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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파드레 비오 동시양처 기적사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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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巡禮者 2010. 4. 15.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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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파드레 비오 동시양처 기적사례들

성 빠드레 비오의 동시양처 同時兩處 (동시이처)의 기적사례들을 소개합니다 ㅡ

'오상을 받은 우리 시대의 형제 ' 라는 책에서 퍼왔습니다

 

비오 신부는 착하고 훌륭한 사제로서 언제 어디서고 기꺼이 남을 와주려고 했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그에게 동시에 두 장소에 현존하는 은사를 주셨다,

이러한 은사를 받은 성인은 많았다.

성 알퐁소, 성 안토니오, 성 돈보스코, 성 비오 10세 교황 등이 그러했다.

그런데 다른 성인들에게는 이런 일이 단 한번 일어났을 뿐이지만, 비오 신부의 경우에는 거의 매일 일어났다.

프랑스의 한 학자가 비오 신부에게 동시에 두 장소에 현존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의 질문은 정말 현명하지 못하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지 사람의 뜻이 아니란 것을 모르시오?"

이 은사를 받은 성인들이 동시에 다른 두 곳에 현존하고 있을 때,

그들 자신은 그 사실을 알고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비오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 왜 모르겠소? 주님이 허락하시는 곳이면 그들은 어디에라도 있을 수 있소."

 

남미의 한 사제가 산조반니의 수도원에 전근해 왔다.

그는 비오 신부에게 고향에 있는 자기 아버지가 죽을 때 도와달라고 청했다.

어느 날 비오 신부가 그에게 말했다.

"당신 부친께서 방금 하늘나라에 가셨소."

그 사제는 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편찮으시더라도 노쇠하지도 않으십니다."

얼마 뒤에 그는 두 누이 중 하나가 보는 전보를 받았다.

'부친 별세, 편지 별도'.

뒤이어 온 편지에는 이런 사연이 적혀 있었다.

그날 아침에 부친은 어디가 좋지 않은지 자리에 오래 누워 있었다고 한다.

누이 하나가 궁금해서 들여다보니 어떤 사제가 부친에게 병자성사를 주고 있더라는 것이다.

부친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 그들 자매가 잠시 뒤에 함께 찾아갔을 때는 부친은

운명 직전이었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 사제는 편지를 읽고 놀라며, 자기 부친에게 병자성사를 준 이는 비오 신부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남미의 두 누이에게 비오 신부의 사진을 보냈고, 그들은 그가 부친에게 병자성사를 준 신부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비오 신부에게 물었더니 그도 이 사실을 시인했다.

 

중병을 앓고 있던 한 주교가 고해소에 들어왔다.

고해성사를 마친 그가 비오 신부에게 청했다.

"비오 신부님, 내 건강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죽을때  와주실 것을

 약속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잠시 뒤 기쁜 대답이 나왔다.

"주교님이 선종하실 때 내가 지켜보도록 주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넉 달 뒤에 이 주교는 선종했고, 비오 신부는 약속대로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벨기에의 한 사제도 1956년 9월에 위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는 죽는 날까지 미사를 봉헌하기를 열망했다.

비오 신부의 고해소에 무릎을 꿇은 그는 자기가 죽을 때 비오 신부가 함께 있어 주기를 청했다.

한동안 감격에 젖어 있던 비오 신부가 웃으며 말했다.

"친애하는 동료 신부님, 주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내가 지켜보는 것을 허락하셨소. 당신은 매일 미사를 매우 경건하게 봉헌했고, 일상기도와 생활을 성실히 꾸려나가는 외에 세번의 묵주기도와 십자가의 길을 기도해 왔소.  이러한 성의를 봐서 당신은 죽는 마지막 날까지 미사를 봉헌할 은총을 허락받을 것이오."

많은 선물을 받은 그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는 비오 신부를 자기 아버지처럼 사랑하고 존경하여 이미 5번이나 그를 방문했지만, 이제부터는

그러잖아도 고통을 받으며 과도하게 짐을 진 비오 신부에게 더 이상 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앞으로 그를 만나지 않는 것이 자기가 할 수 있는 희생이라고 생각했다.

 

로마에서 온 매우 지성적인 사람이 제의실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가수였던 그는 오페라 무대와 라디오에서 많은 노래를 불렀다.

