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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선 목사,불국사에서 기독교 보물 발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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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巡禮者 2012. 4. 12.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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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선 목사, 불국사에서 기독교 보물 발견하다  
    
                                                                                         성기문 (말씀발전소 대표)   
 
                                                   
  

       ▲ 한국기독교박물관. (사진제공 성기문)  
 
   오늘의 이야기는 숭실대학교에 있는 한국기독교박물관에서 시작하고자 한다. 이 박물관은 숭실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던 김양선 목사(1907~1970)가 그동안 사재를 털어서 1967년 7월 21일에 개관했다. 그곳에는 한국기독교와 관련된 역사적 자료들(주로 경교·실학·천주교·신교·개화사들을 포함하는 한국기독교사 전반에 걸친 귀중한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 김양선 목사 동상. (사진제공 성기문)  
 

   그 박물관이 개관할 때 김양선 목사가 설립자 겸 초대 관장으로 취임하였다. 김양선 목사는 일제시대에 항일운동을 하고 투옥을 당했던 신앙인이다. 김 목사는 1956년 <한국기독교 해방 10년사>에서 해방 이후에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취소 결의 어디에서도 진정한 참회와 고백을 찾을 수가 없다는 비판을 하였다. 1958년 제43차 장로교 총회에서는 그의 책이 교단을 모독했다며 출판금지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김 목사는 한국교회의 친일 청산 부재에 대한 비판을 한 기독교 역사학자로도 유명하다.


   경주 혹은 불국사에서 발견한 보물들


   사실 김양선 목사가 없었다면 나와 같은 기독교인들이 잠시 동안이라도 경교가 신라시대에 전래된 가능성 때문에 흥분과 설렘의 나날을 보낼 수 있었겠는가. 기독교가 한반도에 1000여 년 전에 이미 전래가 되었다니! 비록 이러한 흥분이 단지 젊은 날의 호기심으로 그치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러한 상황 속에서 내가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에 아주 놀라운 이미지 파일을 발견했다. 그 제목도 가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신라시대 기독교의 전래의 증거!’ 클릭을 해보니 얼마 전에 성황리에 끝난 KBS 역사드라마 <장보고>의 드라마의 전투 씬 중에서 염장과 한 병사가 싸우고 있는 장면이 캡처되어 있었다. 그 사진을 자세히 보니 한 병사가 목에 십자가를 걸고 있었다! 이러한 확실한 증거가 있다니. 신라시대에 기독교가 전래되었다는 전설이 사실이다니!

                                        
    

          ▲ 역사드라마 <장보고>. 병사의 목에 십자가 목걸이가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 증거는 픽션이고 기껏해야 ‘옥의 티’의 항목에 들어갈 일이지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역사적인 발견은 아니다.


   김양선 목사가 경주 혹은 불국사에서 귀한 보물들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김양선 목사는 주말에 숭실대학교 사학과 학생들과 전국 각지에 탐사 여행을 다녔다고 한다. 그는 경주 말고도 많은 곳을 답사하였고 유물을 발굴하였다.


   그러다가 그가 1956년에 경주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경교 유물로 여겨지는 몇 가지 귀중한 보물들(돌십자가, 동으로 만들어진 십자무늬장식 2개, 마리아상)을 손에 넣게 되었다.

                                                            


            ▲ 정교철제십자가. (사진제공 한국기독교박물관)    
 

   그리고 10년 후에 이러한 유물들과 여러 가지 방증과 몇 가지 역사적인 증거(통일신라시대의 능묘제도의 호석이 부조된 십이지상, 능묘 앞에 배치된 페르시아 무인상, 석굴암 전실양벽에 부조된 팔부신장 중 두개의 조상이 페르시아 무인상으로 되어 있는 것, 석굴 내벽에 부조되어 있는 십일면관음상, 십나한상 범천 및 제석천상의 의문[衣紋]과 샌들, 손에 든 유리관 등)에 근거하여 김양선 목사는 통일신라 시대에 경교가 전래되었음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서 김양선 목사는 대한불교조계종과 사학계와 심지어 일부 기독교계의 극심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 다음은 그와 관련된 <동아일보> 기사다.(1967년 8월 12일자, 5면)

                                                 
   

               ▲ <동아일보> 기사. (사진제공 성기문)  
 

   다음은 기사의 일부를 독자들을 위해서 적어보았다.


