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에게 길을 묻다] 우리 가족은 어떤 결합을 하고 있습니까?
황영애
결혼을 앞둔 연인들은 불행한 결혼이란 남의 일이지 자신에게만큼은 절대로 닥치지 않을 거라 믿습니다. 배우자는 지금처럼 언제나 내 말을 잘 들어줄 것이고, 아기를 낳으면 둘이 함께 사랑을 듬뿍 주고 키울 거라며 행복한 가정만을 꿈꾸지요. 비록 본인들이 자랄 때는 티격태격하는 부모 사이에서 상처를 받으며 아픈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해도 자기는 결코 그런 삶을 꾸려가지 않을 거라며 내심 자신감도 가집니다.
그러나 결혼하고 나서의 삶이 과연 그런지요? 당황스러우리만치 여러 방면에서 문제가 터집니다. 그때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두 사람의 성격 차이가 보이기 시작하고, 양쪽 부모님이나 친척들과의 마찰도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 스트레스를 죄없고 힘없는 아이에게 풀기 시작합니다.
‘어, 이게 아닌데!’ 하고 돌아보면 예전에 보아온 부모님의 생활 양상과 별로 다르지 않은 삶을 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 대부분은 결혼하기 전까지 좋은 학벌이나 직업, ‘스펙’을 얻으려고 어려서부터 전력 질주해 왔습니다. 그 노력을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세상의 밝고 아름다운 모습을 선사하는 부모가 되는 데 조금이나마 나누어 기울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왜냐하면 부부가 불화하여 이혼 직전이 되거나, 그동안 잘 지내온 것 같았던 자녀들이 어느 날 갑자기, 그때까지 부모에게서 받았던 상처를 들먹이면서 부모를 원망하며 울부짖는 때에 이르러서야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은 적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회복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고 생각되는 때에.
자식 또한 제 부모처럼 살지 않겠다고 선언해 왔건만 결혼하면 다시 그의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면서 그 생활 양상의 대물림은 끝없이 이어집니다. 이런 대물림은 과연 끊어질 수 있을까요?
공유결합과 이온 결합
물질세계에서 화합물이 만들어지려면 원자 간의 결합이 필요합니다. 그 결합은 마치 인간이 사회나 가정에서 이루는 관계와 비슷해 보입니다. 그중에서 공유결합은 부부간, 이온 결합은 부모 자식 간의 관계와 닮기도 했고 또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어 이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두 개 이상의 원자들이 서로 결합하면 분자를 형성합니다. 그런데 한 분자 내에서 종류가 다른 두 개의 원자가 결합할 때 원자들 사이에는 전자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힘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이 힘을 전기음성도라 하는데 같은 종류의 원자들은 전자쌍이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무극성 공유결합화합물(H2)을, 힘의 차이가 좀 커지면 극성 공유결합화합물(HCl)을, 차이가 아주 크면 이온 결합화합물(NaCl)을 만듭니다.
공유결합은 가장 간단한 수소 분자로부터 유기화합물, DNA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결합입니다. 공유결합은 마치 남자와 여자가 서로 평등하게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 공유결합은 물이나 다른 용매에 들어가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고 그들이 처음에 했던 결심이나 결정이 비록 나쁜 결과를 낳게 되었더라도, 상대방의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다며 함께 겪어내는 모습입니다. 상대방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섭섭함보다는 고마움을 발견하며 서로 다독이며 노년까지 함께 하는 그런 모습도 보입니다.
한편, 이온 결합에서는 한 원자는 전자를 내어주어 양전기를 띠고 다른 쪽은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여 음전기를 띠게 됩니다. 그들 사이에는 정전기적 인력이 작용하므로 공유결합보다 더 강합니다. 우리 생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이온 결합화합물에는 염화칼슘(CaCl2)이나 소금(NaCl)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렇게 강한 결합을 하고 있었지만 이들이 물에 들어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그 결합이 끊어져서 양이온과 음이온으로 각각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소금의 화학식은 NaCl이지만 물속에 들어가면 Na+ 이온과 Cl- 이온으로 분리됩니다.
