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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 복음 공유할 때 세상 고통 사라져/배광하 신부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0. 7. 31.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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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 복음 공유할 때 세상 고통 사라져/배광하 신부

 
연중 제5주일 (마르 1, 29~39) : 복음선포의 사명
발행일 : 2009-02-08 [제2634호, 6면]

인생은 고역

작가 이동하님은 그의 작품 ‘신의 침묵에 대한 질문’에서 현대의 고달픈 서민들의 희망 없는 삶을 이렇게 꼬집었습니다.

“머리는 세금 고지서와 결재 서류와 자식 걱정으로 짓눌려 있으며 가슴은 오염된 음식을 먹고 있는 사이에 서서히 병들어 가고 만원 버스에 시달리느라고 맥이 빠진다. 생각해 보면 젊음은 고작 별장의 사진이 되어 앨범 속에 갇혔고, 이제 남은 세월이 확실히 말해주는 것은 우리가 늙고 죽어 간다는 사실뿐이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 모든 경제가 어렵다고 합니다. 너무도 많은 이들이 실직의 아픔과 취업의 어려움 등으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생존의 번뇌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도 해마다 늘어가고 있습니다. 많은 가정은 이 경제의 위기에서 파탄을 맞고 있으며, 들리는 소식은 모두 어두운 이야기뿐입니다. 때문에 그 옛날 구약의 욥도 인생의 고역을 이렇게 읊었습니다.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 그늘을 애타게 바라는 종, 삯을 고대하는 품팔이꾼과 같지 않은가? 그렇게 나도 허망한 달들을 물려받고 고통의 밤들을 나누어 받았네”(욥 7, 1~3).

이 같은 욥의 탄식이 어디 욥에게만 해당되는 슬픔이겠습니까? 오늘날도 세상 도처에는 욥의 눈물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외로운 양로원의 노인들 눈에서, 이혼한 부부에게 버려진 아이들의 눈에서, 배고파 쓰러진 엄마의 마른 젖을 빨고 있는 아가의 눈에서, 아직 공부할 나이에 생활전선에서 가정의 경제를 책임져야 하는 어린 노동자의 눈에서, 민족의 내전으로 전쟁에 뛰어든 소년병의 눈에서, 온갖 윤락가에서 몸과 마음이 갈갈이 찢어진 소녀의 눈에서, 이제 곧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 시한부 인생인 환자의 눈에서 우리는 욥의 탄식과 눈물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은 아직도 복음의 기쁜 소식을 살지 못하는데, 교회가 전해야 하는 복음이란 무엇인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눌러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이 이럴 때 교회에는 사도 바오로와 같은 정신으로 무장된 일꾼들을 더욱 많이 필요로 합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1코린 9, 19).

희망의 복음

진정 기쁨이 사라지는 이 시대에 희망의 복음이 선포될 자리는 없는 것일까?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더 암울한 인류의 역사에서도 기쁜 소식은 전해졌고, 기쁜 소식을 들은 이들은 진정 악조건 속에서도 기쁨을 살았습니다. 이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쁨의 복음을 살지 못했음을 겸허히 반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분명 희망의 길, 복음의 길이 세상 어려움을 이길 수 있고, 아직도 살아갈 소중한 가치가 있음을 깨닫도록 종의 자세로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슬픔에 빠진 이들이 들을 수 있도록 외쳐야 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찡크’는 희망의 곁에서도 그 희망을 찾지 못하고 죽어가는 현대인들의 처지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어느 날 한 청년이 사하라 사막을 횡단합니다. 그런데 이내 식수가 떨어지고 청년은 갈증으로 실신하여 쓰러집니다. 잠시 깨어난 청년의 눈앞에 야자수가 보였고,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죽게 되니까 신기루가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애써 눈을 감은 청년은 절망감에 생을 포기하려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새소리와 물소리가 또 들려옵니다. 청년은 정말 죽게 되니 환청이 들린다 생각하고 눈을 감습니다. 이튿날 아침, 사막의 베두인이 어린 아들과 함께 오아시스가에 물을 기르러 나왔다가 입술이 타들어 죽어있는 청년을 발견합니다. 그러자 어린 아들이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이 사람은 왜 물가에서 목말라 죽었나요?’ 아버지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합니다. ‘얘야, 여기 죽어있는 이 젊은이가 바로 현대인이란다.’”

그토록 많이 배우고, 많이 가졌으며, 많은 안락을 누리고 있는 문명인임을 자처하면서 그렇지 못한 이들을 ‘미개인’ ‘원시인’ 취급을 하면서도 실제의 삶은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불쌍한 현대인들, 그들에게 누군가는 살아날 수 있는 오아시스가 바로 곁에 있다고 알려주는 일, 그것이 복음선포입니다.

그리고 그 오아시스의 물은 언제나 충분히 마련되어 있고, 혼자서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공유하며 나눌 때, 세상의 갈증은 사라질 수 있다고 가르쳐야 합니다. 세상 갈증과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청량한 복음의 생수를 전하시던 예수님의 삶을 우리도 살아야 합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마르 1,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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