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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충돌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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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巡禮者 2010. 4. 2.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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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충돌문제


21세기에 들어와 유럽은 십자군 전쟁 이래 가장 치열한 종교 갈등을 겪고 있고. 중세의 전쟁만큼 폭력적인 종교 싸움은 아니지만 그리스도교 전통이 강한 유럽에서 이슬람 인구가 급증하면서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관점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참고로 EU 등의 자료에 따르면 현재 서유럽국 중 무슬림 인구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는 프랑스(10%)이고, 네덜란드(6.25%), 독일·오스트리아(각각 5.0%), 스위스·스웨덴(각각 4.5%), 벨기에(4.0%), 덴마크(3.0%), 영국(2.5%) 순이다.)


지난 2004년과 2005년 일어난 스페인 마드리드 열차폭탄테러와 영국 런던 7·7 지하철 테러, 프랑스 파리 무슬림 청년들의 소요와 최근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당선 뒤 벌어졌던 격렬한 시위, 덴마크 등지에서 일어난 무하마드 모독 만평 파문, 히잡(이슬람여성들이 착용하는것)을 허용할 것인가를 놓고 곳곳에서 반복되는 싸움, 네덜란드에서 몇년전 일어났던 이슬람 비판 영화감독 살해사건과 무슬림에 대한 극우파의 보복 폭력과 방화, 이슬람 국가인 터키를 프랑스와 독일 등이 유럽연합(EU)에 받아들일 수 없음을 주장하며 ‘그리스도교 유럽’의 전통을 지키길 원하고 몇몇 가톨릭 국가들은 아예 EU 헌법에 ‘그리스도교적 전통’을 넣을 것을 주장하는 일련의 상황들은 크리스챤과 무슬림 간의 진솔한 대화를 통한 상호이해와 회개를 요청하고 있다.


1. 각 종교에서 나타나는 근본주의


서구 매스컴은 종종 전투적이고 폭력적인 종교형태의 ‘근본주의’를 오로지 이슬람에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보도한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근본주의는 하나의 세계적 현상이고 현대의 문제들에 대처하는데 있어서 주요 종교들에 표면적으로 나타난다.


이슬람 근본주의자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개신교, 카톨릭, 정교회) 근본주의자, 유대 근본주의자, 힌두교 근본주의자, 불교 근본주의자, 유교 근본주의자 등이 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첫 번째로 나타난 것이 미국 내 있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이다. 근본주의자들의 활동은 서구문명의 출현으로 인한 즉각적인 응답으로서 생겨날 뿐만 아니라 현대화의 과정이 급속도로 이루어질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것은 민족과 나라, 종교를 넘어서서 나타난다.


3개의 유일신 종교 중에서(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 사실상 이슬람은1960년대와 1970년대 현대문명이 이슬람세계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을 때 근본주의 형태를 마지막으로 계승하여 지속적으로 전개 된다. 그 이전까지는 근본주의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안에서 주로 존재해 왔다.


모든 종교 안에서 근본주의자들의 활동은 어떤 공통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그들은 현대문명의 경험 안에서 자신들의 진정한 바램들을 이루지 못할 때 깊은 실망과 증오를 드러낸다. 바로 이것은 그들이 현대문명 앞에서 힘을 잃고 두려워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종교 근본주의자들은 종종 현대의 발전이 그들의 종교전통을 반대하고 억압한다고 불평한다. 그들은 또한 민주화와 세속적 사고방식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가령 테네시의 한 고등학교 교사 존 스코프스(1900-70)가 다윈의 진화론을 가르쳐 법정소송에 휘말린 이후로 프로테스탄트 근본주의자들은 공공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 반대를 했다.


또한 근본주의자들은 순수한 신앙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현대문화의 흐름에 거슬러 자신들만의 고립된 생활을 하면서 시작된다.(예를 들면, 예루살렘 혹은 뉴욕에 있는 극단적인 정통파 유대공동체들을 들 수 있다.)


모든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투쟁한다. 그러나 알아두어야 할 것은 근본주의자들 다수는 폭력적 행동을 하지는 않고 단순히 관습적이고 율법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보존하고 유지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근본주의는 단순히 정치적 목적을 위해 종교적 행위를 하는 방식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공공생활에서 거룩한 신성을 배제하는 세속주의자들에 대한 반란이며 현대문명안에서 영적인 가치들을 실현시키지 못한데 대한 절망감이다. 문제는 근본주의자들이 절망감과 증오와 두려움을 지니게 됨으로써 종교적 전통을 왜곡시키고 관용과 화해보다는 훨씬 더 공격적인 측면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2. 이슬람 근본주의


이슬람 근본주의를 현대문명에 대한 광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거절하는 전투적이고 극단적인 광신주의로 판단하는 것은 옳지가 않다.


