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시대의 경교 전래
1. 통일신라시대의 경교
경교는 주후 431년 제3회 에베소에서 개최된 세계 교회회의에서 희랍 정교회와 로마 교회가 함께 모여 예수님에 대한 신학적 논리를 전개하게된다.(基督論)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Nestorius)가 마리아를 ‘ 그리스도의 어머니 ’ 라고 주장하던 것을 이단으로 정죄하면서 부터 생겨난 그리스도교의 한 분파이다. 당신에 모든 교회가 마리아는 ‘ 하느님의 어머니 ’라고 인정하고 있을때였는데, 네스토리우스가 ‘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 ’ 라고 하기 보다는 예수를 낳았음으로 ‘ 그리스도의 어머니 ’ 라고 해야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고 그를 처치할 목적으로 문제를 일으켜 에베소 교회 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되어 이집트로 추방이 되었고 그의 제자들이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지금의 이란)에 수도원을 세우고 선교사들을 양성 하여 사방으로 파송을 하였는데 그 중의 한 무리가 인도를 지나 중국에 도착하였다.
중국에 도착한 때가 주후 635년 당나라 태종 9년때에 알로펜(Alopen-阿羅本;아브라함의 중국이름)을 단장으로 선교단이 있었다. 당 태종은 21명의 선교단에게 의전 재상인 방현령(房玄齡)을 보내어 환영을 하게 된다. 주후 638에는 태종은 이들에게 토지를 주고 국비를 드려 파사사(波斯寺; 당시 교회를 寺로 표시하였음)라는 이름의 교회를 세워주고 경전(經典)을 번역하게 함으로 당나라에 선교의 길이 크게 열리게 된다.
처음에는 서역에서 색다른 종교가 페르시아에서 왔음으로 파사교(波斯敎)라고하였는데 이 종교의 본거지가 로마인 것을 알고는 로마라는 한자인 대진(大秦)이라는 말에 교(敎자)를 부쳐서 대진교(大秦敎)라고 부르게 된다. 그 후에는 광명한 종교라는 의미로 경교(景敎)라는 이름을 얻게 됨으로 당나라에서 경교, 또는 대진교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태종의 대를 이은 고종은 알로펜에게 진국대법주(秦國大法主) 라는 관직을 주고 10 도와 385주(州)에 경교 사원을 세우도록 하였다. 태종때는 성탄절이 되면 향과 음식을 주고 축하하기도 하였으며 경교는 당나라에서 주후 635-845년 동안의 210년간 국민들의 호응과 황실의 보호 속에서 선교를 활발하게 전개하 였다.
그러나 도교(道敎;Taoism; 유고중의 노자(老子) 중심의 도덕 종교의 한 형태) 신자인 무종(武宗 840-846)이 황제에 오르면서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그는 외래 종교가 지나치게 번창하는 것과 나라 경제가 어려울 때 불교의 사원들은 많은 농토와 재산을 가지고 있으며 승려들이 일하지 않으면서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종교탄압 정책을 칙령으로 내리면서 재산을 몰수하게 된다. 경교와회회교, 함께 조로아스터교 (Zoroastrianism)의 사제들까지 성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때의 사정을 보면 문을 닫은 불교가 4,600개, 환속되어 간 승려가 무려 26만 5천명이었다고 한다. 경교에 대한 탄압이 있게 되자 더 존속할 수 가 없게 되었다.
경교가 당나라에서 활발하게 선교가 되고 있을때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던 시기인 주후 668년이었다. 이 무렵은 우리나라 삼국, 특별히 신라와 당나라 간에 밀접한 관계가 있었고, 통일하는 과정에서 정치사회문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신라는 해마다 학승(學僧)을 당나라에 유학을 보냈고, 귀국할 때는 불교관계의 문물과 함께 새로이 생겨난 학문과 문물 그리고 사상들을 가지고 왔다.
이러한 사실들을 볼 때, 신라에도 경교가 소개되었을 개연성은 있다고 본다. 근래 우리나라에서 에서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의 모조비를 발견하였고, 주후 1928년에는 고구려의 옛 영토인 압록강 주변 만주의 안산(鞍山)지역에서는 경교도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이 발견되었다. 그 무덤에서는 와제(瓦製) 십자가가 나왔고, 주후 1956년에 경주 안압지에서는 십자가 모양의 돌 십자가상과 마리아 상이 발굴되어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전남 해남의 대흥사에서는 구리로 만든 십자가 등이 있다.
