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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불교 頓漸論의 비판적 小考

종교학(宗敎學)

by 巡禮者 2010. 8. 18.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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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한국불교 頓漸論의 비판적 小考


- 退翁性徹의 頓悟頓修 對 普照知訥의 頓悟漸修 -

 

심재룡(서울대 교수)

 

1. 들어가는 말

천여 년에 이르는 한국 선불교 전통은 바로 그 한국 조계종 법맥의 七代 종정인 성철 스님(1912-1993)에 의해 심각하게 도전받고 있다. 일찍이 유교를 중심으로 한 조선왕조 오백 년 동안 불교가 제도적으로 배척당했기 때문에 한국불교는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이 선승들의 수행을 위해 만든 정신적인 지침에 의해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지눌에 따르면 누구나 제 근기에 따라 모든 불자들은 좌선, 信, 혹은 화두를 통해 성불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 조계종의 칠대 종정인 성철 스님은 그의 저술과 법문을 통해 오직 화두 공부만이 성불에 이르는 길이라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지눌의 이른바 종합주의는 오해에 불과한 것이고 따라서 그는 한국 조계정의 종조가 될 수 없다고까지 했다.


대부분의 불교학자들은 한국불교의 특징을 원효, 지눌, 서산 등과 같은 탁월한 학승들이 세운 '회통성'으로 삼는데 거의 이의를 달지 않았다. 따라서 성철 스님의 반론이 현대 한국의 불교학자는 물론 일반 신도들에게 있어서도 심각한 혼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울 것도 없는 일이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본 논고에서는 성철 스님에 의해 제기된 몇 가지 문제점들을 역사적, 철학적, 그리고 수증론적인 면으로 구분지어 접근하고자 한다. 필자는 먼저 돈오돈수가 중국은 물론이고 한국의 선불교 전통에서도 정통이라는 성철 스님의 역사적 주장이 담고 있는 전제를 밝히고자 한다. 그리고 나아가 지눌의 돈오점수를 반박하는 그의 주장을 철학적이고 수증론적인 관점에서 포괄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2. 배경과 기원: 종조 논쟁


한국불교사에서 돈 점논쟁은 전통적으로 대립 관계에 있는 선종과 교종 사이의 주된 쟁점이었다. 원효(617-686) 이래로 여러 종파는 하나의 전통 속에 표면적으로 통섭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선종을 따르는 후대인들은 교종과는 달리 '別傳'이라는 그들의 고유한 이상을 늘 주장해 왔다. 하지만 결국 교종과 선종 사이에서 한국불교의 회통성은 발전해 왔다고 할 수 있겠다.


11세기 왕족 출신의 승려인 의천(1055-1101)은 천태종을 중심으로 선교를 통합하려했지만, 선에 대한 편파적인 대우 때문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후 지눌(1158-1210)은 이통현의 화엄 이론에 대한 이해와 신회의 계보를 잇고 있었던 종밀의 禪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마침내 선교를 통합했다. 지눌의 회통성은 그의 돈오점수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는 그에게 가르침을 전해 줄 스승을 찾아 중국을 방문한 적도 없이 거의 혼자만의 힘으로 한국 선불교의 전통을 이룩했던 까닭에, 지금까지도 여전히 한국의 불교도들은 그의 업적을 탁월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후대에 태고 보우(1301-1382)는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 선불교 임제종 계보를 잇고 있던 石屋 淸珙(1272-1352)으로부터 '認可'를 받아 돌아왔는데, 이후 대부분의 한국 선의 조사들은 전통적으로 태고 계보임을 주장해 왔고, 특히 성철 스님은 현재 한국에서 태고 계보를 가장 강하게 옹호하고 있다. 그 이유는 선종의 주장대로 깨달음이란 체험의 전수는 석가모니 본래의 깨달음으로부터 보리달마를 거쳐 육조 혜능에 이르렀고, 태고는 바로 그 육조의 법맥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성철 스님은 그의 나리 25세 되던 1936년 출가한 이래로 줄곧 선방 생활을 비롯해 온갖 철저한 수행의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1976년 해인사의 방장직을 수행하면서, 바로 같은 해에 {한국불교의 법맥}에서 태고로부터 비롯되는 계보가 한국불교의 정통 법맥이고, 지눌은 방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981년 {선문정로}에서 지눌의 돈오점수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런데 1980년 당시 성철은 현재도 여전히 지눌을 종조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는 조계 법맥의 수장으로 있었다. 지눌을 조계 법맥의 이론적인 선구자로 인정하는 데에 이론의 여지가 없었던 한국의 불교도들에게 있어서, 그의 지눌에 대한 혹독한 평가절하는 엄청난 변화일 수밖에 없다.


