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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 구체적인 사랑 실천하라/배광하 신부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0. 7. 31.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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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 구체적인 사랑 실천하라/배광하 신부

 
연중 제6주일 (마르 1, 40~45) -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발행일 : 2009-02-15 [제2635호]

일상의 삶 안에서

2004년 3월 1일 지리산 노고단에서 출발하여 2008년 12월 14일을 끝으로 약 5년의 세월 동안 대한민국 방방곳곳을 걸어 다니며 산과 강, 들과 마을, 사람과 마음을 보고 읽으며 생명과 평화를 외쳤던 탁발 순례단의 하느님께 아뢰는 글을 찡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그분들은 글에 이 같은 체험의 마음을 담았습니다.

“경제가 위기라고 합니다. 그래서 큰일 났다고 모두 아우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압니다. 그 눈부신 개발과 성장의 시기에도 우리 사회는 그렇게 변화하고 있었음을, 우리가 누려온 눈부신 변화, 물질적 풍요, 편리한 생활이 바로 위기의 근원이었음을. 그러나 그곳에도 등불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험한 세상에도 등불을 밝히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혼란과 아우성은 경쟁과 부자논리에 물들어 있는 삶의 방식에서 오는 것임을 그분들은 온 몸으로 가르쳐주었습니다. 희망의 빛이었습니다. 비우고 나누면서 사는 삶에는 위기가 적고 위기를 도울 벗이 있습니다. 새 하늘 새 땅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서 가꾸어가는 내 삶이 언제나 새 하늘 새 땅임을. 우리 길에서 아름답고 맑은 이들을 만나 그것을 보았으니, 이 걸음 헛되지 않습니다.”

이토록 어둡고 암울한 시대에, 진정 어둠이 판을 치고 있는 이때가 비로소 빛이 빛을 발할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빛이신 주님의 길을 따라 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빛을 받은 우리가 그 빛을 이 어두운 세상에 비출 수 있어야 합니다.

미사여구의 말장난이 아닌 구체적인 실천의 자세가 일상의 삶 안에서 드러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 각 개인에서부터 본당과 교구는 진정 그리스도의 빛으로서 구체적인 실천의 의지를 보여야 합니다. 계획을 세워야 하고, 실천할 수 있는 목록을 짜내야 합니다. 그래야 넘치는 풍요 속에 살고 있는 개인과 본당에 돌아오는 돌팔매를 피할 수 있고 하느님께는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이 진정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 일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의 때입니다.

진정 200년 전, 이 땅의 순교자들은 그 어려운 시기에 비움과 나눔과 사랑으로 신앙의 모범을 보였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때문에 오늘 사도 성 바오로는 이렇게 간곡히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1코린 10, 31).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

‘병신 여우짓’이란 말이 있습니다. 어떤 남자가 숲을 지나다가 여우 한 마리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여우는 다리 한쪽이 없어 제대로 걷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내는 생각하였습니다. “대체 저런 여우는 어떻게 먹고 살까…?” 그리고 숨어 여우를 유심히 살펴보니 때마침 커다란 호랑이가 사냥한 먹이를 물고 와서는 자기가 먼저 먹고 여우의 몫을 남겨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사내는 크게 깨달음을 얻은 양 외쳤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저런 하찮은 여우에게까지 미치고 있었구나!” 그리고는 “맞아, 나도 하느님의 은총을 굳게 믿으면 저렇게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다 마련해 주실 거야.” 그 뒤 사내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내려주실 은총을 굳게 믿으며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그가 기대했던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계속 굶주린 사내가 거의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을 때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병신 여우 흉내일랑 당장 때려치우고 호랑이를 본받으란 말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죽겠다고 아우성일 때, 그리스도의 사랑만을 떠벌리며 그 사랑을 실천에 옮기지 않는 이들을 향하여 야고보 사도는 무섭게 질책합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 15~17).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한 명의 나병 환자를 치유해 주십니다. 그는 나병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존엄성을 잃었고 암흑 속에 살던 비참한 처지였습니다.

그를 깨끗이 치유해 주신 까닭은, 우리도 그 같은 은총의 기회가 오리라는 희망의 가르침 보다는 우리 또한 예수님을 본받아 가장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을 행하라는 뜻입니다. 치유 받은 나병 환자는 기적의 예수님을 떠벌리고 다니기 보다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불쌍한 이들을 돌보아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의 믿음 행위는 그야말로 ‘병신 여우짓’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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