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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1) 구원 위해선 가장 소중한 것 바쳐야/배광하 신부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0. 7. 30.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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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1) 구원 위해선 가장 소중한 것 바쳐야/배광하 신부

연중 제2주일 (요한 1, 29~34) : 보라, 세상의 죄 없애시는 분
발행일 : 2008-01-20 [제2583호, 6면]

- 하느님의 어린양 -



희생의 어린양

오늘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 30).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모진 이집트 노예생활을 청산할 때,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던 것은 어린양의 피였습니다. 어린양의 희생이 있었기에 그들의 파스카가 가능하였습니다.

인류는 자신들의 간절한 소망을 하늘에 알릴 때 제사를 지냈고 그 제사에는 반드시 제물이 동반 되었습니다. 처음엔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바쳐야 한다는 정성에서 살아있는 인간 생명을 죽여 바쳤습니다.

그 같은 인신제사의 풍습은 모든 민족이 가지고 있던 악습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심청이를 생각하면 될 듯 싶습니다. 분명 그 같은 인신제사가 있었기 때문에 심청전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은 깨닫기 시작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생명을 하느님께 바쳤는데, 그 생명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뜻을 모르고 우매한 인간이 소중한 생명을 함부로 다루었다는 자각을 하기에 이릅니다. 해서 이제는 인간의 생명 대신 동물을 제물삼아 하느님께 바치게 됩니다.

제물로 바쳐지는 동물은 하느님과 인간을 연결시키는 매개체 역할을 합니다. 이스라엘은 양을 많이 키웠기에 늙은양이 아닌 어린양을 제물로 바칩니다. 어린양 안에는 인간의 모든 속죄와 간절한 열망이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연결은 이 같은 자기 희생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기 위해서는 어린양의 희생이 필요하였습니다. 인간의 씻을 수 없는 죄를 씻기 위하여, 하느님과의 화해를 위하여 십자가의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님은 분명 희생의 어린양이십니다. 이를 이미 세례자 요한이 알았기에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나의 희생을, 우리의 희생을 요구합니다. 이집트 탈출에 희생양이 있었기에 거룩한 땅으로의 파스카가 가능하였고, 죄의 노예로 살던 백성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있었기에 약속된 천상 예루살렘으로의 파스카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파스카란 ‘건너감’을 의미합니다. 희생으로 내 자신이 이 땅에 눌러앉게 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땅, 역경의 삶, 고통의 바다를 건너갈 수 있는 것입니다.

희생이 있을 때, 오늘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 49, 6).



침묵의 어린양

인간의 속죄 제물로 바쳐지는 어린양에 대하여, 나아가 신약의 어린양이신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 53, 7).

말이 난무하는 세상입니다. 입만 열면 ‘바쁘다’ ‘죽겠다’입니다. 모두가 바빠 죽겠다고 아우성입니다. 오죽하면 직장 없는 백수가 바빠 죽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만들어지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또한 모두가 입만 열면 자기 과시 내지는 남의 험담 뿐입니다.

무엇인가 희생을 하고서도 그것을 남들에게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합니다. 남에게 봉사한 것도 자랑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어 합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처럼, 자신은 아니고 ‘저분이시다’라고 양보할 줄 모르고 남을 나보다 치켜세울 줄 모릅니다. 겸손의 덕이 실종된 세상입니다.

이미 오늘의 세상을 예견한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충고합니다.

“사람의 혀는 아무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 혀는 쉴 사이 없이 움직이는 악한 것으로, 사람을 죽이는 독이 가득합니다”(야고3, 8).

이집트 파스카의 밤, 온 이스라엘 백성은 숨죽여 침묵했습니다. 십자가 파스카의 해방 날, 아드님의 절규에도 성부 아버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참된 희생엔 침묵이 함께 합니다. 침묵의 희생이 파스카를 가능케 합니다.

침묵은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살 때 가능합니다. 손해 보지 않으려는 이기심에서는 희생의 침묵이 나올 수 없습니다.

손해 보더라도 침묵 가운데 양보할 수 있는 삶, 억울한 누명 가운데 남을 살리기 위한 침묵의 삶, 어리숙해 일처리 재간이 없어 답답함을 누를 길 없을지라도 참고 기다려주는 침묵의 인내, 모든 사람의 오해로 내게 분노가 다가와도 마음 깊은 침묵에서는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1코린 1, 3) 라는 축복이 솟아오를 때, 구원의 건너감, 파스카가 가능한 것입니다. 실로 세상이 이토록 살기 힘든 까닭은 실행하지 않고 이 모든 희생이 불가능 하다고 넋 놓음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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