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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 들어온 경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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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巡禮者 2012. 4. 12.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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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에 들어온 경교  
 
        이청길 (재 일본선교사)
 
   경교가 중국에 들어온 때는 당태종 시대이다. 이때는 신라가 삼국 통일의 대업을 수행하려고 당과의 외교를 공고히 하고 활발하게 교류하던 때이었다. 그 당시 신라는 해마다 학승(學僧)들을 당나라에 유학을 보냈고, 귀국할 때는 불교관계의 문물뿐만 아니라 새로운 학문과 사상 등 다양한 자료들을 수집하여 귀국하였다고 한다. 이들을 통하여 경교도 신라에 전래된 것으로 추측하는데 이를 증명해 주는 것이 1917년 금강산 장안사에서 경교의 비석인 대진경교유행중국비의 모조품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경교는 당나라의 황제들의 후원을 받으면서 주마다 경교의 사찰을 세우고 포교활동을 왕성하게 전개하고 있었다.


   이때에 세워진 경교의 비석은 845년경에 경교에 대한 박해령이 내린 후에 매몰되었는데 이와 똑같은 모조품이 금강산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신라 때에 이미 경교가 전파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또한 경교의 유물이 경주 불국사 경내와 안압지에서 돌십자가와 마리아상이 발견되었고, 전남 해남의 대흥사에서는 구리로 만든 십가가 등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1595년에 천주실의를 쓴 마태오 리치가 명나라에 처음 왔을 때 기독교의 흔적을 찾는 중 당나라 때 경교가 성행하였다는 문구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신비롭게도 한글로 기록된 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책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기록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고 설명했다.


   영국 여류 고고학자인 고든(E.A. Gordon)은 기독교의 동양전래 및 기독교와 불교의 교류에 대한 연구에 전념한 사람이었다. 고든(E.A. Gordon)은 오래 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경주의 불국사의 경내에 있는 관음보살상과 나한상(羅漢像)의 불상에서 경교의 흔적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석굴암의 전실 양 벽에 부조되어 있는 팔부신장(八部神將)중 두 상의 모습은 폐르샤 무인상이며 석굴암 내부에 조각되어 있는 형상을 보면 발에 신은 샌들과 손에 든 유리잔 등 경교의 유산임을 말해주고 있다.


   기독교 사학자인 유우식 집사는 “첨성대의 외향은 면류관을 쓴 여왕의 모습이며 벽에는 아기 예수를 뜻한 것으로 추정되는 얼굴이 암각화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첨성대 위에는 “아기 앞에 절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으며 첨성대는 하늘에 천제를 드리는 제단이었다”고 말했다.


   사실 첨성대는 천체를 관측하기에는 너무나 불합리한 면이 많다는 지적이 일부 과학자들 사이에 계속 제기되어 왔다고 한다. 또한 하늘의 천체를 관측하는 첨성대가 들판에 있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더욱 왕릉 앞에 설치되어있다는 사실도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원래 묘지 앞에는 죽은 자를 위한 제단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첨성대는 하늘의 신께 천제를 드렸던 곳이라는 말이 설득력을 갖게 된다.

 

    경주에서 발견된 경교 돌 십자가 마리아상 
  

   마침 근간에 필자가 첨성대와 석굴암을 방문할 기회가 있어서 한번 더 주의 깊게 관찰하여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다만 필자는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하였다는 사실은 우리 민족을 통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유물과 가야 왕국의 기독교적인 흔적과 신라시대에 창건된 불국사에서 돌십자가와 마리아상 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인류 역사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찾아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 속에 숨겨 놓으신 놀라운 계획을 추적하는 것은 구속사적인 면에서 매우 귀중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이 기독교 역사의 기적을 이룬 배후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섭리적인 손길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2009. 8. 31. 코람데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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