열흘쯤 전이었을까, 비오 신부가 지나치며 말했다고 한다.

"노래를 그만두지 않을 테요? 그 따위 노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타락한 줄 아시오?

언젠가 영원한 재판관 앞에 섰을 때 뭐라고 할 테요?"

그는 크게 놀라서 그 자리에서 물러나와으나, 이내 비오 신부가 한 말을 잊어버리고 다시 옛날 생활로 돌아갔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에 공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비오 신부도 함께 오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집에 도착한 가수는 파랗게 질려 그 앞에 무릎을 꿇었으나, 너무 놀란 나머지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 사이에 비오 신부는 방안을 이리저리 거닐더니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뭐라고 했소? 노래하는 것 집어치우시오.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을 타락시킬 테요?"

그리고 비오 신부는 사라졌다.

다음 날 그는 산조반니 로톤도로 와서 이 얘기를 하고 다녔다.

그 순간 비오 신부가 고해성사를 주기 위해 제의실로 들어왔다.

가수는 무릎을 꿇은채로 말했다.

"비오 신부님, 제게 원하시는 일을 모두 지키겠습니다."

신부는 사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됐어요."

그는 용기를 내어 비오 신부를 우러러보며 물었다.

"이제 수입이 끊어졌으니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을 위해 주님께 빌겠소."

며칠 뒤에 이 사람은 다른 데에 취직이 되었다.

 

플로렌스의 한 부인이 비오 신부에게 와서 벌써 세달째 머물고 있었다.

그녀는 연금으로 살고 있었는데, 오빠가 미국에서 매달 얼마씩 돈을 보내 주고 있었다.

그런데 세달 동안 아무것도 받지 못하자, 그녀는 이제 빚을 얻어야 할 판이었다.

고해소에서 그녀는 비오 신부에게 세 달 전부터 오빠가 편지도 보내지 않고, 돈도 보내 오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비오 신부가 말했다.

"뭘, 곧 편지도 오고 돈도 올 거요."

부인은 지나가는 말로 부탁했다.

"비오 신부님, 신부님이 한번 미국에 가서 제 오빠를 만나보시면 어때요. 제 사정도 말슴해 주시고요."

"그것 좋지요."

그러자 부인은 지갑을 열더니 이리저리 헤집으며 뭔가를 찾고 있었다.

비오 신부는 창살 너머로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뭘 그리 찾고 있소?"

"미국에 있는 제 오빠의 주소를 찾고 있어요."

비오 신부가 웃으며 대답했다.

"일없소. 그 주소를 내가 모를까 봐 그러시오?"

열흘 후 부인은 돈과 함께, 비오 신부가 미국의 자기에게 왔더라는 오빠의 편지를 받았다.

부인은 놀랐지만, 그녀의 소박한 머리로는 동시에 두 장소에 현존하는 일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뒤에 이 일은 다시 되풀이 되었다.

부인은 다시금 오빠로부터 두 달동안 돈과 소식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고해소에서 비오 신부에게 청했다.

"신부님이 또 미국에 가서 제 오빠를 만나 봐 주시지요. 두달 동안 돈도 못 받았고, 소식도 끊어졌어요."

"그런데 미국 가는 여비는 누가 댈꼬?" (웃으며)

이 말에 부인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비오 신부가 말을 이었다.

"괜찮아요. 열흘 뒤면 당신은 돈과 소식을 받을 것이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처음으로 비오 신부를 찾아온 23세 난 처녀가 산조반니 로톤도에서 폐렴에 걸렸다.

상태가 점점 나빠지자, 부모가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려고 했지만 그것도 여의치가 않았다.

하루는 놀랍게도 비오 신부가 그녀에게 오더니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참 안됐구나. 하지만 네 영혼을 위해 고통의 시련이 필요하단다. 3주일 안에 너는 집으로 돌아가고,

6주일 안에 완전히 나을 거야."

과연 그녀는 3주일 후에 부모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상태는 나날이 악화되어 비오 신부가 완전히 나을 것이라고 말한 당일에 그녀는

오히려 죽음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러자 부모는 비오 신부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며 온종일 임종의 촛불을 켜 두게 했다.

오후 4시경에 식구들이 모두 병자 곁에 모여 있었는데, 거기에 비오 신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죽어 가는 사람 곁으로 가서 동정심에 차서 말했다.