200여년 동안 번영하다가 박해로 인하여 선교의 흔적이 없어졌는데 이 사실이 매몰된지 800년이 지난 주후 1625년에 경교비로 발견되었다. 이 비석의 이름은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이다. 이 비석의 비문은 중국어와 시리아어로 되어 있고 당시 경교 선교 역사와 활동상황들이 736자로 소개가 되었다.
외국인 영국 여류 고고학자인 고든(E. A. Gordon)은 기독교의 동양전래(東洋傳來) 및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교류에 대한 연구를 전념하였는데 수년간 우리나라에서 머물면서 경교의 전래 가능을 연구하고 나서 고든 (E. A. Gordon) ‘ 경주의 불국사 경내에 있는 관음보살상과 나한상(羅漢像)들의 불상에서 경교의 흔적을 볼 수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능이나 문 앞에 세운 무인상(武人像)들에서도 경교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고 주장하였다.
불국사에서 출토 되어 한국 기독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돌 십자가(1)와 성모 마리아상이 왜 하필이면 불국사에서 출토되었을까요?
신라시대 유물로 경교와 연관되어 있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중국의 대진 경교비와 함께 중국 당나라 시대에 퍼졌던 경교 불국사를 지은 김 대성 과 아사달이 당나라 유학파였습니다. 그 당시 교회를 나타낼 수 있는 말이 없어서 사(寺), 그리고 목사를 나타낼 때 승(僧)이라고 하여, 은혜 사 십자 사, 아담 승 등으로 나타내었습니다.
경교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불교로 뒤 덥힌 교회의 역사를 절 속에서도 찾을 수 있겠습니다.
(후광이 있는 나한상과 무인상등에서는 경교의 색체를 띄고 있습니다.)
당 나라 시대의 기독교를 나타내는 대진 경교 유행비가 중국 서안에서 발견 되었듯이 우리나라 금강산에서도 그 모조품이 발견되어 경교사에 귀중한 자료로 남겨지고 있습니다.
전남 해남의 대흥사에서도 십자가 상이 발견 되었으며 우리나라 경산에서 발견된 양을 안은 목자상이나 기도하는 손을 나타낸 석상들이 이런 사실들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경교에 대한 역사 참고는 인터넷에서는(naver.com or kidok.net등) 물론 경교 의 서적 등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1) 돌 십자가/한국기독박물관 소장
(2) 최초 기독교 중국 선교의 역사적 배경/경교의 역사와 신학/존엠.엘.영
중국 네스토리우스교(동방기독교·경교·景敎)
중국에 경교(景敎: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가 전래한 635년부터 약 150년간 있었던 선교활동 및 교세의 역사가 새겨져 있는 석비. 높이 2.76m, 하부의 너비 1m, 두께 0.27m이다. 명(明)나라 말기 1625년에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의 서쪽에 있는 당(唐)나라 수도 장안(長安)의 대진사(大秦寺) 유적에서 발굴되었다. 이 석비는 당대(唐代)인 781년에 경교도 사즈드보제드가 건립한 것으로, 845년의 ‘박해령(迫害令)’ 후에 매몰된 것으로 추측된다. ‘大秦景敎流行中國碑’라는 9자를 3행으로 새긴 전액(篆額)을 포함한 이수(촬首) 부분과 비문을 새긴 부분으로 되어 있다. 1800여 자의 한자와 50여 어의 시리아 문자로 되어 있고, 한자는 대진사의 승려 경정(景淨)의 찬(撰)에 여수암(呂秀巖)의 서(書)로써 경교의 주요 교리와 성쇠의 역사가 기술되어 있다. 비문의 마지막에는 황제에 대한 상찬(賞讚)과 사제(司祭) ·수도사의 이름 및 지위 등이 열기되어 있어, 당대의 종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최근 그리스도교의 동방전래 과정이 구전차원을 넘어 차츰 문헌과 고고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다.새롭게 증명되는 자료를 통해 복음의 역사는 그 뿌리가 점점 깊어지고 있다.예수의 12제자 중 토마스와 발트로메오가 인도와 중국을 선교했다는 설이 있으며 보다 실증적인 복음의 동방전래는 네스토리우스파의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경교란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ism) 그리스도교의 중국 한자음 명칭이다. 네스토리우스는 안디옥 근처 수도원에서 생활하며 428년 동로마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콘스탄티노플 감독에 임명됐으나 교리논쟁에 휩싸였다.네스토리우스파는 교리논쟁에서 알렉산드리아학파에 패배해 451년 칼케돈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몰렸다 주후 431년 에베소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단죄되고 451년 칼케돈공의회에서 재차 단죄되었다.