이는 마치 부모는 자녀가 성인이 된 세상에서는 양이온이 되어 아무런 미련 없이 음이온의 자녀들을 떠나보내야 된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부모에게 기대지도 말고 자식에게 집착하지도 말라는 뜻이지요.
상대방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신뢰하라
공유결합이나 이온 결합 모두 상대방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신뢰하라는 것 같지요. 그렇지만 이미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족 간에 상처를 깊이 주고받은 뒤라면 어찌해야 할까요?
공유결합을 제대로 못하는 배우자로부터의 상처도 고통스럽지만 이온 결합이 제대로 안 된 부모나 자녀로부터의 상처는 뿌리가 송두리째 흔들려서 정체성까지 잃을 정도이니 훨씬 더 고통스럽습니다. 그리고 정상적인 부모 밑에서 자랐을 때 부부 사이가 원만하기 쉬우니 이 두 관계들은 서로 떼려야 뗄 수가 없습니다.
다음은 안셀름 그륀 신부님과 마리아 로벤 공저 “어린 시절 상처 치유하기”에서 하혈하는 여인과 야이로의 딸에 대한 치유(마르 5,21-45 참조) 내용을 참조한 글입니다.
옷자락을 잡을 권리
아버지에게서 받은 상처 때문에 고통스러운 한 여성은 남편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그의 소망을 모두 들어주어야만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녀는 점점 더 무기력해져만 갔습니다. 성경의 하혈하는 여인처럼 자기가 가진 피를 모두 쏟아버린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무언가를 주어야만 인정을 받는다고 생각하기에 남을 위해 과도한 희생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원한 만큼 인정을 받지는 못하고 허망함만이 남게 됩니다.
여기서 치유의 첫 단계는 자신을 내어주는 일을 그만두는 데서 시작됩니다. 남들로부터 무엇이든 받기 시작해야 합니다. 하혈하던 여인이 한 행동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녀의 하혈은 멈추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고 있는 사랑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모두 부모님이나 배우자의 옷자락을 잡을 권리가 있습니다. 자신이 충분히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랑을 받아들일 때 공허하게 느껴지는 삶의 종지부를 찍으며 부부간의 아름다운 공유결합이 이루어집니다.
믿기만 하여라
한편,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아버지의 과대한 걱정과 관심 때문에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치유의 첫 번째 단계로 아버지를 비난하지 않은 채 그가 갖고 있는 걱정을 직시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야만 그 걱정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게 되어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믿기만 하여라!” 하시면서 그의 딸이 모든 위기를 뚫고 나와 자신의 길을 찾게 될 것을 굳게 믿어야만 한다고 하셨습니다. 걱정 때문에 딸을 구속할수록 딸은 살아나지 못하기에 그 딸이 자신의 모든 것을 꽃피울 수 있도록 신뢰의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일어나라!” 하시어 그녀의 내면에서 자기 스스로를 돕게 하는 용기를 일깨워내셨습니다. 이로써 아버지와 딸 사이에는 빛나는 이온 결합이 완성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어린 시절에 겪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부모나 남을 탓하기보다는 성경을 묵상하면서 그 상처를 직시하고 이해해야겠습니다.
예수님께 의탁할 때라야 그 상처를 이해할 수 있고, 자신의 내부에서 치유의 힘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치유할 수 있으면 남의 치유도 가능해지므로 그때 우리의 삶은 나와 타인을 위한 축복의 샘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가족들 간에 평등의 공유결합과 신뢰의 이온 결합이 이루어지게 되어 상처로 얼룩진 삶의 대물림은 끊어질 수 있겠지요.
황영애 에스텔 - 이학박사(미국 오하이오주립대 화학과). 상명대학교 교수이며 저서로 “화학에서 인생을 배우다”(2010, 더숲)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