"너 불쌍한 애야, 네 머리를 내 옆구리의 상처에다 대어 보렴."

그 처녀가 뒤에 한 얘기이지만, 그때 그녀는 몸 속에 새로운 활력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겼다고 한다.

처녀는 눈을 뜨고 기쁨에 넘쳐 고함을 질렀다.

"난 나았어. 난 나았어요!"

모두가 놀라서 치유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비오 신부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두 자녀를 둔 비엔나의 한 가족이 비오 신부에게 갔다가 큰 감명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몇 주가 지난 어느날, 어머니가 한 아이를 데리고 복잡한 교차로를 건너려 했는데, 정차해 있는 차들로 시야가 가려졌다.

아이가 앞으로 나가자고 어머니를  끌었다  그 때 지나가던 차가  이 다섯살배기 아이를 들이받았고, 아이는 공중에서 세 바퀴 맴돌았다.

깜짝 놀란 어머니의 입에서는 "비오 신부님, 도와주세요. 비오 신부님, 도와주세요!" 하는 기도가 튀어나왔다.

그 순간 비오 신부가 어느새 인도 가장자리에서 공중에 떴다고 떨어지는 아이를 받아 안고 있었다.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은 최악의 사태를 우려했다.

경칠이 와서 아이를 병원에 싣고 가게 했다.

진찰 결과 아이는 전혀 이상이 없었고 찰과상 하나 입지 않았다.

 

비오 신부를 몹시 존경하던 84세의 부인이 뇌졸증을 일으켰다.

그 결과 전신마비에다 언어장애가 왔고 언어장애가 왔고 음식 섭취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의사는 부인이 죽음의 징조를 보인 지 사흘이 지났는데도 죽지 않는 것을 보고 매우 놀라워했다.

한번은 병상을 지키던 아들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 돌아온 적이 있었다.

아들이 돌아오자, 어머니가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수도복 입은 그 카푸진회 신부를 더 보고 싶구나."

"어느 카푸친회 신부 말예요?"

"글쎄, 방금 여기에 왔던 그분 말이야."

"어디에 말씀이세요?"

"거기, 네가 않은 그 의자에."

그가 무슨 말을 하더냐고 묻는 아들의 질문에 어머니는 울면서 말했다.

"그분은 나를 죽는 잠에서 깨우시더니 다시 건강해지고 죽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셨어. 덧붙여서 내가 이탈리아로 갈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분이 손수 내게 오셨다는 거야. 또 앞으로도 자주 오시겠대. 그러고는 사라지셨어."

1964년 12월 17일의 일이었다.

그 순간부터 부인은 완전히 달라졌다.

의사들이 놀라는 가운데 마비증세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녀가 그 뒤로 지상에서 연명한 1년 동안, 비오 신부는 자주 그녀를 방문했다.

 

비오 신부를 매우 존경하면서 늘 그의 사진을 몸에 지니고 있던 79세의 부인이 하루는

 4미터 높이의 사다리를 올라가다가 꼭대기에서 현기증으로 떨어졌는데, 떨어지면서 외쳤다,

"비오 신부님, 도와 주세요!"

그 순간 그녀는 비오 신부의 부축을 받아, 하나도 다치지 않고 일어섰다.

 

루르드의 성모님 발현 100주년 기념행사 때,

비오 신부는 한 번도 산 죠반니 로론도를 떠난 적이 없었는데도 사람들은 루르드에서 그를 보았다.

주교들도 성체행렬을 하면서 그와 인사를 나우었다.

 

독일 사람 하나는 늘 외딴 곳에 있는 작은 소성당을 돌보고 꽃으로 장식하곤 했다.

하루는 성당 바닥을 청소하다가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 가지고 왔더니, 제대 옆에 웬 카푸친회 신부가

서 있었다.

그는 사랑스럽게 웃으며 축복을 내렸다.

"주님과 함께 성모님께 바치는 당신의 애정과 정성을 하느님께서 보답해 주시기를!"

그리고 신부는 갑자기 사라졌다.

그는 그 신부가 누군지도 모른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집에 돌아왔다.

며칠 뒤 그 성당을 찾아온 어느 부인의 기도서에 그 신부의 사진이 있는 것을 보고 그는 깜짝 놀랐다.

그 부인에게 물었더니 그 신부는 자기가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오상의 비오 신부라는 것이었다.