한국불교의 이론과 수행의 양 측면에서 지눌이 많은 영향을 끼쳤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의 저술은 과거에 순수 한국인의 저술로서는 가장 널리 퍼져 있었고, 그 가운데 두 권은 현재 강원의 기본 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성철이 1976년 해인사 방장으로 취임하면서 그의 반대 때문에 그 두 권의 지눌 저술은 제외되고 말았다. 하지만 한국의 승려 교육과정은 첫 수행과정인 행자 생활로부터 시작해서 누구나 강원에서 공부한다는 점을 볼 때, 여전히 지눌의 교육 사상에 힘입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강원의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난 다음에만 선방에 들어갈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볼 때, 적어도 최근 십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선불교의 수행은 지눌의 생각을 철저히 따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먼저 깨달음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한다. 그리고 난 다음에야 배운 것을 행위로 옮기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철은 책을 통한 배움을 철저히 배제하고 전심전력으로 좌선에만 집중하도록 권고했다.


이상과 같은 종조 논쟁에서 중요한 점은 그것이 단순히 지눌에 대한 성철의 사사로운 비판의 차원을 넘어선다는 사실에 있다. 이 문제는 최근의 역사를 비추어 볼 때, 한국 승려들 내부의 계파간 다툼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일찍이 1941년에 태고사―현재 서울의 조계사로서 조계종 총무원이 있는 곳―종규에는 태고 보우를 한국불교 법맥의 종조로 기록했다. 물론 전통적으로 한국의 주요한 삼보 사찰[불교의 佛 法 僧 삼보를 상징하는 통도사 송광사 해인사]에서도 태고 보우를 종조로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1945년, 한국이 거의 반 세기에 가까운 일제 식민지로부터 벗어나면서 대처승과 비구승 사이에 불화가 일어났는데, 한국 조계 법맥의 전통인 비구 생활이 식민지 기간동안 불순한 일본 승려들의 결혼 관습 때문에 멋대로 더렵혀졌기 때문이었다. 1945년 일본에 대해 반감을 지니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대처승을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제 종조 논쟁은 대처승들에게 있어서 생사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위 '淨化'라 이름붙여진 일련의 움직임으로도 유혈이 낭자하던 종단의 재산권 다툼을 종식시킬 수는 없었고, 이승만의 하야를 불러 온 1961년 군사 쿠테타가 있은 후에야 간신히 한국불교의 비구와 대처를 연합한 새로운 조계종이 성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해 2월 태고 보우를 조계종의 종조로 받드는데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한 달 후인 그 해 3월에, 비구승들은 지눌을 종조로 조계종의 종규를 바꾸었다. 그뒤 조계종을 벗어난 대처승들은 새로이 태고종을 만들어 태고를 종조로 두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조계 법맥의 정통성을 둘어싼 심각한 불화는 사실 한반도에 일제의 식민 통치가 남겨 둔 또 다른 유산이다.결국 우리는 독립 국가로서 대한민국이 탄생되면서 불교도들 간의 다툼 속에서 다시 새로워진 국가 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덧붙여 비구승들에 의해서만 수립된 새로운 조계종은 대처승의 법맥과는 구별되는 것인 동시에 지눌을 한국불교의 종조로 내세우는 자존심의 발로이었다. 지눌은 중국으로부터 인가를 받아 온 철저한 중국 추종자인 태고와는 달리 철저히 한국적인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태고는 그가 한국 땅에서 완벽히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도 중국 조사들로부터 다시 인준받는 과정을 거쳤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1945년 해방 이후에 왜 한국의 불교학자들이 지눌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여왔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준다. 또 한국 전쟁 이후에 한국의 불교학자들은 한국불교의 특징 가운데 특히 원효와 지눌에 의해 선양된 회통성을 강조해 왔다. 비록 한국 선불교도들이 교종 등 여타의 다른 종파들과 자신을 구분함으써 배타적이고 독자적인 노선을 강조했긴 하지만, 한국불교가 제시하는 조화 정신은 국가적 숙원인 통일에 기여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역사적 배경을 기초로 해서 지눌에 대한 성철의 비판을 현실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사회는 온전한 국가의 모습을 완벽히 갖추기에는 모든 분야에 걸쳐 제도적인 질서가 아직 견고하지 못하다. 전문적인 종교인들 내부에서 벌어지는 종권 장악을 위한 다툼은 바로 돈 점 논쟁에서 나타난다. 지눌에 대한 성철의 비판을 통해 우리는 첨예하게 대립되는 두 가지 경향이 한국불교를 관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효와 지눌로 대표되는 포섭적인 경향의 회통성과 성철로 대표되는 배타적 선의 종파적인 경향이 그것이다.


