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우리 자신부터 복음화하자”
「적이 사라진 시대의 증후군」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탈냉전 시대에 찾아온 몸살과 같은 혼돈을 말합니다. 이 이론을 내놓은 올리히 백에 의하면 냉전의 논리가 지배했을 때 서유럽은 평온했다는 것입니다. 공산독재라는 적의 존재가 분명했고 적과 맞서기 위해 요구된 내부의 통제가 외견상 질서의 모습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산독재라는 「분명한 외부의 적」이 사라지면서 냉전의 시대가 종식되자 이제는 인종과 지역 종교 등과 관련된 내부의 분쟁들이 오히려 더 혼돈적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서유럽의 국가들은 이러한 혼돈을 극복하기 위해 사라진 적을 대신할 만한 새로운 적을 찾아 나서는 역설적인 상황과 맞닥뜨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모습은 유럽만의 상황뿐 아니라 우리 개인 안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적을 만들어내는 이러한 사고방식, 즉, 한 집단과 자기 자신만의 가면적인 삶의 의미를 가지기 위하여 끊임없이 대립적인 상황을 고착화 시키고자 하는 노력은 본능의 자연적인 모습으로 돌릴 수도 있습니다만 그 같은 모습은 변화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성숙을 방해할 수 있기에 힘들지만 포용과 조화의 지혜를 배울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면서 전교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교회가 전교주일을 지내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신자들의 본연의 사명인 선교의식을 일깨우고 전교 사업에 종사하는 선교사나 전교 지역의 교회를 정신적 물질적으로 돕고자 함입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교회에서는 「선교」라는 말은 굉장히 생소한 단어였고, 「선교사」하면 개신교에서만 사용하는 용어 정도로 이해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더 이상 반대만 하는 운동권 정신으로 유지되던 선교의 시기가 지나 예비신자의 급속한 감소와 함께 쉬는 교우의 증가 문제가 대두되자 교회는 위기감 속에서 선교 문제를 뒤돌아 볼 수밖에 없었고 새로운 선교 대책을 강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아직도 타 교회에 비하면 신자들의 의식과 열성, 교회의 선교에 대한 마인드와 예산 문제 등 모든 면에서 뒤쳐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선교 사명」을 교회의 근본 사명으로 재인식하게 되었다는 사실과 그리고 선교사명의 반성을 통해 「복음화」의 개념을 재정립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커다란 의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갈릴래아에서의 발현사화로써 복음서의 대미를 장식하는 부분입니다. 내용은 만민에게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가르치라는 내용입니다.
여기에는 복잡한 신학 언어들이 포함되어 있기에 해설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만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세례 베품과 예수님 계명 선포를 통해 「이 세상 모든 민족」을 예수님의 가르침 아래 하나로 묶는 단일한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라는 내용입니다.
물론 이 말씀에 대해 여러 가지 이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의 계명이 우선되는 공동체의 건설은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으뜸 사명이 되는 것이고, 아마 오늘 교회가 전교 주일을 지내면서 선교 의식을 재확인 하는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과 함께 생각해보아야 할 점은 복음화의 사명은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이 아니라 사람과 환경의 조화 속에서 완성될 수 있는 사명이라는 사실입니다. 평신도 교령 5항에 보면 『그리스도의 구원 성업은 본래 사람들을 구원할 목적을 가졌지만 현세 질서를 개선하려는 목적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교회의 사명도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의 은총을 사람들에게 전할뿐 아니라 현세 질서에 복음 정신을 침투시켜 현세 질서를 완성하는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는 것처럼 생활환경을 복음으로 변화시켜는 활동도 복음화의 중요한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계획에 반대되는 인간의 판단 기준과 가치관, 사상과 생활양식을 바로잡고, 복음의 근본정신이 각 민족 문화의 근원에까지 생명력 있게 스며들 때 복음화의 사명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과거의 포교 사업처럼 복음화의 대상이 되는 환경과 사람들을 적대시하는 우리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착은 안된다는 사실과 복음화의 대상에서 우리 교회와 우리 자신을 우선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칫 선교의 대상에서 교회와 교회안의 문제를 배제할 때 복음화는 단지 「변화의 두려움을 피하기 위한 수단 내지 다원화 사회안에서 자기 정당성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쓰여 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러한 선교 사업은 단순한 집단 이기심의 발로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