<신학적 논쟁점>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의 마리아 신성 논쟁
에베소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품격(品格)을 둘러싼 논란이 신학문제의 초점이 되어 테오도시우스 2세가 소집한 3차 공의회이다. 안티오키아 학파 출신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總大主敎)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강조하는 학파의 입장에서 마리아에 대한 ‘신(神)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부정하였다.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강조하는 알렉산드리아학파가 이에 이견을 제시하자, 네스토리우스가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강요하여 이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에 동조하는 안티오키아의 요한을 추종하는 시리아의 주교들과 교황 셀레스티누스 1세측의 대표자들의 참석을 기다리지 않고, 에페소스의 주교 멤논의 지지를 받는, 네스토리우스의 적수인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가 그들의 도착 전에 개회를 하였다. 그래서 네스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직에서 해임되고, 파문(破門)을 당하였으며 그의 교구는 단죄되었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 ‘니케아신경’이 재확인되었다.
이 에베소 회의는 교회사에서 유명한 도적교회회의라고도 불리운다. 대표자들이 참석 전 강제로 개최했기 때문에 교황 레오 1세가 화가 나서 ‘에베소의 강도들’이라고 부른 데서 이 이름이 붙었다. 당시 에우티케스가 그리스도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다 함께 갖추었다는 단성설(單性說)을 주창하자, 이에 반대하는 콘스탄티노플 대주교(大主敎) 플라비아누스는 448년의 회의에서 그를 이단자로 단죄하였다. 그러나 이에 반대한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디오스쿠루스는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교회회의 소집을 간청하여 회의를 개최하고, 거기에서 에우티케스를 정통이라고 선언하는 동시에 플라비아누스를 비롯한 양성론자(兩性論者)로 지목되는 네스토리우스주의자의 주교들을 모두 면직시켰다. 테오도시우스(2세)가 죽은 후 칼케돈 공의회에서 앞서의 에페수스 공의회의 결의 및 명칭을 취소하는 사태를 빚었다.
로마에서 추방당한 네스토리우스파는 5세기경 페르시아로 망명, 그곳에 교회를 세우고 그 뒤 페르시아 사산 왕조 때 조로아스터교의 핍박을 받았으나 국왕의 비호를 받아 존속하면서 교세를 넓혔다.
7세기경, 페르시아가 이슬람교의 지배를 받게 된 후에도 네스토리우스파는 계속 남아 아라비아 북부 ·인도 ·몽골 ·중국 등지에 포교하였고, 당(唐)나라 때 중국에 들어가 경교(景敎) 피사(彼斯:페르시아) ·대진(大秦:로마)이라는 이름으로 번창하였다.
네스토리우스 그리스도교의 중국선교는 635년 태종 9년( 태종太宗:재위 626∼649)에 대진국(大秦國:로마) 사람 아라본(阿羅本) 일행이 당(唐)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에 도착하여 선교한 데서 비롯된다. 당시 동서무역로였던 비단길을 따라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들이 중국에 도착한 것은 635년, 곧 당(唐)나라 정관(貞觀) 9년이었다. 이때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였다.당 태종은 재상 방현령을 통해 네스토리우스파의 선교단을 맞이했고 장안(長安)에 머물면서 경전을 번역하도록 했다.알로펜(Alopen ; 阿羅本)을 단장으로 한 선교단은 당의 수도 장안(長安)에 도착하여 태종(太宗)의 환대를 받았다. 페르시아를 기반으로 7세기 초부터 인도와 아라비아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했고 이 물결은 비단길을 따라 중국까지 이르렀다.
이 네스토리우스파는 처음 페르시아에서 왔다 해서 페르시아의 한자음을 따 파사교(派斯敎)로 불렀으며 로마제국을 상징하는 '대진'(大秦)을 붙여 대진경교(大秦景敎)라 불리기도 했다. 경교란 '큰 종교'란 뜻이다.