3. 돈점 논쟁


만일 돈 점 논쟁이 바로 정통 이단 논쟁과 연관된 것이라고 한다면, 누구라도 논쟁과 괸련된 각 분파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이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한국불교 종단의 불안정성이 지극히 민감한 정통과 이단 문제를 조절할 수 있는 중앙의 권위가 없다는 데서 비롯된 것임을 인정한다면, 객관성과 공평성을 아무리 지나치게 강조해도 모자랄 지경이다. 선의 종파적인 배타성에 대해 민감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논쟁이 이른바 門衆이라 일컬어지는 한국 선종 계파간의 헤게모니에 대한 주장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 논고의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頓으로 알려진 성철의 역사적, 철학적, 수증론적인 주장에 대해 객관적이고 이들 간의 상호 연관적인 구조를 설명할 것이다. 우선 현재의 한국불교에서 보이는 다층적인 분화의 양상은 잠시 접어두고, 漸으로 알려진 지눌의 주장을 비판하는 성철의 입장이 전개되는 주된 저술을 직접 검토해 보기로 한다.


3-1. 성철의 '역사적' 주장에 대해서


전통적으로 선불교는 깨달음을 얻은 스승과 제자간의 共生的인 관계를 중요시해 왔다. 그러한 관계는 스승의 의발이 그의 제자에게로 전달되는 과정을 통해 상징적으로 그려진다. 중국 선불교에 조사들의 전기를 연구한 이들은 석가모니와 그의 제자인 마하가섭 이후로 이어진 인도의 28대 법계를 이른바 '이심전심의 역사'인 '전법기'로 조작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리고 보리달마와 혜가를 거쳐 6조 혜능에 이르기까지의 계보는 11세기에 와서야 완성된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이천 오백년 동안의 복잡한 불교의 역사 속에서 그들, 즉 선종의 독자성을 근거짓기 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 선종의 선사들도 전법관계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의 불교도들은 겨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붓다 석가모니의 참된 깨달음을 재확인해 준 眞歸 조사들의 전기가 날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성철은 태고로부터 자신에게로 이어지는 한국 선불교사에 완벽한 이심전심의 역사를 자신만만하게 주장했다. 그는 법맥의 정통성과 頓悟頓修의 기치하에 순수한 한국적 선불교 전통을 세운 지눌을 배척했다.


여기서 성철의 주장이 합당한지 검토해 보기로 하자. 성철은 한국불교의 법맥을 분명히 원나라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고려에서, 이미 깨달음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다시 그것을 인준받기 위해 중국을 다녀온 태고 보우로부터 시작하고 있다.지금의 대한불교 조계종은 석가모니 세존을 始祖로 하고, 曹溪 慧能을 元祖로 한 臨濟 아래 太古의 法孫임이 확실하다.