 

비오 신부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으로 생각하며 극진히 사랑하던 80세 가량의 한 노인이

암에 걸려 고생했다.  그는 참을성 있게 고통을 견뎌내고 있었다.

하루는 병상에 누워 있는데, 비오 신부가 닫혀 있는 문을 통해 방에 들어왔다.

신부는 웃으며 다가와서 그를 축복하며 말했다.

"그토록 참을성 있으시니 그 고통을 내가 몇 주간 짊어지지요."

그 순간 진저리나던 고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가  3주 뒤에 도졌다.

죽음이 가까워 오자 비오 신부가 그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뒤에 비오 신부는 성모님과 임종자의 주보이신 성 요셉과 '빛나는 아이'라고 얘기했던 노인의

죽은 아들과 함께 이 사람의 영혼을 밟고 드높은 하늘의 입구에까지 안내해 주었다고 확인했다.

2주일 후 비오 신부는 질문을 받은 자리에서 죽은 사람이 벌써 하늘에 올라가 있다고 대답했다.

 

어떤 부인이 여동생을 잃은 지 얼마 안 되어 비오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보러 갔더니,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 여동생이 죽었을 때 내가 그녀의 영혼을 전능하신 분의 왕관 앞까지 바래다 주었소. 그녀는 주님이신 하느님께서 만족하게 생각하시는 몇 안 되는 영혼들 가운데 하나였소. 그녀의 묘비에 이렇게 쓰시오.

 '그녀는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타는 작은 불꽃이었으니, 이제는 타다가 조용히 꺼져서 드높은 영원 세계에서 찬연히 빛나도다!"

 

비오 신부는 믿을 수 있는 고해자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를 찾아오거나 내 말을 믿고 이런 은총을 거부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언젠가 그들의 임종때 하느님 앞에서 첫 번째 변호자가 될 것이오. 그러나 잘 들어 두시오.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사업을 짓밟고, 이러한 은총을 거부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내가 하느님 재판정의 첫 번째 고발자가 될 것이오!"

 

비오 신부를 대단히 존경하는 74세 된 비엔나 사람이 점심 식사 후에 갑자기 뇌졸증을 일으켜 의식불명이 되었다.  온갖 상비약을 썼으나 아무 소용이 없자 의사를 불렀다.

의사는 죽음이 임박했다는 진단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아내는 물론 그 사람이 착하고 경건하게 살기는 했지만, 그의 영혼부터 살려야 하는 마당에

왜 사제부터 부르지 않았나 하는 자책감으로 괴로워했다.

그녀의 올케가 산조반니 로톤도로 가서 비오 신부에게 그 사람이 구원되었는지를 물었다.

이 물음을 비오 신부에게 전달한 신부가 돌아와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사람이 뇌졸증을 일으켜 단말마의 신음을 하고 있을때 비오 신부가 한 시간 이상 그의 침대에 붙어서

영생의 길을 준비시키고, 그를 하느님의 재판석으로 인도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 말씀을 듣고 나는 흐뭇한 마음으로 비오 신부님에게 농담을 했지요.

돌아가신 분의 미망인이 이 소식을 듣고도 직성이 안 풀리면 어쩌지요?

 

비오 신부의 특별한 가호를 받던 젊은 여교사가 임시교사 자리를 얻어 매일 두 시간씩 기차를 타게 되었다.

이 기차에는 나폴리로 출퇴근하는 청년들이 많았다.

청년들이 기차 안의 이 홍일점 선생을 놀리기 시작했다.

한번은 소년하나가 무례하게 손찌검을 하려 들자, 그녀는 속으로 조용히 외쳤다.

"비오 신부님, 도와주세요!"

그러자 곧바로 차장이 들어와서 함께 종착역까지 가게 되었다.

얼마 뒤 이 여선생이 다시 비오 신부에게 와서 고해성사를 볼 때, 신부는 평소에는 한번도 한 적이 없는 질문을 했다.

"세상 돌아가는 일 중에 뭐 새로운 것 없어요?"

그녀는 자기가 당한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예, 요즘 애들은..."

그러자 비오 신부가 가로막았다.

"그 얘긴 할 필요 없어요. 내가 두 시간 동안 차장 노릇을 했어."

