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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4) 내가 용서할 때 하느님도 용서하신다/배광하 신부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0. 7. 31.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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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4) 내가 용서할 때 하느님도 용서하신다/배광하 신부

 
연중 제7주일 (마르 2, 1~12) : 영과 육의 자유
발행일 : 2009-02-22 [제2636호]

내 안의 죄

우리가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잘못을 추궁할 때 한 손가락을 상대방에게 가리키게 됩니다. 이른바 삿대질을 할 때의 모습과 같습니다. 하지만 다섯 손가락 모두 용서 못할 사람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네 손가락은 모두 안으로 들어와 나를 가리킵니다.

이 같은 작은 행동 안에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진리가 있습니다. 타인의 잘못이 하나라면 나의 잘못은 넷이라는 것입니다. 설령 절대로 나의 잘못이 없었다 하더라도 그 같은 생각을 가지라는 교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 그대로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 41)

우리가 자주 타인의 죄를 용서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내게는 결코 잘못이 없다는 인식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 중이나 미사 때에 수 없이 자신의 가슴을 치며, “제 탓이오”를 고백합니다. 그러나 정작 삶에서는 늘 남의 탓이었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용서를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우선 내 안에는 잘못이 없었는지 성찰하고 반성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다운 용서가 가능하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할 예수님의 두 가지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카 6, 37)입니다. 먼저 내가 용서해야 하느님께서도 내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실로 이 말씀은 우리가 깊이 새겨듣고 용서의 큰 경각심으로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 그 어떤 죄도 용서받을 수 있지만, 용서하지 않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는,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 34)입니다. 십자가상에서 용서의 위대한 교훈을 남기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는 용서가 결코 우리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우신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내가 용서의 주체라는 교만과 오만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용서는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몫입니다.

용서를 통한 자유

영미 문학을 통해 가장 위대한 여류 시인으로 평가되는 미국의 ‘에밀리 디킨슨’(1830~1886)은 이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한 가슴에 난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다면 / 난 헛되이 산 것이 아니리라. / 한 인생의 아픔을 달래줄 수 있다면 / 한 고통을 위로할 수 있다면 / 기운을 잃은 한 마리의 개똥지빠귀를 / 둥지에 데려다 줄 수 있다면 / 난 헛되이 산 것이 아니리라.”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용서의 하느님 마음을 이렇게 알리고 있습니다.

“나, 바로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너의 악행들을 씻어 주는 이, 내가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이사 43, 25).

참으로 감격스럽고 은총이 넘치는 말씀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며 늘 크고 작은 죄에 노출되어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죄에 떨어져 차마 고개를 똑바로 들지 못하는 못난 죄인인 우리를 끝까지 용서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가슴 벅차게 느낄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용서는 바로 당신 자신을 위함이라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용서는 용서 받아야 할 상대방 보다는 자신을 위하여 더욱 중요할 수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증오심과 복수의 앙칼진 갈린 마음으로는 내 자신이 진정 기쁨의 자유를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물론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지만 자신 안에서도 용서와 화해의 사랑이 물결칠 때, 하느님의 용서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안고 있었던 타인에 대한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고, 가슴 한켠에 꽉 막혔던 미움의 응어리가 씻기어지고 비로소 자유의 날개짓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큰 죄책감에 억눌려 나의 용서를 간절히 바라는 타인의 슬픈 눈동자, 서로의 상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다면 거창한 인류애를 넘어 우리 자신의 삶은 결코 헛되이 산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내 영혼도 살고 용서받은 타인의 영혼도 살게 된 것, 그것은 진실로 위대한 삶이었고 위대한 영웅적 결단이었노라고 칭찬받을 수 있습니다.

용서를 몰랐던 오늘 복음의 율법학자들은 예수님 당대의 기득권자들이었습니다. 세상의 권력과 지혜와 판단은 용서가 불가능하여도 하느님 사랑에는 용서 못할 일이 도무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용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마르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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