성철의 이와 같은 주장은 분명히 전통적인 선의 정통성 가운데 특히 '史的'인 법맥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역설적이게도 보리달마로부터 오가칠종에 이르는 여러 법맥을 무시하고 있다. 우리는 일목요연하게 고려의 태고로부터 조선을 관통하는 한국불교의 정확한 법맥을 규명하고자 출판된 그의 저술에서, 종교적 믿음을 역사적 사실에 귀인시키려는 그의 독특한 사고방식에 접한다.


뿐만 아니라 성철은 한국 선사들의 원전에 대한 그 자신의 정통적인 독해를 바탕으로 '다시 읽기'와 '다시 해석하기'의 과정을 통해 당당히 하나의 法系圖를 제출했다. 그는 고려조의 지눌과 조선조의 서산에 특별한 관심을 두었다.성철은 한국 선의 계보에서 지눌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의 저술을 꼼꼼하게 읽고 번역했다. 1980년 성철이 종정으로 있을 때, 갑자기 강원의 정규 교육과정에서 제외시켰던 {節要}에서, 그가 문제시했던 사항을 살펴보자.


목우자[지눌의 필명]가 말했다.하택은 知解宗師인지라 비록 曹溪[육조 혜능]의 適子가 되지는 못하였으나, 解悟가 高明하고 決擇이 了然하니 운운이라고 적고 있다. 이를 버스웰의 번역과 비교해보자.


목우자는 말했다. 하택 신회는 그의 지성과 개념적 이해 때문에 우리 종의 조사였다. 비록 그가 정식으로 법의 전수자는 아니었지만 운운. 여기서 성철은 신회를 이른바 교종 계열의 종사로서 지혜종사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갑자기 교종의 종사이기 때문에 선은 知解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결론으로 훌쩍 뛰어넘어 버린다. 따라서 육조 혜능의 합법적이지 않은 계승자인 신회와 화엄학자인 종밀의 계승자인 한 지눌은 선의 종사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지눌의 돈오점수 역시 믿을 만한 것이 아니게 되었고, 지눌의 선은 비정통적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선문정로}에서 다음과 같은 성철의 평가를 엿볼 수 있다. …하택 규봉의 돈오점수 사상을 基幹으로 하여 결사문과 수심결을 저술하여 달마선이 즉 돈오점수라고 고창하던 보조가, 돈오점수를 상론한 그의 절요 劈頭에서는 하택을 知解宗師라고 단언하였다. 그리고 돈오점수를 서술함은 因敎悟心者를 위함이요 선종이 아니라고 전제하였다. …따라서 돈오점수사상을 신봉하는 자는 知解宗師일 뿐이다.


하택 신회가 혜능의 적자가 아니라는 견해는 보조의 돈오점수가 선종과는 구분되는 교적이고 이단적이라는 성철의 주장에 내재된 중요한 전제이다. 그리고 비록 지눌이 일찍이 이단적인 이론 체계인 돈오점수르 주장했지만 말년에 바꾸었다는 설명은 지눌에 대한 성철의 비판에서 작용하는 또 다른 전거이다. 그는 여전히 돈오돈수를 돈오점수와는 다른 별개의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 여기서 성철은 은연중에 지눌의 돈오점수가 '경절문' 곧 화두 공부와 대립되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으며, 돈오돈수를 나타내는 지눌의 말년 저작이 禪의 정통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화두 공부가 과연 돈오돈수의 수행 방법인지 자문해 봐야만 한다. 지눌의 말년 태도 변화설을 주장하는 성철의 새로운 이론은 화두 공부가 돈오돈수의 유일한 수행방법임을 증명할 수 있는 전거가 있을 때만이 타당할 수 있다. 설사 禪에서 화두 공부가 頓門을 대표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지눌이 세상을 떠나기 바로 직전에 세 가지 단계의 '門'을 기초로 중생들을 제도하던 그의 이전 입장을 취소하고, 오직 화두 공부를 통해서만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고는 믿기 어렵다.

 

지눌의 말년 태도 변화설이라는 그의 '역사적인 구상'은 지나친 면이 있다. 그는 지눌이 선불교의 참된 면을 알지 못했고, 단지 마지막 교종의 승려로 못을 박는다. 성철에 의하면 지눌은 그의 말년에 교학적인 부분에 집착해 있었기 때문에 화두 공부만이 불성에 이를 수 있는 정통적인 방법임을 분명히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의 초기 오류인 돈오점수를 다시 선양하기까지 한 것으로 평가한다.