명칭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781년에 건립한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에 “진상(眞常)의 도(道)는 현묘(玄妙)하여 이름짓기 어려우나 그 공용(功用)이 소창(昭彰)함을 보아 감히 경교(景敎)라고 칭한다”라고 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동시리아교회, 바벨론교회, 갈대아교회, 에뎃사교회, 네스토리우스교회, 셀루기아교회, 갈대아적 시리아교회 등으로 불리워졌다. 경교는 조로아스터교, 이슬람교(回敎)와 함께 삼이사(三夷寺)라 하여 서방에서 유입된 종교로 중국 안에서 상당한 교세로 번창하였다.
경교가 중국에 전해진 후 3년이 지난 638년에 태종의 칙령으로 국비를 들여 의녕방(義寧坊)에 대진사(大秦寺-파사사(波斯寺)란 사찰을 지어주고 경교승 21명을 배치하였다.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高宗:650-683, 재위)시대에 경교의 위치는 더욱 견고하게 되었다. "고종황제는 훌륭하게 선조를 계승하여 경교를 윤택하게 하고 모든 주(358州)에 각각 경교 사원을 세웠으며 아라본을 높여서 진국대법주(鎭國大法主)로 삼았고 경교의 법이 10道(全國)에 전파되어 국가가 부유하고 태평하였으며 경교사가 모든 성안에 가득 차서 축복이 가정에 융성했다"는 경교비문을 볼 때 당시에 경교승은 전국 각지에 보편적으로 퍼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200여 년 간(AD 600~800)네스토리우스교는 경교라 명칭하에 중국에서 상당한 교세로 발전했었다. 즉 불교와 형식과 거의 동일하게 목탁을 치며 예배를 드렸고 불경(佛經)의 형태를 빈 여러 종류의 한문 교리서를 제작하였다.
고종의 뒤를 이은 측천무후(則天武后)는 불교를 숭상하여 경교를 억압하였다. 경교는 여러 지방에서 박해를 받아 사원이 파괴되기도 하였고, 수도 장안에서 까지 경교에 대한 박해가 있었다. 현종(玄宗:712-756) 때에 경교가 가장 크게 성행하였고 사원의 이름도 대진사(大秦寺)로 개칭하였다. 숙종(肅宗:757-763)) 때 안록산의 난을 토벌할 때 경교도인 이사(伊斯)가 큰 공을 세웠고, 대종(代宗)시대에 토번(土蕃: 티베트)의 침공을 물리치는데도 이사가 혁혁한 공을 세워서 경교가 권력의 후대를 받았다.
대종의 뒤를 이은 덕종(德宗:763-779)도 경교를 숭상하였다. 이때가 당대 경교의 절정기로 경교의 선교역사와 그 상황을 요약한 대진경교류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를 덕종 2년에 건립하였다. 당나라 초기에 들어와 국왕의 보호를 받으며 융성하였던 경교는 당 말기에 이르러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정적인 계기는 845년 무종회창(武宗會昌)5년에 실시된 회창금교(會昌禁敎)이다. 회창금교로 경교 사원이 파괴되고 토지와 재산이 몰수되었으며 많은 경교승들이 환속되었다. 경교승들은 약 600 내지 700명이 환속되었다고 보여지고, 경교도는 40,000내지 70,000명이 환속하였다고 추정된다. 이 박해로 경교는 크게 타격을 입었고 궁벽한 곳으로 도피하였다. 무종이 죽고 선종(宣宗)이 즉위하여 박해가 완화되자 불교에서는 사원을 새로 중건하는 등 차츰 원상태로 회복이 쉽게 되었으나 경교는 회복의 기회를 얻고도 재기를 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879년에 일어난 황소(黃巢)의 난 때 경교도 30,000명이 학살당하였다. 그후 경교는 중국에서 끊어졌고 살아남은 경교 선교사와 신자들은 거란, 몽고, 신강,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쫓겨갔고 나머지 신자들은 신앙을 버리고 불교나 도교로 개종하였다. 200,000명을 헤아리던 경교도들은 다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리고 당 이후 중국의 변두리에 있던 경교도들은 한(漢)민족의 문화에 동화 흡수되어 경교는 소멸되고 유적으로만 남게 되었다. 후에 원(元)나라 때에 경교도들이 다시 세력을 회복하였으나 원의 멸망과 더불어 중국에서 소멸되었다.