   “景敎傳來의 核心인 物的資料는 그가 慶州에서 수집했다는 銅十字架와 마리아 像과 함께 佛國寺에서 얻은 石十字架. 1956년 암석위에 나타난 걸 주워 감정한 石十字架는 浮*塔과 石質이 같고 腐蝕度가 같다는데서 30년간 고고학에 종사한 그의 확신으로 羅代의 것으로 주장한다.”(주: *자는 식별이 안 됨)

   ◀ 마리아관음상. (사진제공 한국기독교박물관)  


   그런데 문제는 이 유물들의 역사적 가치를 지지해 줄 만한 근거, 즉 이 유물들이 언제, 어디서, 어떤 경로로 발견되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김 목사와 함께 발굴에 참여했던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그 돌십자가가 불국사의 우물터에서 발굴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김 목사가 어떻게 그러한 유물들을 발견하였는지를 기록한 문서는 김양선 목사 자신이 없애버렸다는 이야기만 들을 수 있었다. 사실 한국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증거인 유물에 대한 발굴 경위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며 이상한 일이다. 이와 관련된 진실을 알았으면 한다.


   경교가 당태종 9년(635년)에 하나의 공인된 종교로 받아들여졌는데, 그 때는 신라 선덕여왕시대며 고구려 영류왕 시대며 백제 무왕 시대였다. 이로부터 100여 년 후인 신라 경덕왕 10년(서기 751년)에 불국사가 창건이 되었다. 이 시기는 당 현종 때(712~756)다. 그 경내에서 경교 유물이 발견된 것이니 얼마나 놀랍고 충격적인 일이었을까. 그 이후로 이 일은 기독교인들에게는 꿈같은 사실(?)로, 불교도들의 경우에는 기분이 매우 나쁜 주장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한국 기독교사 연구>에서 밝혔듯이 경주에서 발견된 유물이 “불교에 흡수된 기독교 유물로 생각된다”는 김양선 목사의 말은 무슨 의미일까? 말 그대로 불교와 유사한 형태로 제시된 기독교 유물이라는 의미일까? 지금도 숭실대학교의 한국기독교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는 유물들이 통일신라 시대의 것이라는 증거는 너무 박약하다. 당시의 불교도들이나 고고학자들의 견해처럼 일반적인 고대 형태로써의 십자가와 유사하지만 기독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유물들일 수도 있다. 신라 시대에 경교가 전래되어 왜곡되었다는 말인가, 신라 불교가 경교의 형식을 흡수하였다는 말인가, 어떠한 이유로 불국사나 경주에 그러한 유물들이 선물이나 기념물 등의 형식으로 존재하게 되었는가는 아직도 쉽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유사한 유물들이 여러 개 국내에서 발견된다든지, 신라에 이러한 유물들의 존재를 입증 혹은 방증해줄 만한 문헌들이 발견된다든지, 삼국 시대(혹은 남북조시대)에 특별히 신라에 경교가 전래되거나 영향을 주었다는 더 명확한 증거들이 발견되기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 일본 마리아관음상. (사진제공 성기문)  
 

   마리아 관음상, 성모상의 정체에 대한 논란


   십자가 형태로 생긴 유물들이 기독교의 유물이거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본다. 한반도 내에서만 문제지 중국과 만주 지역, 그리고 일본에서 무수한 십자가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위 마리아 관(세)음상이라고 불리는 소상(小像)의 경우에는 어떤가? 사실 이것은 마리아관음상이나 성모상보다는 한 여인이 아이를 안고 있다는 점에서 성모자상이라고 불러야 더 합당할 것이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그 이후로 오랫동안 더 자세한 연구가 진행되지 못했다. 사실 이 소상은 불교의 관음상(觀音像)으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많다(이와 관련해서 지나가는 이야기지만, 초기에 관음상은 남성으로 묘사되었는데, 언제 무슨 이유로 여성으로 묘사되기 시작하였는가에 의문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관음보살의 여성화를 인도의 시바 등의 여신의 영향이라고 보는데 과연 그럴까라는 의문이 든다).


   소위 성모자상의 문제는 그것이 불교의 관음상처럼 생기지 않았다는 점이며 관음상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형태인, 어린아이를 안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에 남아있는 기독교적인 측면에서 이와 유사한 형태는 일본에서 발견되는데, 1638년 이후에 기독교에 대한 박해시대에 천주교인들(카쿠레 크리시탄)이 감시의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서 관음상과 같이 생긴 성모자상을 만들고 관음상인 것처럼 사람들을 속였다고 한다. 이는 비밀리에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하였던 성모관음상(Maria Kannon)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경주에서 발견된 성모관음상과 일본에서 많이 만들어진 성모관음상은 1000년 가까운 시간적인 간격이 존재한다. 