결사문과 수심결에서는 하택 규봉의 돈오점수를 達摩正傳이라고 역설하다가, 절요에 와서는 하택 규봉은 知解宗徒로써 曹溪嫡統이 아님과 동시에 그의 사상인 돈오점수는 依言生解하는 敎家요, 離言亡解하는 禪門이 아님을 분명히 말하였으니 이는 사상의 전환이다.


위와 같은 성철의 역사적인 재구성은 조선왕조의 서산대사에 대해 그가 제시한 또 다른 평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서산의 사상은 이미 보조에 앞서 모든 근기의 사람들로 하여금 붓다의 명호를 염불하게 하는 정토종의 수행방법 등을 포함해 회통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불교학자들에게 평가받고 있다. 잘못된 선 전통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지눌과 서산 사이의 관계가 성철에게 특히 중요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서산은 그의 주저인 {선가귀감}에서 분명하게, 지눌의 돈오점수는 물론 정토의 염불에 대해서도 옹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철은 다시의 그의 '역사적 구상'을 다시 도입한다. 그리고 {선가귀감}은 서산이 아직 깨닫기 이전에 혼란스러운 생각을 드러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청허[서산]의 초기 저작인 선가귀감에서는 敎의 뜻을 먼저 닦아 익힌 다음에 놓아버리라고 하였으나 점차로 慧眼이 높아짐에 따라 敎의 뜻이 주는 폐해를 통감한 나머지 선교결에서는 敎의 뜻을 금지한 것이니, 이 선교결의 유훈이 청허의 정통 사상이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그러면 왜 성철은 지눌을 비정통이라고 평가절하하고 서산을 정통으로 정초지우면서 그들의 전기 가운데 '사상의 전환'이라는 낯선 개념을 도입했던 것일까? 성철의 동기는 그가 속한 선종이 정통인 반면에, 여러 근기의 사람들을 제도하기 위해 대승불교의 '방편'이라는 개념을 철저히 배제하기 위한 것이었던 듯싶다. 따라서 성철은 그의 사상과 지눌과 서산 양자 모두에서 나타나는 사상적 모순을 '사상의 전환'으로 규정하고 이를 마치 역사적인 사실로 주장함으로써 그 모순을 해결하려는 것 같다.


성철의 지눌에 대한 '역사적' 비판에 덧붙여, 그의 철학에 나타나는 내용을 비판하여, 지눌의 사고방식은 정통선과는 무관하다고 비판하기에 이른다. 그러면 이제 성철이 주로 견성이라 부르는 깨달음에 나타나는 그의 철학적 개념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3-2. 성철의 철학적 주장


지눌에 따르면 중생은 처음 믿음을 일으킬 때 견성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성철은 파악하고 있다. 十信初인 解悟로써 見性이라 함은 佛祖의 言敎에 전연 위배된 독창적 新說이다. 여하한 논설도 佛祖의 言敎에 배치되면 불교인으로서는 단연히 이를 배제하지 않을 수 없다.


이통현은 화엄학에서 제시하는 성불에 이르는 열단계[十門] 가운데 첫 단계가 아닌 믿음의 첫 단계에서 중생은 스스로의 본성을 볼 수 있다고 비정통적인 의견을 제기하고 있는데, 지눌 역시 이러한 의견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성철은 '信이 곧 證'이라는 이론의 참 뜻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 채 이단으로 평가절하하고 있다. 지눌과 성철을 꼼꼼히 살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들이 사용하는 信, 知, 證 등의 언표에 담긴 내포적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일단 성철이 내세운 견성에 대한 이해를 시도해 보기로 한다.


