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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7) 사랑 은총 친교의 삶 살자/배광하 신부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0. 7. 30.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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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7) 사랑 은총 친교의 삶 살자/배광하 신부

삼위일체 대축일 (요한 3, 16~18)
발행일 : 2008-05-18 [제2599호, 6면]

- 하나 되게 하소서 -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

오늘도 소양강의 바람을 맞으며 하늘과 산과 강, 그리고 구름과 나무와 꽃들을 봅니다. 봄이 되어 신록의 푸르름은 감탄을 자아내게 만듭니다. 그래서 옛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였나 봅니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 창공은 그분 손의 솜씨를 알리네. /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네, /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 그들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 그 소리는 온 땅으로, / 그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가네”(시편 19, 2~5)

인간의 과학이 발견한 무수한 별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별은,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라고 합니다. 지구가 가장 아름다운 까닭은 그 안에 온갖 생명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생명이 아름다운 것은 서로가 자신의 본 자리를 지키며 일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뿌리를 땅에 박고 수분을 줄기와 잎에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줄기는 잎이 자라도록 도와주어야 하고, 잎은 다시 태양의 에너지를 줄기와 뿌리에 전해 주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바로 이 같은 자리 지킴과 하나로 일치될 수 있어야 비로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눈을 들어 바라보는 모든 생명들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강도 바다도 산도 하늘도 그 안에 생명이 있어야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하나같이 하느님 현존의 모습을 닮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본 모습을 찾으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로 현존하신다고 성경과 교회가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무도 어려운 삼위일체론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인간은 피조물이고 하느님께서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모두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다고 느끼고 믿으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생명은 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닮으며 살아갑니다. 일체이신 성삼의 모습을 오늘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느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 성령의 친교”(2코린 13, 13)로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으며, 그분의 사랑과 은총과 친교를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랑 은총 친교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께서는 대사제로서 하느님 아버지께 인간을 위하여 마지막으로 이렇게 간곡히 기도하셨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 11)

결국 예수님의 지상 삶의 목표는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온 인간이 다시금 하느님과 하나 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이신 모습처럼 당신의 모상대로 만드신 인간이 다시금 본래의 자리인 하느님과 하나 되는 삶을 되찾아 주시는 것이 예수님 지상 삶의 목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삼의 사랑과 은총과 친교를 모든 인간이 살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신 것입니다.

지극히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사랑은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 17)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었고 크신 그분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에 오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에서 구원되었고 부활과 영원한 삶을 누리며, 감히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은총을 거저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친교를 통해 우리가 다시 하느님과의 일치를 누릴 수 있게 되었으며 신명나는 신앙 안에서 비로소 참 기쁨과 희망을 꿈꿀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진정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과 친교를 살아야 하는 것이고, 세상에 그 깊은 사랑과 은총과 친교를 전하고 일치를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은 머리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사랑해야”(신명 6, 5)하며 그 사랑을 세상에서 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중세의 신학자 그레고리오스 성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하시고 이해하실 수 없으신 분이시다. 우리가 그분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이것, 즉 그분은 무한하시며 이해할 수 없으신 분이라는 사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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