경교는 13세기 후반에는 페르시아 등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크게 융성하였는데, 14세기에 이르러 티무르가 지배하면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아 수많은 순교자를 내고 거의 절멸하고 말았으며, 살아 남은 일부도 16세기에 로마교회에 흡수되었다. 아르메니아에 남아 있던 일부 신도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러시아를 배반하였다는 이유로 많은 희생을 당했고 나머지는 추방되었다. 극도로 미미해진 이 세력은 이라크 북부 등지에 5만 명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네스토리우스파가 경교란 이름으로 중국에 정착하여 세력을 키워가던 무렵은 우리나라가 당나라와 밀접한 교류가 있었던 삼국시대 말기에서 통일신라 초기에 이르는 시기(7~8세기)라는 점에 주목할 때 그 전래 가능성이 높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과 통일 이후에 정치, 사회,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당나라와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해마다 학승(學僧)을 당나라에 보내어 수학하게 하였고 이들이 귀국할 때에는 불경, 불상, 사리 등 불교관계 물품들과 한께 중국에서 생겨난 새로운 학문의 신경향과 사상을 들여왔다. 바로 이러한 점등을 고려할 때 당시 중국 내에서 그 위세를 크게 떨치고 있던 경교가 들어오지 않았겠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아직도 학문적인 결론을 얻지 못한 상태이지만 1928년 고구려 영토였던 압록강 연변의 만주 안산(鞍山) 지역에서 경교도들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에서 출토된 와제(瓦製) 십자가라든지, 1956년 경주에서 발굴된 십자형 돌과 마리아상 그리고 도에 십자가 등은 경교의 한국 전래 가능성을 시사해 주는 유물들이라 하겠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의 복음 접촉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개연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일부 종교 역사학자들은 통일신라시대 초기와 몽고의 침략이 끊이지 않았던 고려시대에 경교가 우리나라에 어떤 경로로든 전래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한국기독교사연구회가 1989년 펴낸 `한국기독교의 역사Ⅰ'에 의하면 영국의 여성 고고학자 고든이 이같은 가능성을 제일 먼저 제시했다.
고든은 한일합방 무렵 한국에 4년간 머물면서 불교사찰을 관찰한 뒤 경교가 한국 불교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즉 그는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의 신장과 관음상 나한상 제석천상 등에서 페르시아의 경교적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 공의회와 논쟁 그리고 교파
최초의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가 열린 325는 3+2=5=로 연상하여 외우고, 공의회를 거치면서 주요 쟁점이 되었던 논쟁과 교파를 크게 몇 가지만 정리하여 아리우스파, 네스토리우스파, 단성론 논쟁, 카타리파의 각 머리글자를 따 ‘아네단카’로 외운다.
공의회(公議會, Councils)는 전세계 가톨릭 교구 지도자나 그 위임자 및 신학자들이 모여 합법적으로 교회의 신조와 원칙에 관한 문제를 의논·정의·결정·지도·감시하는 회의로서 그리스도교의 의회집단으로 생각하면 된다.
그 기원은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공식적인 사도회의를 가졌던 데서 비롯되었는데, 초대 그리스도 교회가 형성된 후 교회는 내부의 이단설과 분열과 오류를 바로잡아야 했고, 외부의 종교·비종교적인 공격에 방어를 해야 했다. 특히 2세기부터 사도성전 원리의 정확한 해석과 성서 정전(正典)의 확립을 위해 주교들의 공동심의를 통해 다루었다. 325년 로마 제국의 전 주교들이 모인 니케아 공의회는 최초의 공적인 공의회로, 그후 1564년 교황 피우스 비오 4세 때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는 교회 전반적인 문제를 다룰 만큼 확대되며 지속되었다.
- 지금도 공의회는 사제단의 원칙에 대한 자문을 하고, 세속 안 교회의 구체적인 전례나 단식·극기·본당 활동·신심단체 등에 관한 교회적 개념을 주관하고 있다. 여기에서 토의·검토된 율령은 반드시 교황의 확인과 인가가 있어야 발표·시행될 수 있다. 가장 최근의 주목할 공의회는 교황 요한 23세의 주재하에 1961~64년 사이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가톨릭교회에 많은 변혁을 가져다 주었다.
