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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0) ‘함께’ 나누는 부활의 기쁨/배광하 신부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0. 7. 30.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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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0) ‘함께’ 나누는 부활의 기쁨/배광하 신부
부활 제2주일 (요한 20, 19~31)
발행일 : 2008-03-30 [제2592호, 6면]

- 부활의 희망을 사는 법 -

평화가 너희와 함께

평화의 한자는 ‘平和’ 입니다. 뜻풀이는 쌀(禾)을 입(口)으로 먹되 모두가 공평하게(平) 먹는다는 뜻입니다. 이 같은 참된 평화의 모습을 오늘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는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사도 2, 44).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무려 세 번이나 제자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하셨습니다. 이는 참된 평화를 살라하신 당부이며, 누구도 소외됨 없이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을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토록 어려웠던 초대교회 신자들은 평화의 삶을 살고자 부단히 노력한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상처 중에 면담을 요청합니다. 듣고 있노라면 가족들이나 이웃들 안에서 받은 크고 작은 상처들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내 아들은 이날까지 단 한번도 속을 썩이지 않았는데…” 라든가, “한번도 남들에게 싫은 소리를 들으며 살아본 적이 없었는데...” 또는 “이런 일은 처음 겪어 본다”는 등 마음의 고통을 꺼내 놓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세월을 지내며 자식이 속 한번 썩이지 않았다니, 남들에게 싫은 소리 한번 들어보지 못했다니, 그 같은 일을 처음 겪어 본다니, 정말 얼마나 안락하고 평안한 생활을 한 것인지 부럽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간관계 안에서, 크고 작은 상처로 고통을 받고 신음하며 살고 있는데 자신은 그것이 처음이라면 정말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감사의 삶을 살았는지, 고통 받는 이웃을 살펴보았는지, 결국 평화를 나누지 못하고 나 홀로 독점하며 살았던 이기주의의 삶이었다는 진정한 자기반성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평화의 인사를 나누신 부활의 예수님께서는 느닷없이 “성령을 받아라”(요한 20, 23) 하시며 서로가 용서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이는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할 때, 반드시 미움 받는 상대방은 공동체에서 어떤 모습으로든 소외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 소외되어 구석진 어둔 무덤에서 기죽어 있다면, 그 공동체 전체가 무덤을 열고 부활의 대명천지로 걸어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평화는 결국 ‘함께’ 이어야 합니다.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작고하신 ‘금아 피천득 프란치스코’ 선생께서는 예전 “왜 천주교 신자가 되셨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어린아이와 같은 대답을 하셨습니다. “나는 천국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몰라. 그런데 죽어서 천국이 있으면 어떡해, 그래서 믿지.”

우리는 분명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서 많은 의심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신앙은 의심을 버리는 믿음으로 시작됩니다. 부활 또한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때문에 오늘 복음의 토마스 사도처럼,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 25)라는 극단주의의 표현은 안됩니다. 그러다 있으면, 존재하면 어쩌려고 그런 단호한 표현을 쓰는 것입니까? 그렇듯 호언장담 불신을 표현했다가 이내,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 28)하고 믿음을 고백할 때의 딱한 처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늘 무엇을 보고, 만져야 믿었습니다. 그러나 온 우주의 신비는 보고 만져지는 것보다,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것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주님을 믿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진정 인류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믿음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투신하여 부활의 참된 희망을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 같은 부활의 희망을 살았던 베드로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 힘주어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1베드 1, 3~4).

인도의 현자 ‘라마나 마하리쉬’에게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예수님을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분이 대답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각자의 수준에 맞게 가르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참으로 멋진 대답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철부지 제자 토마스를 나무라지 않으시고 그의 수준에 맞게 다가가시어 부활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우리도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여 참된 부활의 기쁨을 살지 못해 답답해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랑이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매일 우리 수준에 맞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당신 부활의 희망 속에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그 소리에 믿음을 가지고 따르면 됩니다. 참된 부활은 이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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