우리는 우선 대승불교의 이론적 가설을 염두해 둬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비로 돈 점 논쟁의 기본적인 구도를 설정하는 때문이다. 중생에게는 내재적으로 불성이 있다는 것과 열반과 윤회는 궁극엔 하나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견성은 모든 형태의 오욕이 없어진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 등이 대승불교의 기본적인 구도이다. 그리고 성철의 견성론은 이러한 구도를 전적으로 따르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그의 이론체계를 분석해 보면, 그가 깨달음과 무명, 그리고 수행 사이의 관계성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반면에 지눌의 경우는 깨달음은 무명과 수행 양자를 배제한 상태에 해당한다는 두 가지 차원의 구도를 옹호하고 있다. 頓을 옹호하기 위한 성철의 철학적 주장은 완전한 깨달음을 상징하는 見性이라는 개념에 의지하고 있다. 견성은 모든 오욕과 무명으로부터 벗어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의 수행이 필요없음을 의미한다.


그에게는 무명과 오욕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로 정의되는 단 하나의 깨달음, 즉 견성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돈오와 점수간의 논리적인 관계는 등한시한 채, 지눌의 깨달음, 혹은 견성이 있은 후에도 닦음[修]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비판할 수밖에 없었다. 깨달음과 수행을 상반되는 것으로 상정했던 성철에게 있어서 病[무명이나 오욕]과 藥[수행]을 배제한 깨달음은 인정할 수 없는 의견이었다.―그런데 여기서 성철은 완전한 藥으로서의 깨달음은 게으른 몇몇 참선 수행자를 다스리기 위함이라는 자신의 말을 잊었던 것은 아닐까?


이러한 태도는 다시 견성이 결코 부정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깨달음에 대한 그의 두 번째 정의로 나아가고 있다.
깨달음과 무명은 상호 배제적이라는 개념 정리가 낳은 또 다른 논리적 추론의 결과는 견성이 부분적으로 달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성철에게 있어서 깨달음은 완벽한 것이어야 했고 따라서 여기에 깊고 얕음은 있을 수 없다.―하지만 非夢似夢이라는 말도 엄연히 있지 않은가? 마침내 그는 모든 선가의 조사들은 석가모니부처와 동급의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결론에까지 이른다.


佛言과 祖言이 兩道가 없으니 이는 다 같이 定眼을 完具한 까닭이다. 深淺[깊고 얕음]에 대한 성철의 비판은 화엄과 천태와 같은 교종에서 제시하는 의식의 성숙단게에 대한 이론이 전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또 돈오점수로 교종과 선종을 통합했던 지눌을 비판하려는 의도를 내포한다. 성철에게 있어서 그러한 시도는 비논리적인 것으로 보였다.―하지만 지눌이 이통현의 화엄 이론을 인정했다는 사실은 곧 수행의 점진적인 과정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理에 정확히 맞닿아 있다는 의미라는 것을 성철은 몰랐던 듯하다.


성철이 비록 漸을 큰 병으로 치부했지만, 염두에 둬야할 것은 그러한 비판이 다만 견성의 측면에 한정지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성철 역시 한동안 '구름이 겉히면 태양이 빛난다'는 상징적인 말을 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그도 은연 중에 돈오점수를 인정하고 있었던 듯 싶다. 성철과 지눌 사이에 나타나는 또 다른 논쟁점은 선가에서 사용하는 독특한 용어인 깨달은 이후에도 원래의 깨끗한 자신을 지키라는 뜻을 가진 '保任'이다.

이를 깨달은 이후에도 수행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푸는 지눌과는 달리, 성철은 깨달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푼다. 지눌은 아이가 점점 자라서 어른이 되는 것과 같이 부처도 그렇게 붓다의 헤아리기 어려운 능력과 힘을 갖추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지눌 당시에 깨달은 사람이 왜 부처와 같은 영험을 나타내지 않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성철은 이러한 해결을 비판하고 견성은 모든 영험을 즉각적으로 나타낼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公案을 타파하여 自性을 徹見하면 三身四智를 圓滿證得하고 全機大用이 일시에 現前한다.


견성은 사실상의 드러남이다.


法性 즉 佛性은 圓證見性한 證知 이외는 了達할 수 없으니 이는 불교의 통설이다.