● 아리우스파(Arianism): 4세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인한 알렉산드리아교회의 사제 아리우스의 주장을 교의로 삼는 일파다. 아리우스는, ‘성부·성자·성신(성령)의 3위격(位格)은 대등하며, 오직 성부만이 영원하다. 성자는 모든 피조물과 같이 창조되었을 뿐, 신이되 피조물과 신의 중개역할을 하고, 신이 그에게 세상을 구원하도록 선택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의 은총을 입어 하느님의 양자로 선택받은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의 주장이 성자를 반신(半神)으로 전락시켰으며, 성자만이 인간과 하느님을 화해시킬 수 있다는 구속 개념을 훼손하였다고 반박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아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배척했지만, 아리우스와 그 일파는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접근하여 재기한 다음 콘스탄티우스 2세 때 로마제국 전역을 지배할 정도로 기세를 높였다. 하지만 곧 엄격아리우스파와 반(半)아리우스파의 분열이 일어나고, 특히 361년 황제가 죽자 급속히 몰락했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는 니케아 신경(信經)을 재확인하고 아리우스파 문제에 종지부를 찍었다.
- 그후 아리우스파는 로마제국의 북방에 살던 게르만인들 사이에 널리 퍼지면서 그들의 민족 종교라고도 할 정도로 세력을 형성했다.
* 아폴리나리우스(310?~390?)는 라오디케아(지금의 시리아) 교구 주교로서 아타나시우스와도 교감이 통했으며, 반(反)아리우스파의 선봉에 섰다. 또한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강조했는데, 삼분법(三分法)을 활용하여 그리스도에게는 육체와 혼(프슈케)은 있으나, 인간의 영혼(프네우마) 대신 신의 영혼(로고스)이 깃들여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카파도키아 교부와 안티오키아 학파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불완전한 것으로 본 것이라 비판했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는 이단으로 단죄되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나중에 그리스도 단성론에의 길을 열었다.
●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ism)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의 교설을 신봉하는 그리스도교파다. 그리스도의 신격과 인격을 구별하는 그리스도 이성설(二性說)과 마리아에게는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라는 호칭을 붙일 수 없다는 주장을 했다가,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도적교회 회의)에서 이단으로 단죄된 후 네스토리우스는 면직되어 리비아로 추방당했으며,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다시 단죄되었다.
- 이후 네스토리우스는 시리아를 지나 이란에 정착했으며, 페르시아 사산 왕조 때 조로아스터교의 핍박을 받기도 했으나 황제의 보호를 받으며 교회를 세우고 세력을 넓혀 나가 424년경부터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티나, 인도 등지로 전파되었다. 7세기경 이슬람교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페르시아까지 병합하자, 네스토리우스파는 아라비아 북부·인도·몽골·중국 등지로 포교했다.
- 특히 635년 중국 당나라에 처음 선교한 후, 당시 국교이던 도교에 기대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번창하였다. 당 태종 때 기반을 잡고 현종 때 상당한 교세를 확장했으며, 이후에도 200년간 명맥을 유지하다가 무종 때 박해를 받고 쇠락했다. 특히 송나라 때 거의 절멸했고, 하지만 종교에 너그러운 몽골제국 때 다시 세력을 회복하기도 했지만 몽골 말기나 명 초 무렵 완전히 소멸되었다.
* 한국에는 하대 신라(통일신라) 때 경교 유물인 마리아상, 돌십자가, 십자무늬 장식이 발견되어 경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
- 13세기 말 페르시아를 비롯한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크게 융성하였으나, 14세기 티무르가 정복한 이후 심한 박해를 받아 수많은 순교자를 내고 거의 절멸하고 말았으며, 살아 남은 일부 세력도 16세기 로마교회에 흡수되었다. 지금은 그 세력이 극도로 약화되어 이라크 북부 등지에 수만명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 단성론 논쟁: 451년 칼케톤 신조는 삼위일체론과 기독론 논쟁의 교회적 최종안이었다. 그러나 이와 다른 의견을 가진 네스토리우스파는 로마제국의 극동지역로, 유티키스를 따르는 단성론자들은 알렉산드리아와 예루살렘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넓혀 나갔다.
- 단성론은 예수 그리스도가 신적인 성질만을 가졌을 뿐 인성은 갖고 있지 않다는 주장이다. 신성과 인성이 연합 이전에는 양성으로 존재했으나, 연합 이후에는 하나의 본성만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단죄되었으나, 기독교인들은 이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후 서로간의 치열한 세력 다툼이 벌어졌으나, 단성론자들로 인해 2년동안 추방당했던 제노가 476년 복귀하여 강경한 통합령(Edict of Reunion)을 발표하여 "현재나 또는 다른 어떤 때나 칼케톤에서든지 어떤 다른 회의에서든지 누구든지 다른 의견을 품거나 주장하는 자를 저주하되, 특별히 앞서 언급한 네스토리우스나 유티키스 그리고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저주한다"고 결정했다.
