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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0) 그리스도 따라 세상의 때 벗자/배광하 신부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0. 7. 30.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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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0) 그리스도 따라 세상의 때 벗자/배광하 신부

주님 세례 축일 (마태 3, 13~17) : 세례를 받으시다
발행일 : 2008-01-13 [제2582호, 6면]

- 사랑하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 -

세례를 사는 삶

오늘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죄인들이 받아야 할 세례를 죄가 없으시고 죄인의 죄를 용서해 주실 분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세례를 주라 하신 마지막 지상 명령에서 보았듯이 세례는 신앙 입문을 위한 절차 의식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세례의 신앙을 이 지상에서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 세례를 주었던 세례자 요한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를 부담스러워 하며 자신에게는 과분한 것이라고 굳이 사양하려 합니다.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 역시 겸손 그 자체이신 분이셨습니다.

세례의 시작은 결국 나약한 인간성을 인정하며 겸손해 지는 것, 하느님을 세상의 창조주, 주님으로 겸손히 고백하며, 그분께 의탁하여 찬양을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이 나의 삶의 중심이 되도록 사는 것이 세례의 삶입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은 분명 선포의 모습이 달랐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임박한 하느님의 심판을 외치며 회개할 것을 선포한 반면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 영원한 기쁨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받는 아들 됨의 삶을 이렇게 예언합니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이사 42, 3).

자비와 사랑을 사는 삶이 세례의 삶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금욕과 단식의 삶을 살았으나, 예수님께서는 먹고 마시는 밥상 공동체로써 친교의 잔치를 베푸셨고, 제자들과의 마지막 밥상에서 당신의 살과 피 전부를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내어 놓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한 가족 밥상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 서로가 자기의 것을 나누어, 누구도 굶주리고 소외된 이웃이 없도록 사는 것, 그것이 세례를 사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외치는 종말론적 예언자였으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이 땅에서부터 실현시키셨던 분이셨습니다. 진정 세례를 사는 삶은 이 땅에서 천국을 살아가는 것, 천국을 만들어 가며 평화와 기쁨을 심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십니다. 이제는 세례 받음으로 끝이 아니라, 성령의 기쁨과 그 열매를 맺기 위한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세례를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역시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사랑을 받는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 17).



마음에 드는 아들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줄 때, 당시의 종교지도자들, 기득권을 쥔 자들은 극심히 반대합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요한 1, 25).

이는 우매한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며 속죄 제물을 성전에 바쳐야 하는데, 세례자 요한은 회개하였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이고 맑은 물에 몸을 담그는 세례로 족하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전 수입이 줄어들 것을 염려한 종교 지도자들의 얄팍한 속셈이 드러난 것입니다.

오늘날 종교의 모습도 예수님 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현대 사회의 우상, 맘몬은 ‘돈’이라고 하였습니다. 진정 사회나 종교 역시 돈에 소중한 가치를 팔아먹는 몰락의 길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로 우리에게 익숙한 홍세화님은, 오랜 프랑스 생활을 끝내고 조국에 돌아와서의 놀란 느낌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20년 만에 귀국했을 때 한국사회에선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었다. 무척 놀랐다. ‘마음의 부자’가 되자는 게 아닌, 소크라테스 식으로 말해 ‘배부른 돼지’가 되자고 하다니 …. 소크라테스는 ‘배부른 돼지가 되지 말고 헛헛하더라도 인간이 되라’고 했는데, 이 땅에서는 서로 ‘배부른 돼지’가 되자고 말하고 있었다.

이런 주장이 거침없이 나오고 아무런 거부감이나 위화감 없이 관철되는 사회에서 구성원들은 ‘존재’를 아름답게 가꾸려고 노력하는 대신, 오로지 소유를 많이 하려고 애쓸 뿐이다.

인간 존재의 가치와 능력을 평가하는 잣대가 오로지 소유에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돈독이 오른 사회에서 전인적 인간은 사라지고 경제동물로 남는다. 인간성은 실추되고 인간 관계는 파괴된다.”

세례를 사는 우리 신앙인에게 너무도 고마운 지적, 충고로 들립니다. 세례는 세속에 묻은 온갖 때를 벗는 것입니다. 특별히 돈의 노예로 살았던 삶을 벗겨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례를 받으시는 하느님 마음에 드는 아드님께서 보여주신 삶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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