은 책과 가르침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수많은 그의 서신들은 과학자들과 그 후원자들뿐만 아니라 군주. 귀족, 원로, 주교 및 교황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클라비우스는 1599년에 공포된 예수회 교학 규범(Ratio Studiorum)을 만드는 데 참여함으로써, 수학이 모든 예수회 학교의 정규 과목이 되었다. 클라비우스는 예수회원 수학 교사들의 양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많은 철학 교수들이 수학에 대한 무식 때문에 끊임없이 오류를 범하고 있다.”라고 한탄할 정도였다. “연학 수사들은 한 달에 한 번 모여 유클리드의 정리에 대한 독창적인 논증 강의를 들어야 한다. 예수회가 항상 유능한 수학 교사들을 확보할 수 있도록, 일정한 수의 지도자들을 선발하여 수학 연구를 위한 하나의 부설 기관을 설립하여야한다.”
클라비우스는 여러 가지 수학적 발전을 예견 했다. Astrolabium(1593년)에서 그는 정수와 소수점 이하의 수를 구별하기 위해 점을 사용했는데, 그것은 소수점이 널리 받아들여지기 20여 년 전의 일이었다. 같은 책에서 클라비우스는 정밀한 측정을 위해 자의 눈금을 나누는 한 방법을 발명했다. 그의 생각은 42년 후에 버니어에 의해 응용되었다. 몇몇 역사가들은 버니어 계산자가 더욱 정확히는 클라비우스 계산자라고 불려야 한다고 말한다.
Algebra(1608년)에서 클라비우스는 집단을 나타내기 위해 처음으로 괄호를 사용하였다. 또한 그는 미지의 양에 대한 기호를 사용한 첫 번째의 사람이었다. 다른 혁신들은 근호(√) 그리고 덧셈, 뺄셈의 부호와 같은 기호였다. 그는 홀수의 면을 가진 정다각형에 대한 정리를 발견하여 증명, 2세기 후에 칼 프리드리히 가우스로 하여금 자와 컴퍼스로 I7각형을 구성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Triangula Sphaerica(1611년)에서 클라비우스는 당시의 평면과 구면의 삼각법에 대한 지식을 총정리하였다. 대수학의 조상격인 그의 Prostlaphaeresis는 사인 함수의 합과 차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 방법을 통하여 그는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등식 (2sin x) (2 sin y) = cos(x-y) - cos (x+y)를 밝혀내어 사인 함수의 곱셈을 덧셈과 뺄셈으로 대치할 수 있도록 하였다.
만일 크리스토퍼 클라비우스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지금 크리스마스를 양력 12월 12일에 축하하고 있을 것이다. 1582년 10월 4일 목요일, 그동안 사용되어 오던 율리오력이 폐지되고 교황 칙서 Inter Gravissimas에 의하여 그레고리오력이 채택되면서 다음날이 10월 15일 금요일로 바뀌게 되었다.(수학자들이 공리를 정하듯 임의로 결정된 것이다.) 콜라비우스는 달력이 이처럼 바뀌는 시기를 10월로 정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 달에 가장 축일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왜 달력을 바꾸어야만 했는가? 8세기 동안 예수 부활 대축일이 잘못된 날에 지내어지고 있음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심지어 한 달이나 늦어지기도 하여 부활대축일이 점점 여름 축제가 되어갔다. 이러한 문제는 일부는 천문학적이고 일부는 수학적인 원인에 기인한다. 일년(지구가 태양을 완전히 한 바퀴 공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율리오력이 채택된BC 45년 때보다 지금이 짧기 때문이다. 그때, 공전 주기는 365.2422일로 알려져 있었으나 사실 지금은 365.2419일로 측정되고 있다.(1일은 태양이 고정된 한 자오선에서 그 곳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이 숫자가 정수가 아니므로 따라서 일년도 정수로 된 날들로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일년이 똑같은 숫자의 날수를 가진 달로 이루어진다면 일년 중에 각 달은 30.4368…일로 이루어지게 되며 한 예로, 각 달의 23일은 23.4368…일로 정해야 한다. 아무도 이러한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며 특히 달력 제조업자들이 더욱 싫어할 것이다!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클라비우스에게 정확한 춘분 날짜를 계산하여 이러한 편차들을 교정하도록 위임하였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대부분의 수학적 도구들이 발명되기 훨씬 이전의 일이었다. 긴 나눗셈들은 당시에 대학 과정으로 여겨졌었다. 그러나, 클라비우스는 그가 한 계산의 정확성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정확한 춘분 날짜를 발견해 냈으며 일년을 또한 365일로 할 경우 남는 일수들을 채우기 위하여 400년마다 97일이 더해져야 함을 발견하였다.(역주 : 이를 위해 연도를 나누어 4로 떨어지면 윤년, 또 100으로 나누어 떨어지면 평년, 다시, 400으로 나누어 떨어지면 윤년으로 정한다. 이렇게 하면 400년 동안 윤년이 97번이 있다.)