성철은 전통적으로 오욕에 물들어 있음을 상징하는 '얼어붙은 연못'이라는 비유를 사용하여 그의 입장을 더욱 분명히 한다. 지눌에 의하면 얼음[染]이 곧 물[본래의 순수함]임을 아는 것이 바로 頓悟이긴 하지만 이어서 얼음을 물[타고난 佛性을 회복]이게 하기 위한 漸修[얼음을 녹임]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성철의 경우에는 안다는 의미가 완전히 달라져, 앎[부처]이 곧 존재[부처]가 된다. 성철은 지눌이 엉성하게 사용하는 돈오라는 용어가 인식상의 경험은 물론 행동의 완벽한 변화까지 뜻하는 궁극적 깨달음보다 저급한 것이라 비판한다.


하지만 우리는 성철도 역시 본래 고려조의 선사인 나옹 혜근(1320- 1376)에 의해 짜여진 三關이라는 점진적 기준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붓다의 좌선 단계를 보게 되면, 첫 단계는 이른바 淨行을 유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평상시에 무엇을 하든 상관없이 좌선 상태를 유지해야만 한다.―이 상태를 끊임없이 지속해야 한다.―물론 이 단계에서 잠자면서 좌선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지만 다른 일, 즉 꿈을 꾼다든가하는 일은 가능하다. 꿈 속에서 좌선을 계속하는 것을 '꿈 속의 유지'라고 부른다. 하지만 꿈 속에서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깊이 잠자는 가운데 좌선 상태를 유지함을 '열망하는 눈의 유지'라고 할 수 있다. 단지 깊이 잠든 가운데 명상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인간은 자신의 불성을 이루기 위한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성철의 접근방법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는 있지만, 성철과 지눌의 돈오돈수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지눌의 경우에는 '옷감을 단번에 자른다'는 표현에서 보이듯이 모든 오욕을 일시에 제거한다는 뜻으로 돈오점수의 뜻이 규정된다. 하지만 이것이 성철의 돈수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성철은 불성을 이루기 전에 준비 단계로 8식에 있는 가늠하기 어려운 오염을 제거하기 위해, 육식에 있는 중요한 오염들을 제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른바 頓에 내재하는 두 가지의 모순을 보게 된다. 우선은 그가 여전히 {대승기신론}과 같은 敎宗의 典籍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고, 두 번째는 성철 자신도 어느 정도 점진적인 나아감이라는 생각에 수긍하고 있다는 것이다.


3-3. 성철의 수증론적 태도


비록 위의 철학적 접근방법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돈점 논쟁의 중요성을 충분히 이해했다면, 이제 다양한 문화에 대해 선사들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수행방법상의 문제는 {육조단경}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거기서 돈 점은 다양한 근기의 사람들이 밟아 온 어떤 길에 대해 강조하기도 하고 대단치 않게 넘겨 버리기도 하는 성향이나 태도를 의미했다. 특히 信의 역할, 노력, 知, 방편 등은 실제로 종교적인 문화의 영역 속에서 검증되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대중적 강연을 제외한 성철의 저술에서 '信'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지눌이 자신의 본성을 처음으로 보게 되는 경험이 있고 이는 信을 통해 끊임없이 유지된다고 주장했던데 비해, 그는 온전한 깨달음을 흡집내는 信을 비롯한 어떠한 형태의 경험도 평가절하시킨다. 그에게 있어서 깨달음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었고 거기에 이르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선 수행자들은 깨달음의 경지를 흡집낼 수 있는 낮은 차원의 어떠한 경험에도 만족해서는 아니된다고 경고한다.


지눌은 지적인 이해가 깨달음에 대한 어느 정도의 윤곽을 잡게 해 준다고 생각했던데 반해서, 중국 선가의 홍주종을 잇고 있는 성철은 수행의 한 방법으로서 제시되는 지적인 접근을 경계했다. 그는 선 수행자들에게 다섯 가지의 규칙을 말했는데, 그 가운데 두 가지는 책 읽지 말고 말하지 말라는 지적인 접근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다음과 같은 말에 집약되어 나타난다.