- 혼란이 이어지자 동로마제국 황제나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는 교리상의 타협을 시도하여 527년 즉위한 유스티니우스(527~565) 황제는 반칼케톤, 친단성론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553년 열린 제5차 에큐메니칼 회의에서 또다시 뒤집혀져 칼케톤신조를 그대로 인정함으로서 단성론자들이 반발했다. 또한 이 일로 로마교회와 커다란 마찰을 불러왔고, 동·서방교회의 분열의 빌미가 되었다.
- 단성론 논쟁은 단일의지론(Monothelitism)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는데, 본성도 하나이며 의지도 하나라고 보는 극단적인 단성론자들이 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지만 그의 의지나 행위 모든 것은 한 가지 관점, 즉 구주로서의 능력을 표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예수의 행동은 비록 인간적이라도 완전하고 잘못이 없으므로 그를 움직이는 힘은 유일한 하나님의 것이라 주장했다. 이에 헤라클리우스 황제(610~641)는 알렉산드리아 주교 사이러스를 통해 문서를 만들어 콘스탄티노플 주교 세르기우스 1세에게 공식 승인을 받아 동로마교회의 공식 입장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발표 후 격렬한 반대에 부닥쳤다. 이에 로마 교황 호노리우스(625~638)에게 자문을 청해 638년 칙령을 발표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의지'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단일의지론이 동·서방교회 모두에게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는 정통 교리로 굳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워낙 강한 반발에 또 직면했고, 니케아의 결정에 준해서 신성과 인성 모두를 인정하고, 의지 역시 신적 의지와 인적 의지로 나누는 것을 정통으로 가결하며 호노리우스를 파문했으며 이후의 로마 교황들은 이 교리에 대해 반대했다. 사실 단일의지론 논쟁은 원래 신학적인 것이 아니고 이집트를 동로마 제국에 묶어두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되었듯이 상황이 변하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후임 동로마 황제 콘스탄스 2세는 이슬람과의 전쟁으로 이집트를 잃자 단일의지론은 더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680~681년 열린 제6차 에큐메니칼 공의회는 물론이고 로마 교황 아가토도 로마에서 회의를 열어 단일의지론을 단죄하고 그리스도는 2개의 의지를 가지고 있음을 정통으로 확정했다. 단성론을 추종하던 이집트나 시리아가 이슬람에게 넘어간 마당에 동로마와 로마교회와의 결속에 대한 반발은 거의 없었다.
- 그러나 이 일 이후 로마교황청은 동로마가 더 의지할만한 상대가 아님을 확인하고는 10년 후 교황은 동로마에서 반포한 교리를 거부했고, 731년 성상 논쟁과 관련해서는 동로마 황제를 파문하기도 했다. 로마카톨릭 교회는 서로마가 망하고 군대가 없어 의지했지만, 자신들도 원래 같은 제국이었다고 생각했고, 동로마는 이미 약해졌고 이집트나 시리아의 힘에 의지하려는 처지에서 교리적 타협까지 시도하자 정면 반발한 것이다. 결국 로마 교황들은 군사적 보를 동로마가 아닌 프랑크 왕국에 손을 내밀어 서유럽 기독교의 독자적인 방향으로 선회한 것이다.
● 카타리파(Cathari, 카타르파, 알비주아파)는 12~13세기 유럽에서 위세를 떨친 그리스도교 이단이다. 청정무구를 뜻하는 말처럼 물질을 악의 근원이라며 신과 대립시키는 이원론과 육식·결혼생활·재산사유 등을 부정하는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주장했다.
- 11세기 후반 불가리아의 보고밀파로부터 영향을 받은 소종파가 남유럽에 등장하는데, 특히 1140년부터 30년동안 교세가 급속히 확장되어 라인란트, 남북 프랑스, 북이탈리아에까지 퍼지면서 12세기 말에는 11주교구가 개설되었다. 로마 교회는 이를 이단으로 단죄하고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1181∼1229년 3차례에 걸쳐 십자군을 파견해 토벌했다. 그러나 당시 십자군은 정치에 이용당한데다 그 잔혹성으로 두고두고 오명을 남기게 되었다. 어쨌든 카타리파는 이때부터 와해되어 15세기 초 완전히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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