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569) 사랑의 완성 ‘부활’을 나누자/배광하 신부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0. 7. 30. 18:25

본문

 

(569) 사랑의 완성 ‘부활’을 나누자/배광하 신부

예수 부활 대축일 (요한 20, 1~9)
발행일 : 2008-03-23 [제2591호, 6면]

- 다시 살리라 믿습니다 -

죽어야 살리라

‘알렐루야’를 노래하는 기쁜 부활입니다. 부활이 그토록 기쁜 까닭은 다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다시 살아난다 함은, 이미 죽었던 경험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육신으로 죽었든 영혼으로 죽었든, 죽었던 영육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기쁨이며 환희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살아있는 가운데 부활을 기뻐합니다. 아직 육신이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음에도 부활을 기뻐하는 까닭은 훗날 영원한 부활을 믿기 때문이지만 무엇보다도 사순의 긴 시간 동안 죽음을 연습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을 죽여야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예수님 진리를 온 몸으로 살아보았기 때문에 부활이 기쁨인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 24). 내 자신의 고집을 죽이고, 이기심을 죽이고, 교만함을 죽이고, 욕망을 죽이고, 결국은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타인과 공동체의 평화를 위하여 내 자신을 죽이는 희생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부활이 기쁨인 것입니다.

윤동주 시인은 그의 대표적 시인 ‘서시’에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하며 노래하였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진정 자신의 모든 것을 죽이며 아름다운 희생과 투신의 삶을 살아가는 고귀한 이들에게 바치는 찬사일 것입니다. 부활이 내게 그리 큰 기쁨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아직도 희생의 참된 가치를, 죽음을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나의 희생으로 함께 사는 삶이며, 동시에 여러 아픔과 분노와 좌절에서 일어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함께 모든 희망을 잃어버리고 침통한 표정으로 절망에 쌓인 채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는 죽었던 삶이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또다시 소생된 마음으로 벌떡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벅찬 발걸음은 부활의 삶인 것입니다(루카 24, 13~35 참조).

우리의 삶은 자주 엠마오로 곤두박질치는 나락의 희망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 같은 어둠의 삶에서 빛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삶이 진정 부활의 삶입니다.



사랑으로 살리라

신학자 ‘요하네스 브란첸’은 말합니다.

“인류의 고통은 너무나 큰 데 비해 우리의 노력이나 대답들은 아주 옹색하여 채울 수 없는 빈자리가 많다. 그러나 이 빈 자리는 하느님만이 대답을 주시고 채울 수 있는 것으로, 하느님께서는 그 대답을 주셨다. 즉 부활사건이다. 부활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의문에 대한 하느님의 대답이시다. 저 모욕적인 십자가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다. 새 출발이 있고, 고통과 죽음 그리고 불신을 관통하는 찬연한 새 창조가 있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뢰와 사랑과 믿음을 배반한 제자들을 끝까지 “내 형제들”(마태 28, 10 요한 20, 17 참조)이라고 하십니다. 인간의 배반과 불신에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 그 끝없는 사랑이 예수님을 죽음의 벼랑 끝에 내버려 두지 않고 부활케 하신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죽음에 눌려 있을 수 없었던 하느님의 사랑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부활은 희망이며 기쁨인 동시에 사랑의 완성입니다. 때문에 부활을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놀라운 사랑가운데 살도록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처럼 끝날에 부활하리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다시 ‘요하네스 브란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아도취에 빠져 있거나 자기 자신만을 위해 희망을 품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희망에 찬 시선을, 난경에 처한 형제와 슬픔을 겪는 자매와 나누고자 한다. 부활축일은 우리에게 ‘신체장애자들, 수명을 다 살지 못한 이들, 불의의 사고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불구가 된 이들, 비명에 간 어린이들, 외면당하고 인생을 속아 사는 이들, 박약아들’과 희망을 나눌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고 있다.”

부활축제는 결코 그리스도인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들만이 축하하고 즐기라고 예수님께서 모진 고통의 십자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부활은 소외와 눈물로 암흑의 어둔 동굴에 있는 형제들의 손을 붙잡아 함께 걸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과 함께 진정한 부활의 알렐루야를 기쁘게 노래해야 합니다. 자신의 이기심과 욕망을 버리는 삶, 희생과 사랑의 삶이 함께 할 때 우리는 세상 질곡의 눈물을 이기고 함께 부활하는 것입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 환호하며 거두리라”(시편 126, 5). 알렐루야!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