놀라운 일은 그가 일년의 길이를 그렇게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오늘날까지도 그가 이 일을 어떻게 해낼 수 있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는 이것들을 설명하고 정당화하기 위하여 800여 면이나 써야 했다.
그리고 그의 계산법에 의하면 4317년에 하루를 더 넣어 주면 된다.
이러한 계산법은 당장 세계적으로 통용되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오늘날 미국에서 미터법이 받아들여지는 것과 비슷한 운명을 겪게 되었다. 대중들은 혼란을 일으키게 되었고, 이러한 달력의 변화에 대한 책임으로 유럽의 예수회원들이 거주하는 집의 유리창은 깨지기가 일쑤였다. 동방 정교회는 이것을 로마의 침입으로 보았으며 개신교 국가들은 교황으로부터 어떠한 교령도 받기를 꺼려하였다. 영국에서는 1751년까지 이 클라비우스가 제안한 달력을 채택하지 않았으며,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고서야 비로소 받아들였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예수회 로마 대학을 자주 방문한 유명한 사람이었다. 1587년, 23세 때 클라비우스를 만난 그는 이때부터 예수회원들과 우정을 나누기 시작하였으며, 이 우정은 그의 여생 동안 계속되었다.
클라비우스는 갈릴레오가 목성의 네 위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자극하여 주었다. 그는 자신의 망원경 렌즈로 갈릴레오가 그 위성들을 포착하였다고 한다. 지식인 층에 지동설이 받아들여지게 된 데에는 클라비우스의 도움이 무척 컸다는 것이 편지들을 통해서 증명되고 있다.
갈릴레오가 곤궁에 처해 있을 때 그가 의지할 수 있었던 곳은 바로 클라비우스와 갈은 예수회원들이었다. 도미니꼬회 학자인 윌리엄 윌리스는 그의 저서 Galileo’s Early Notebooks(1977년)에서 주장하기를 용어 사용법, 단어 순서, 그리고 인용문 등을 살펴본다면 갈릴레오의 가르침 중의 많은 부분이 로마 대학의 아홉 명의 예수 회원들의 가르침에서 나왔다고 한다. 갈릴레오의 원고를 15년 간 연구한 끝에 그는 갈릴레오의 노트들이 전부 베낀 것임을 보여 주는 많은 증거들을 발견하였다. 실제로 그 자료들 전부가 클라비우스와 다른 여덟 명의 예수회원들이 사용했던 교과서와 강의 노트들에서 인용한 것이었다.
클라비우스가 오늘날 우리의 문화에는 물론 당대에 미친 영향은 기념비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예수회 수학자들이 서로 협동하고 서로 도와주어야 한다는 그의 청원은, 오늘날 클라비우스 그룹이라고 알려져 있는 24명의 예수회원과 9개국 20개 대학의 수학자들에 의해 실현되고 있다. 그들은 매년 수학 학술 연구회에 참여하고 있다.
(Catholic Digest 1989년 2월호에서 홍성준, 박병관 옮김)
[경향잡지, 1989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