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이마신 공기 한 모금도 가졌던 것 버릴 줄 모르면 그게 곧 저승 가는 것인 줄 뻔히 알면서 어찌 그렇게 모두 다 내 것인 양 움켜쥐려고만 하시는가?”
서산대사의 시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숨을 들이마시고 또 내뱉고 있지만 사실 들이마신 숨, 곧 가졌던 것을 버리지 못하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돈을 주고 사지 않은 공기인데도 못 버리면 죽음인데, 우리가 아끼는 것은 물론 마음속 깊이 감추어온 것을 버리지 못하면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이 따라온다는 뜻이겠지요? 그렇다면 반대로 그런 것을 놓아버리면 새 삶을 얻는다는 뜻으로 생각해도 좋을 듯합니다.
그런데 숨을 쉬는 동안에 일어나는 화학반응을 보면, 산소야말로 자신이 가져야 할 때와 버려야 할 때를 얼마나 절묘하게 아는지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산소는 어떻게 운반될까요?
사람이 숨을 쉬게 되면 폐로 들어간 공기는 몸속의 조직에 있는 모세혈관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체내에는 산소가 몸속의 물질과 반응하여 만들어낸 이산화탄소 같은 기체도 존재합니다. 그리하여 숨을 쉴 때는 폐 속의 산소 압력이 혈액의 산소 압력보다 크기 때문에 산소가 폐에서 혈관으로 들어갑니다.
반대로 숨을 내쉴 때는 혈액 가운데 이산화탄소의 압력이 높아져 있어 이산화탄소가 폐를 통해 나가게 됩니다. 한편 산소를 받은 혈액은 몸속의 다른 조직으로 산소를 운반해 줍니다.
포유동물이나 사람 몸에서 산소를 운반하는 주체는 혈액 속에 있는 헤모글로빈이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헤모글로빈에 포함된 철(鐵)입니다. 곧 숨을 들이쉬어 헤모글로빈의 철과 결합했던 산소가 혈관을 통해 모든 조직에 들어가서 철로부터 떨어져나가기에 운반이 가능하게 됩니다.
참고로 조직에서 압력이 높아진 이산화탄소는 그 속의 물과 반응하여 산성을 띠는 탄산이 되고, 산소는 산성도가 높은 곳에서 철과의 결합이 더 잘 끊어집니다. 그리고 이산화탄소는 다시 혈장 속에 녹아 폐로 운반되어 호흡으로 방출되면 산성도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서 헤모글로빈은 산소와 결합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산소가 부족한 곳에서는 산소와 철 사이의 결합이 끊어짐으로써 자신을 전달해 주고, 많은 곳에서는 결합한 채로 존재합니다.
이는 산소가 철과의 결합력이 약해서, 자신이 원해서라기보다는 주위의 요구에 따라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는 확실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아야 할 자리에서는 훌훌 털고 떠나감으로써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살아가려면 이렇게 붙들고 있던 것을 놓아버리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신기한 것은 우리의 몸 밖에서는 철과 산소가 결합하면 저절로 끊어지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체내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우리는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께 머리를 숙여 감사드려야 할 뿐 아니라 그렇게 살라는 말씀으로 알아듣기도 해야겠습니다.
여러분은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죽음을 맞는 경우를 많이 보셨지요? 그 성분인 일산화탄소는 철과의 결합력이 산소에 비해 200배 정도 크기 때문에 한 번 결합하면 여간해선 끊어지지 않아 산소와 결합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여 생명을 앗아가게 됩니다. 상황에 따라 떠날 줄 아는 성질을 가진 산소가 우리를 살리는 반면, 집착하는 일산화탄소가 우리를 죽이는 현상은 우리의 삶에도 많은 말을 하는 것 같지요?
죽음 - 모든 것을 내어놓는 과정
살아가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우리의 가장 최후의 순간인 죽음을 앞둔 순간이야말로 모든 것을 내어놓는 과정이 필요하리라는 것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느끼게 됩니다.
죽음이 가까워온 환자가 원기를 되찾고 마치 회복된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대략 하루 정도인데 이를 반조(返照) 현상이라 합니다. 이때는 죽음 직전에 반짝이는 의식 속에서 그동안 살아왔던 자신을 총정리하면서 자연과의 일치, 자기 자신과의 화해 그리고 다른 이와의 화해라는 인생 최후의 작업을 하는 중요한 순간입니다.
스즈키 히데코 수녀는 많은 환자들과 반조의 빛 속에 함께했던 체험담을 「가장 아름다운 이별 이야기」에서 쓰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겉보기에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다가 서른네 살에 암으로 죽어가던 한 젊은 수녀가 마음의 어두움에 대하여 털어놓은 이야기가 유독 제게 와닿습니다.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만난 나이 많은 원장수녀는 표면적으로는 너그러운 분이었지만 아무도 모르게 그 수녀를 학대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마음에 어두움이 들어왔습니다. 이 어두움은 신앙을 가진 이가 그 신앙을 믿을 수 없게 되고 빛을 찾아낼 수 없는 고통을 비유한 것입니다.
아이티로 떠난 뒤 원장수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과 함께 그분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생명 그 자체로 보였던 젊은 수녀에 대한 질투심 때문이었다고 뉘우치며 감사하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그녀를 괴롭힘으로써 살아갈 힘을 얻었고, 속에 있던 악을 밖으로 뱉어낼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젊은 수녀라는 존재가 마냥 받아주는 사람의 역할을 다해주었고, 그 모습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해 주시려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라 했지요. 그리고 젊은 수녀는 자신이 암에 걸려 절망의 심연에 이르렀을 때에야 자기를 학대한 원장수녀의 심정을 절절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당신이 제 독기를 받아주었기에 정화되어 편안히 죽을 수 있다.”고 한 원장수녀의 말씀대로 자신도 임종 때에 정화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으며 떠나가고 싶다고 말하는 그녀의 표정에는 평화와 깊은 고요함이 깃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추하고 비뚤어진 근성을 깨닫고, 그것을 내어놓는 용기는 부활 전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고난과 같이 죽음을 넘어서서 영원으로 나아가는 과월(過越)의 과정이라면서. 그러고 보면, 원장수녀가 임종 직전에 젊은 수녀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이 지난날 저지른 죄에 대한 고백을 한 것은 젊은 수녀를 영적으로 살리는 행위였을 것입니다.
그 고백을 통해 젊은 수녀는, 자기 인생에서 원장수녀에게 학대를 받았던 시절이야말로 예수님의 삶을 살았던 빛의 시절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이 때문에 ‘신앙에 대한 회의’라는 어두움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게 되었으니까요. 이러한 모습은 바로 산소의 놓아버림이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는 과정과 참 많이 닮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저도 겉으로는 충실한 신앙인인 것 같지만 아직도 자주 남을 판단하고 용서하지 못하여 마음속에 짙은 어두움이 깔려있습니다.
죽음을 묵상하는 이 위령성월에, 저도 성령의 은총으로 이다지도 끈질긴 집착의 어두움을 놓아버리고 영원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황영애 에스텔 - 이학박사(미국 오하이오주립대 화학과). 상명대학교 교수이며 저서로 「화학에서 인생을 배우다」(2010, 더숲)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