 

 ◀ 돌십자가. (사진제공 한국기독교박물관) 


   그러나 신라에 경교의 전래의 증거가 박약하다는 것이 한반도에 경교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되지 못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자료를 여전히 찾으며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사실 당나라 시대에 경교가 한반도에 전래되었을 가능성에 대한 여전히 간접적인 증거는 있다. 삼국 시대를 지나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후에 성립된 신라와 발해의 남북조 시대에 발해의 고토에서 발견된 경교 유물들은 이 시대에 이미 경교가 한반도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을 시사해준다. 특히 솔빈부 아브리코스 절터에서 십자가가 출토되었다.동경 용원부가 있었던 현재의 중국 훈춘의 한 사찰에서 발견된 십자가를 목에 걸고 있는 형태의 삼존불상(三尊佛像)의 존재도 그러한 가능성의 증거로 이해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이 삼존불상의 경우에는 일제가 만주(괴뢰)국을 세우고 중국을 지배하던 시기에 불상 자체가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고 한다. 현재 훈춘의 박물관에는 그 사진만이 진열되어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 훈춘 삼존물. (사진제공 성기문)   
  (2006. 8. 26. 뉴스앤조이)

 

박물관 실내, 경교 부분 전시물, 돌십자가, 경교성서, 십자무늬장식, 금강산 경교유행중국비 탁본, 마리아상등이 진열되어 있다.

 

경교해설서(안내책자)
 
박물관 경교 해설도, 경교의 십자가 유물들과 대전경교유행중국비의 모습이 소개되고 있다.
 

경교 돌 십자가(nestorian stone cross), 24.5x 24.0x 9.0cm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주후8-9세기)  것으로 추정된다. 이 유물은 경교(중국 당나라)가  신라를 통해 한국에 전래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 이론을 뒷밭침하고 있다.  평면은 십자가형이고, 단면은 사다리꼴로 앞면보다 뒷면의 폭이 넓은 점이 특징이다.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된 돌 십자가(24.5cm*24cm*9cm)

 

1956년 한창 경주에서는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교의 영향을 받았던 신라시대의 많은 유물들 중에 느닷없이 불국사에서 쟁반만한 돌 십자가가 발견된 것입니다.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가 어떻게 천 년 전 신라인들의 유적들 속에 포함되어 있을까?’, ‘삼국시대부터 이 땅에 기독교가 전파되어 있었던 것일까?’ ... 등의 수많은 궁금증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답을 경교의 전파에서 찾으려고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경교(景敎)는 기독교종파 중의 하나인 네스토리우스파가 중국에 전래된 뒤 붙여진 이름입니다.

주후 431년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타노플의 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Nestorius)는 에베소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어 로마영토 밖으로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이때 네스토리우스를 추종하던 그의 제자들이 시리아를 거쳐 페르시아(현재 이란)에 정착해 신학교를 세우는 등 교세를 확장하게 됩니다. 그 후 네스토리우스파는 계속해서 동방으로 진출하게 되어 인도를 거쳐 중국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네스토리우스파가 중국에 온 것은 주후 635년, 당 태종은 이들을 환대하고 경전을 번역할 수 있도록 하고 장안(현재 서안)에 파사사(波斯寺: 당시 교회를 寺로 표시하였음)라는 사원을 세울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처음에 당나라에서는 이들이 페르시아에서 왔다고 파사교(派斯敎)라고 하였는데, 정작 로마에서 온 것을 알게 된 뒤로 로마라는 한자를 따라 대진교(大秦敎)라 부르게 됩니다. 대진교라는 이름과 함께 ‘빛을 비추는 종교’라는 뜻으로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게 되는데, 경교는 당나라 황실의 보호와 지원을 받아 중국에서 급속도로 전파되게 됩니다. 중국 전국에 경교 사원이 세워지고, 한자로 된 성경이 번역됩니다. 그러나 경교는 중국에서 845년까지 번창하다가 도교가 세력을 얻게 되면서 번성기에 20만 명에 이르던 경교를 따르던 신자들은 변방으로 흩어지거나 소멸되어 버리게 됩니다.

 

경교가 당나라에서 활발하게 전파되고 있을 무렵이 바로 우리민족에게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해가던 때였습니다. 신라는 당나라와 정치, 문화, 사회 등의 많은 부분에서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교류를 하고 있었기에 아마도 경주에서 발견된 돌 십자가는 당나라에서 소개된 경교의 영향을 받은 흔적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를 안고 있는 관음보살상 - 마치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것과 흡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돌 십자가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관음보살상에서는 기독교의 이콘화에서 볼 수 있는 마리아가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을 느낄 수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지금까지 신라의 불교문화에서는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신라 불교와 중국 경교의 문화가 함께 어우러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십자가무늬 장식품들 역시 중국 당나라 경교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십자가와 비교해보면 원형과 십자가 형태가 함께 섞여 있는 장식품들이 경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중국 당나라시대 불교와 기독교가 혼합된 경교 십자가

 

 

신라시대에 당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중국에 전파된 경교를 접했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당나라에 가서 직접 페르시아나 로마의 문화와 함께 기독교를 경험했던 사람들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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