 

산조반니 로톤도의 성당 위쪽에 있는 여인숙 '비안카'의 여주인은 지금은 작고했으나 토리노 출신인데,

 한번은 비오 신부가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이 무엇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할지, 또 하늘에서 어떤 자리에 갈지 나는 다 알고 있어요."

언젠가 이 부인이 토리노를 떠날 때 친척들은 그녀의 유산 상속 서류에 서명하여 그 달 16일까지 토리노의 재판소로 보내라고 주의를 환기기시켰다.

그러나 그녀는 이것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그 달 15일에야 비로소 생각해냈다.

그녀는 서명한 서류를 봉투에 넣어 산조반니의 우체국에서 발송했다.

그러고는 마음 속으로 편지가 제 시간에 토리노에 배달되게 해달라고 비오 신부에게 빌었다.

이 편지는 16일 아침에 산조반니의 소인이 찍혀 8시경에야 우편 수집차에 실려 갔다.

그런데 편지는 당일 토리노의 재판소에 배달되었다.

사람들은 산조반니에서 발송된 편지가 당일 토리노에 도착한 것을 보고 너무 놀랐다.

보통 때 같으면 잘해야 패스카라 정도에 와 있어야 할 편지였던 것이다.

며칠이 지난 후, 비오 신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우체부 노릇도 해야 한다니까!"

 

전쟁이 끝난 뒤, 러시아 전선에 있던 한 이탈리아 병사가 고향 산조반니 로톤도로 돌아왔다.

비오 신부가 그 병사 앞에 발을 멈추고 인사를 건넸다.

"요셉 군!"

이 말을 듣고 병사가 물었다.

"예, 신부님 그런데 저를 아시는지요?"

"그럼, 자네를 모를 리가 있나! 우선 8월 14, 15, 16일에 있었던 일을 생각해 봐요!"

"그때 우리는 지뢰밭을 지나가야 했습니다. 좌우에서 지뢰가 마구 터졌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저를 붙들어 이러저리 옮겨 주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러자 비오 신부가 말했다.

"그 사흘을 언제나 기억하고 있어야 해!"

이 병사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는 비오 신부의 보호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의 누나가 동생을 위해 비오 신부에게 청원했기 때문이다.

 

어느 무신론자의 딸이 비오 신부에게 모쪼록 자기 아버지의 회개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청했다.

비오 신부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 일이 있는 후 그 무신론자가 죽었다.

딸은 친구를 통해 비오 신부에게 자기 아버지가 구원되었는지를 물었다.

신부는 근엄하게 말했다

"내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오! 그녀의 아버지는 이미 구원되었다고 전하시오. 내가 그의 임종 자리에 가 있었소."

 

죽어 가는 사람, 특히 그의 영적 자녀의 죽음에 입회한 비오 신부는 그의 고통을 함께 나누었다.

이러한 숭고한 고통을 통해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 주신 분은 하느님이시다.

'너를 사랑한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얼마의 값을 치르더라도 오직 행동을 통해서만 우리는 사랑을 증명할 수 있다.

 

이탈리아 북부에서 남부로 전근된 유스티나 수녀는 감실 안의 주님이 늘 자기에게 제발 보속하는 영혼들을 위해 서원을 세우라고 외치시는 것을 기도 중에 느꼈다.

이에 사소한 일도 하느님께 누가 되지 않을까 싶어 그녀의 양심은 더욱 소심해지고 민감해졌다.

그래서 그녀는 자주 이렇게 기도하곤 했다.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제가 죽으면 당신을 모욕하는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요."

한번은 그의 동료 수녀가 비오 신부에게 왔는데, 그때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그 유스티나라는 수녀에게 그따위 기도는 집어치우라고 하시오. 그녀도 언젠가는 죽겠지만,

그건 하느님께서 원하실 때의 일이오."

그러다가 유시티나 수녀가 비오 신부를 방문했다.

고해소에서 신부가 말했다.

"당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오. 앞으로는 자주 이렇게 기도하시오. '사랑하는 하느님, 꽉 막힌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저를 바칩니다.' 라고 말이오.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를-겨울날의 눈송이처럼 많아요-볼 수 있다면, 아마 당신은 죽고 말 거요. 하느님의 자비를 거역하는 사람에게는 그분의 정의가 가차없이 적용될 것이오. 그러나 보시오. 내겐 많은 영적 자녀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하느님을 위해 정말 뭔가를 희생하겠다는 사람은 몇 되지 않소."