만일 자신의 참된 자아를 일깨우려 한다면 佛法의 가르침을 포함한 모든 면에서 자아를 제거해야만 한다. 불교 그 자체도 거울에 쌓인 먼지처럼 장애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모든 힘을 오로지 화두에만 쏟아라.


이제 끝으로 대승불교를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방편'에 대한 성철의 입장을 살펴보자. 그에게 있어서 깨달음을 이루는데 필요한 유일한 방편은 화두뿐이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화두 공부를 수승한 능력을 지닌 선 수행자는 물론이고 범죄인과 같은 적지 않은 업보를 지닌 사람에게도 적용하기를 원했다. 누구든 적당한 노력만 전제가 된다면 이른바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탁월한 방법인 화두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철은 염불[이를 지눌은 信의 또 다른 종류라 했다]이나 경전에 대한 지적인 접근방법이 아닌 오직 '活句'인 화두만이 깨달음으로 인도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지눌도 화두가 여러 방편들 가운데 하나임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성철은 하근기의 사람들에게도 오직 활구인 화두만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아무리 낮고 열등한 근기라 하여도 活句만으로 지도하여야 하거늘, (지눌은) 자기가 지적한 사구인 지해의 벙을 거듭 권장하였으니, 결국 간화결의론도 용두사미가 되어 버렸다.


성철의 위와 같은 '화두 절대주의'는 지눌의 열린 태도와는 극적일만치 상반되는 입장이다. 지눌의 지적인 접근 방식에 대한 성철의 비판은 사실 전통적인 홍주종 혹은 임제종 논법의 재탕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쟁은 정통성과 관련된 철학적이거나 이론적인 대결이 아니고, 성향이나 태도와 관련된 입장에서 수증론적으로 중요시하는 부분이 서로 다른 것일 뿐이다.


4. 결론: 試案


이미 많은 불교학자들이 석가모니로부터 조사들로 이어지는 이심전심의 역사로 불리는 기묘한 선종사의 문제점을 제기해 왔듯이, 頓을 주장하는 성철의 역사학적 주장에는 분명한 약점이 있다. 태고 보우가 중국 선불교의 정맥인 임제종으로부터 법맥을 이어왔음을 십분 인정한다 하더라도, 한국불교사 내에서 그를 잇는 후계자들간의 법맥까지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견성이라는 그의 禪에 대한 철학적 해명은 분명하고 일관적이다. 뿐만 아니라 믿을만한 禪의 형태―비록 정통에 대한 그의 주장은 마이너스 요인이 되었지만―를 규정하기 위한 그의 시도는 장차 한국 선종의 정체성을 설정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작업이었다. 사람들은 수행과정에서 다양한 층차의 의식 차원을 경험하게 되는데, 만일 성철이 제시한 궁극적 깨달음과 같은 분명한 기준이 없다면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참된 깨달음을 얻었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성철 역시 그의 저술에서 이점을 여러 번 강조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지눌이 그 당시 선 수행의 척도였던데 비해서 성철은 현재 한국 선 수행의 척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수증론적 처방이라는 입장에서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성철의 생각은 배타적인 화두 제일주의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모든 에너지를 정진에 쏟을 수 없는 일반인들에게 적용되던 온갖 방편들을 무시하고, 오직 배타적인 수행자 집단의 화두 공부만을 제일로 쳤다.


돈 점 논쟁은 물론 무척 복잡한 사항들이 얽힌 문제이지만, 불교인들에게 중요한 개념인 깨달음과 무명, 그리고 수행 등으로 집약될 수 있다. 비록 배타적인 종파주의의 정통성에서 비롯되기는 했지만, 이러한 개념들에 대한 성철의 새롭고 과감한 해석은 현대의 한국인들에게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이는 현대의 한국 선불교가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청신호이기도 하다.


성철이 제기한 정통성 문제는 다양한 문화들이 공존하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지 못한 듯이 보인다. 또 배타적인 화두 중심적 접근은 현대와 같은 汎깨달음의 시기에 가하는 엘리티즘의 일격일 뿐이다. 하지만 禪에 대한 성철의 배타적인 접근방식에 대한 마지막 평가는 궁극적으로 미래 한국 불자들의 수행력에 의해서 판단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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