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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2주일-부활에 대한 토론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0. 7. 30.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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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2주일-부활에 대한 토론

발행일 : 2004-11-07 [제2422호]

“궤변과 억지논리, 더 큰 불행 가져와”

개인이 불안을 극복하고 불안에 압도되지 않도록 자아를 보호하는 일을 돕는 자아방어기제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합리화라는 방어기제입니다.

이는 타당한 이유들을 조작하는 경우로서 이러한 합리화는 특정 행동을 정당화하는데 도움을 주며 실망과 연관된 충격을 경감시키는데 도움을 줍니다. 예를 들면 자신이 지원한 일자리를 얻지 못하면 왜 성공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논리적인 이유를 생각하고, 나아가 실제로는 그 자리를 원하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확신시키면서 자신의 불안을 극복하려는 태도입니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정상적인 행동으로 볼 수도 있고 나름대로 적응적 가치도 가지고 있습니다만 분명한 사실은 「현실을 직면하지 않기 위해 이러한 방어기제를 과도하게 사용한다면」 이는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에 대한 논쟁입니다. 부활이 없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수혼법(형이 자녀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아 형의 대를 있는 결혼법)을 예로 들면서 부활이 없다는 논리를 증명하려 하자, 이에 대해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출애굽기에 나오는 하느님의 호칭으로 부활을 증명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부활 논쟁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두가이파의 등장 배경은 이렇습니다. 기원전 152년경 요나탄이라는 인물이 왕권과 대제관직까지 겸임하자 소수의 「경건한 사람들」이 반기를 듭니다. 이들 중 평신도들이 중심이 된 집단이 너무나 유명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고, 일부 제관들이 주축이 되어 형성한 집단이 신자들에게는 조금은 생소한 단어이지만 「에세느파」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비해 「대다수의 제관들과 예루살렘 유지」들은 정권에 동조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오늘 성서에 등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이들은 정권에 기생하는 기회주의적 입장을 취했고, 종교적으로는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현실론자들이 바로 사두가이파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모세오경만을 성서로 인정하고 있었고, 부활을 부정할 뿐 아니라 천사의 존재도 부정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오직 현실적인 것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고, 이러한 자신들의 삶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라도 그 근거가 되는 부활이 없다는 사실을 믿고 싶었던 이들이 바로 이들입니다.때문에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하는 질문의 의미는 때로는 양심에서 들려오는 소리, 불안한 자신들의 삶의 토대를 예수님으로부터 확인하고 싶은 욕구도 함께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든 이러한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의 답변은 저 세상에는 결혼도 없고, 죽음이 없는 영원한 삶이 주어지리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이야기하자면 너희들은 「이승의 현실」을 삶의 토대로 삼고 그 삶이 모든 것인 양 살아가지만 「저 세상」이라는 것은 분명히 있다는 사실, 그리고 저 세상은 이승의 단순한 연장이 아니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세계이기에, 저 세상은 이 세상의 논리나 이성의 논리만으로는 완전히 파악할 수 없기에 세상의 논리로 저 세상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과 모세의 말씀 안에 있는 정신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현대의 특징 중 하나는 현세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우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인들의 삶은 뭔가 모르는 불안과 허무감에 빠지게 되고 이러한 허무함과 불안을 채우기 위해 현대인들은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의 가치를 옹호하면서 자신의 불안과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이러한 태도를 합리화하는 것이 현대인들의 단면입니다.

물론 이러한 태도가 현재의 과학적이고 물질적인 발전을 가져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인간의 삶에는 이러한 과학과 물질의 영역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과, 자신들의 삶의 태도와 자신의 논리를 합리화하기 위해 그럴싸한 억지논리를 계발하는 것은 인간의 삶을 한쪽으로만 치우치게 만들어 더 큰 불행과 허무함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정치 창피합니다. 사실 이들이 주장하는 반대의 논리는 나름대로 타당성도 있고 합리적인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합리적인 반면 그 이면에는 「불안한 자신들의 지지기반」 그리고 「자신들의 잘못된 삶의 합리화」라는 본능적이고 저질스런 욕심이 자리 잡고 있기에 이러한 결과를 낳은 것이고, 이러한 모습은 크기의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모든 이들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오늘 복음을 보면서 묵상할 사실은 욕심과 자존심 때문에 더욱더 궤변과 억지논리로 자신을 지지하고자 하는 우리의 무의식적 본능을 반성함이 그 교훈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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