이 말을 들은 유스티나 수녀는 그 뒤로 많은 고통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번은 꿈에 비오 신부가 보였는데, 신부가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모르게 고통 당하는 법을 배워야 하오. 나를 좀 봐요... 지금 나는 영적으로 매우 고통받고 있소. 하지만 아무도 이것을 아는 사람은 없소."

이 말을 듣고 유스티나 수녀도 영육간에 고통을 받으면서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전쟁 후 유스티나 수녀가 장상 수녀와 함께 택시를 타고 산조반니를 찾았다.

도중에 유스티나 수녀는 문득 자동차에서 내려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래서 그녀는 차에서 내려서 산길을 걸어 수도원까지 갔다.

처음에는 자동차가 그녀를 버려두고 그냥 달아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언짢았지만, 성당에 도착해 보니 장상 수녀가 차 밑에 죽는 듯이 쓰러져 있었다.

유스티나 수녀가 비오 신부에게 도와달라고 하자 신부는 말했다.

"그럼, 알고 있소. 이건 마귀 짓이오. 마귀가 자동차를 골짜기에 처박으려 했지. 다행히 당신은 내가 당신을 꺼내는 것을 알아차렸소. 자신을 희생으로 내놓는 영혼들이 세상에 있기에 마귀가 많은 영혼들을 놓치는 것이오."

유스티나 수녀가 말했다.

"자칫 잘못되었으면 우리가 영적 도움도 받지 못하고 죽을 뻔했군요."

"아니, 내가 갔을 거요. 내가 가서 당신들을 위해 사죄경을 외고 하늘가지 안내했을 거요. 마지막 순간에 신의와 자비의 은총이 없었다면 다른 은총도 아무 소용이 없었을 거요. 하느님은 이 은총을 원하는 누구에게나 주신답니다. 그래도 마귀는 우리를 공격하지요."

신의의 은총을 달라고 겸손하게 빌면 하느님은 틀림없이 들어 주신다.

비오 신부는 우리의 임종을 지켜보러 오는  은사를 받아 가지고 있었다.

 

두 딸을 둔 어머니가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개신교 신자였지만 두 딸은 가톨릭 신자였다.

두 딸이 비오 신부에게 전보를 쳐서 어머니의 임종을 봐 주기를 요청했다.

갑자기 방에 말할 수 없이 좋은 향기가 가득 차고, 어머니는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도와주소서. 아멘!"

이 말을 끝으로 그녀는 숨을 거두었다. 그 향기는 비오 신부의 현존을 말해 주었다.

 

전쟁 때 비엔나의 한 가족이 그들의 집을 비오 신부의 비호에 맡겼다.

공습 때 그 구역 전체가 폭탄 세례로 쑥밭이 되었는데, 오직 그 집 한 채만은 무사했다.

호기심으로 방공호에 들어가지 않고 창 밖을 내다보던 한 부인이 그 집 앞에 어떤 카푸친회 신부가 버티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부인은 이 사실을 그 가족에게 이야기했고, 그리하여 그들은 비오 신부가 실제로 도왔다는 것을 알았다.

 

전쟁 중에 점령군의 군인들이 어느 가정에 들이닥쳐 수탈하기 시작했다.

식구들은 남의 물건을 가방에 꾹꾹 채워 넣고 있는 군인들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비오 신부를 부르며 도와달라고 했다.

군인들이 나가기 직전에 갑자기 세찬 목소리가 들려 왔다.

"너무 했어!"

너무 놀란 군인들은 모든 짐을 내려놓고 줄행랑을 쳤다.

이렇게 하여 그 가족은 소중한 재산을 건졌다.

도와준 사람은 물론 비오 신부였다.

 

역시 전쟁 중의 일이었다.

갑자기 비오 신부가 대화를 중단하고 사죄경을 외우는 일이 자주 있었다.

왜 그러는지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하느님께서 내게 이 불쌍한 군인들의 죽음을 지켜보도록  허락하셨소."

물론 비오 신부는 다른 사람들이 임종하는 자리에도 기꺼이 가곤 했다.

 

볼로냐에서 한 사람이 냉담 중인 채로 죽어 가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잘 아는 사람 하나를 모셔 왔다.

