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에게 길을 묻다] 오각형이 공간을 채우는 방법
황영애
해마다 가을이면 각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합니다. 올해의 화학상은 화학에서 ‘결정(結晶)’의 의미를 통째로 바꾼 과학자에게 그 영예가 돌아갔습니다.
일반적으로 도저히 존재할 수 없다고 여겨졌던 ‘준결정(準結晶, quasicrystal) 구조’를 발견함으로써 ‘결정학의 100년 오류’를 밝혀낸 이스라엘의 화학자 셰흐트만(Shechtman) 박사가 그 주인공입니다.
고체 상태의 물질은 결정(crystal)과 비정질(amorphous)로 존재하는데 그는 결정과 비정질의 중간 물질인 준결정을 발견하고 실험적으로 증명함으로써 결정학에 획기적인 장을 마련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오류를 밝혀낸 것도 놀랍지만,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학문으로 알려져 있고, 또한 그토록 눈부시게 발전해 온 이 과학계에, 그것도 아주 최근까지, 그 물질이 실제로 존재하는 데도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고정관념이 있었다는 것이 더 놀랍지 않습니까?
결정과 비정질이란?
우선 결정과 비정질이 무엇인지부터 알아 보겠습니다.
구성 원자가 광범위하게 규칙적인 주기성을 가지고 배열된 물질을 결정이라 하며 원자의 배열이 불규칙한 물질을 비정질이라 합니다. 간단한 예로 똑같이 반짝이는 물질들이지만, 다이아몬드는 구성 원자가 계속해서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어서 결정이며, 유리는 그렇지 않아 비정질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준결정의 발견이 결정학의 큰 오류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요?
셰흐트만 박사는 1982년 알루미늄과 망간을 녹여 100만 도를 1초 동안에 냉각시키는 속도로 급랭시켜 합금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그 합금이 대칭 구조를 가지면서도 어느 부분에서는 그 구조가 주기적으로 반복되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전자 현미경을 이용하여 발견하였습니다. 이 물질이 바로 준결정입니다.
다시 말해서 준결정은 원자가 규칙적으로 배열된 결정도 아니고, 불규칙적인 비정질도 아닌 물질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 합금이 오각형 구조를 가지고 있었고, 그럼에도 공간을 채우는 특이한 구조를 갖고 있음을 밝혀냈습니다. 이 오각형의 규칙적인 배열 안에 삼각형 등을 채워 넣는 불규칙적인 배열을 포함함으로써 공간이 채워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만들어진 패턴은 전체적으로 보면 규칙적이지도, 그렇다고 아주 불규칙적이지도 않았습니다.
기존 결정학의 변화
기존 결정학의 원칙은, 결정이란 삼각형이나 사각형, 육각형 등을 규칙적으로 배열하여 평면이나 공간을 채울 수 있어야 하는데 오각형으로는 채울 수 없기에 오각형의 결정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결정을 이루는 원자들은 격자처럼 일정하고도 주기적으로 반복하여 배열된 3차원적인 형태를 가져야 했으니, 이 새로운 발견은 기존의 관념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그의 논문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켜 게재 불가의 판정을 받기도 하였고, 심지어 그가 다니던 연구소 소장은 그에게결정학 교과서를 다시 읽으라고 했답니다.
또 그 분야의 대가이며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라이너스 폴링으로부터는 “준결정 따위는 없다. 단지 준과학자 같은 것이 있을 뿐이다.”라는 수모까지 당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이후 다른 종류의 준결정들을 실험실에서 발견했고, 2009년에는 러시아의 광석 샘플을 통해 자연계에도 준결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습니다. 결국 1992년에 결정의 화학적 정의 가운데 ‘규칙적으로 배열되고 반복되는 3차원적 형태’라는 부분이 ‘명확한 회절(回折) 패턴이 나타나는 물질’로 바뀌기에 이르렀습니다.
준결정은 일반 원자배열을 지닌 결정보다 마찰력이 작아서 잘 마모되지 않고 표면에 다른 물질이 잘 달라붙지 않아 프라이팬 코팅재로, 또 전기나 열에 강해서 엔진을 보호하는 단열재 등의 소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현재 유럽에서는 강도가 큰 이 소재를 이용해 면도칼이나 바늘, 칼 등을 생산해 내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기계 · 항공 등 향후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소재로서 그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의 편견
이 상황을 보면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유다인들의 편견과 매우 닮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 시대의 유다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며(예레 23,5 참조),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무뢰배를 내리치고 악인을 죽여 평화의 왕국을 세우고(이사 11,4), 해 뜨는 땅과 해 지는 땅에서 그들을 구해내어 예루살렘 한가운데에서 살게 해주시는(즈카 8,7-8) 강력한 임금님이었습니다. 한 치의 흠도 없이 규격과 틀에 꼭 들어맞고 배열이 일정한 결정과도 같은 분이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힘 있는 임금님이 아니라 초라하기 짝이 없는 구유에서 가난하고 연약한 아기로 그들에게 왔습니다. 마치 오각형의 도형과 같다고나 할까요? 홀로 공간을 채울 수 없는, 겉보기에 너무도 부족한 모습이지요. 그랬기에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셨을 때 주위 사람들이나 가족들은 그분을 메시아로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고향인 나자렛의 회당에서 가르치셨을 때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마르 6,3)이라며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형제들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기 때문에 유다에서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을 때도 예수님에게 유다로 가서 세상에 드러내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그들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요한 7,1-5). 자신들의 권위를 위협받게 될지도 모를 두려움도 있었기에 최고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도 성경을 내세우며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는다.”(요한 7,52)는 이유로 예수님을 결코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 없었지요. 모두 선입견의 결과였지요. 마치 셰흐트만 박사에게 결정학 교과서를 다시 읽으라고 한 사람들처럼.
삶의 자리에 계신 예수님
예수님은 왜 빈틈없는 결정 같은 존재가 아니라 오각형처럼 오셨을까요? 오각형은 그 자체만으로는 공간을 채울 수 없습니다.
공간을 채우려면 우선 평면을 채울 수 있어야 하는데, 오각형의 한 모서리의 각이 108도이므로 3개를 붙여도 324도가 되니 평면이 되는 360도를 만들 수 없습니다. 빈틈이 생긴다는 뜻이지요. 그 빈틈에 삼각형이나 다른 도형들이 들어와 오각형과 함께 어우러진 아름다운 준결정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획일적인 모양의 결정과 달리, 변화와 다양성을 갖춘 아름다움이라고 할까요?
구세주 예수님도 바로 그러한 빈틈이 있었기에 그 자리에 죄인, 창녀, 세리들을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겸손이었지요. 그 빈틈을 예수님은 사랑이라는 도형으로 가득 채워 또 다른 차원의 세상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렇게 이루어지는 세상이야말로 사람들 사이에 마찰도 작아서 더 강하게 화합하는 행복한 세상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겸손하게 마음을 열 때 내 삶의 자리에 찾아오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행복해질 수 있겠지요?
황영애 에스텔 - 이학박사(미국 오하이오주립대 화학과). 상명대학교 교수이며 저서로 「화학에서 인생을 배우다」(2010, 더숲)가 있다.
[경향잡지, 2011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