그는 비오 신부의 오상의 피로 얼룩진 손수건을 죽어 가는 사람의 몸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죽어 가던 사람이 고해성사를 보고싶다고 했다.

다음 날 그는 이렇게 말하고 숨을 거두었다.

"신부님이 여기에 다녀가셨어."

 

산조반니 로톤도에서 아프레슈 씨의 사진관에 취직해 일하던 베니 로베르시라는 15세 소년이 있었다.

그는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운 것이 원인이 되어 그곳의 병원에서 죽었다.

그는 한밤중에 숨을 거두었는데, 죽기 전에 가족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말했다.

"방금 비오 신부님이 여기에 오셨어요. 어머니, 저는 이제 갑니다."

물론 죽어 가는 사람이 헛것을 봤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그 시각에 비오 신부는 밀라노에서 온 어느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말했다.

"오늘은 그만합시다. 나는 지금 병원에 가서 베니라는 사람의 임종을 돌봐야 하오."

그러고는 사라졌다.  밤 11시경이었다.

나중에 그 부인은 병원에 편지를 써서, 그날 밤 그 시각에 죽은 베니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물었다.

그녀는 그가 베니 로베르시, 즉 아프레슈 씨의 사진관 점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쟁 중에 한 병사가 자기 부대에서 낙오되었다.

종일 헤매다 보니 굶주림과 갈증과 피곤 때문에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마침 뽕나무가 눈에 띄기에 가보았으나 열매는 하나도 없고, 그 옆에 있는 샘도 바싹 말라 있었다.

암담한 심정으로 돌아다니다가 그는 어떤 수도원에 이르러 기도했다.

갑자기 한 수도사가 나오더니 그를 축복하며 말했다.

"자네 소원은 이루어질 걸세."

그리고 그는 사라졌다.

병사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다가 놀랍게도 뽕나무에는 오디가 그득하고, 옆의 샘에는 물이 흘러넘치는 것을 보았다.

실컷 먹은 그는 계속 걸어가다가 마침내 자기의 소속 부대를 만났다.

그 수도자가 틀림없이 비오 신부였을 것이다.

 

어느 독일 처녀가 3년 동안 전신마비 상태로 병원에 누워 있었다.

4년째가 되면서부터는 비싼 입원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목까지 마비되어 음식도 삼킬 수 없게 되자 또다시 입원했다.

마침내 목소리까지 가버렸다.

위독한 상태에 이른 어느 날 밤 그녀는 알지 못하는 카푸친회 신부가 병실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웃으며 가까이 오더니 축복을 내리며 말했다.

"여기에 오래 있을 필요는 없어요. 이제 일어나겠구먼. 그리고 참, 말도 다시 할 수 있을 거요!"

그는 이 말을 하고는 사라졌다.

그녀는 기뻐 어쩔 줄 모르는 가운데 사지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데 간호사가 들어왔다.

"간호사님, 난 다 나았어요!"

이튿날, 의사들은 그녀의 치유 사실을 확인했고, 그녀는 그 날로 퇴원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 기적에 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녀는 자주 외로이 시립공원에 나가 앉아 있곤 했다.

그런데 한번은 어떤 부인이 공원을 지나가는데,  표지에 비오 신부의 사진이 인쇄된 책을 옆구리에다  끼고 있었다.

이것을 본 그녀는 다짜고짜 부인에게 다가가 책을 뺏다시피 해서 살펴보고는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래, 맞아! 이분이 나를 고치신 신부님이야!"

그 책을 탐독한 그녀는 비오 신부의 놀라운 능력에 알게되었다.

감사를 위한  산죠반니 여행이 뒤따랐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비오 신부는 그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비오 신부의 영적 자녀 및 사람이 자가용차를 타고 외국 여행을 하고 있었다.

억수같이 퍼붓는 빗속을 달리다 보니 어디가 어딘지 분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때 갑자기 카푸친회 신부 한 사람이 그들에게 다가오더니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

하지만 빗줄기가 워낙 세차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손으로 가리며 창문을 열었다.

그 신부는 하늘을 보며 큰 소리로 명령했다.

"저기 그 위, 이제 그만!"

그 순간 비가 그쳤다.

그는 길을 가르쳐 주고 사라졌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비오 신부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뒤의 여정에는 화창한 날씨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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