이슬람은 전세계에 있는 다른 신앙을 가진 근본주의자들과 교류하면서 현대의 세속화 된 문명에 대해 깊은 우려를 공유한다. 이슬람은 ‘근본주의’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그 용어는 자부심을 지닌 집단의 표시로 미국 프로테스탄트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바로 지적한다. 아랍어 '우술'은 이슬람 율법의 근본원칙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한단어로 적절하게 번역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근본주의’란 용어가 번역의 빈약함을 지님에도 불구하고 통용화 되고 있다. 그럼으로 일각에서 폭력적인 방법으로 벌어지고 있는 부정적 의미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이슬람 신앙과는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이들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모범적인 다수의 이슬람 신자들과 함께 바라보는 것은 깊은 신중을 요한다.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로 세계 평화를 말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자신이 평화를 지니게 될 때 가능하다. 이슬람의 전통적인 올바른 가르침을 진정으로 지키는 사람들(하느님에 대한 믿음. 기도. 자선. 단식. 순례)은 마음이 정화되고 평화가 가득차기 때문에 그 안에서 폭력이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3. 이슬람의 지하드와 폭력적 근본주의자

꾸란과 이슬람 정통교리는 지하드(거룩한 전쟁)는 네 가지 방법으로 수행해야 할 하나의 의무라고 가르친다. 즉 마음, 입, 손 그리고 검(칼)의 지하드이다. 마음의 지하드는 인간 내면의 악한 욕망과 싸우는 것이고 입과 손의 지하드는 신앙을 지키고 바른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검(칼)의 지하드는 이슬람을 위협하는 적대자들과 맞서 싸우는 전쟁을 의미한다. 이 마지막 지하드의 내용이 폭력을 사용하는 근본주의자들에게 정당성과 합법성을 주장하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꾸란과 이슬람 교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세상의 법에도 자신이 목숨이 위험할 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정당방위를 인정하는 극히 예외적인 조항이 있다. 바로 검의 지하드 또한 이슬람 신앙이 적대자들의 공격으로 절대 절명의 위기가 발생할 때만 극히 제한적으로 인정하는 것인데 폭력을 사용하는 근본주의자들은 이것을 남용하고 있다. 사실 무하마드는 결국은 비폭력의 방법으로 승리를 이루었고 꾸란 또한 종교 안에서의 폭력과 강압을 단호히 반대하며 관용과 포용을 강조한다.


지하드를 폭력을 사용하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마우두디(1903-1979)와 쿠트브(1906-1966)이다. 마우두디는 범연대적 지하드를 주창하며 지하드를 이슬람의 정통교리화 한다. 이것은 지하드가 이슬람의 다섯개의 핵심교리(신앙. 기도. 자선. 단식. 순례)와 동등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혁명이었고 아무도 이슬람 역사상 이런 주장을 펼친사람은 없었다. 이런 경향은 신앙을 극단적이고 폭력성을 지닌 잘못된 방향으로 전개되게 된다. 바로 쿠트브는 마우두디의 영향을 받아 수니파의 실제적인 이슬람 근본주의 창시자가 된다. 그는 처음에는 극단주의자가 아니었다. 수용소 생활을 통해서 신앙을 가진 사람과 세속주의자들이 같은 사회에서 평화롭게 공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체험하게 된다. 그는 꾸란에서 말하는 관용은 오직 이슬람의 정치적 승리와 진정한 이슬람국가가 설립될 때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결국 1966년에 사형을 당하지만 후에 모든 수니파의 근본주의 운동에 영향을 미친다. 대표적인 조직이 바로 탈리반이다.


1994년 아프카니스탄에서 세력을 확장한 탈리반은 앞서 말한 이슬람의 정치적 승리와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는 이상을 지녔던 쿠트브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옛 이슬람의 관점으로 회귀한다. 이슬람 신앙의 지도자들이 정부의 지도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여성들은 베일을 써야 하고 공식적인 집회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직 이슬람 방송만이 허락되고 돌로 쳐 죽이거나 사지를 절단하는 이슬람식 처벌방식을 다시 도입하였다. 대부분의 탈리반은 동부 아프카니스탄과 북부 파키스탄에 있는 동부 이란어를 사용하는 파슈튼족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북쪽지역에서 지배권을 가지고 다투는 비주류 파슈튼족을 주로 공격대상으로 한다. 이러한 극단적 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는 꾸란과 무하마드 예언자가 금하는 것이다. 또한 소수집단에 대한 그들의 잔인한 학대는 꾸란의 정신에 전적으로 위배된다. 탈리반의 여성에 대한 차별은 무하마드 예어자와 초기 이슬람 공동체의 전통 관행과는 완전히 상반된다.


4. 이슬라엘 6일 전쟁 후 변화되는 이슬람 근본주의


앞서 설명한 원래 대부분의 이슬람 수니파 근본주의자들은 폭력과 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생겨났던 근본주의자들의 운동들은 모두가 강압적인 방법이 아닌 효과적인 방법을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키려 노력하였다. 1967년 이스라엘과의 6일 전쟁에서 아랍군의 굴욕적인 패배 후에 중동 전역에 믿음에 대한 일대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이집트 수상 나세르와 같은 지도자들의 구태의연한 세속주의적 정책들이 신용을 잃어가는 상황에서 무슬림(이슬람신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충실히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나왔다고 느끼고 각성하기 시작한다. 서구사회 안에서 세속주의와 민주주의가 공평하게 잘 운영되는 반면에 이슬람 사회 안에서는 보통서민들은 혜택을 못받고 일부 엘리트 계층만을 위한 것임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이 근본주의는 포스트모던 운동으로 볼 수 있는데 식민주의와 같은 집단주의적이고 광신주의적인 측면들을 거절한다.


이러한 상황 안에서 이슬람 사회 전역에 학생들과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환경들을 구체적으로 바꾸기 시작한다. 그들은 대학교와 공장에 이슬람 사원을 만들고 그곳에서 기도하면서 이집트 정치가이며 종교지도자인 하산 알 반나가 세운 새로운 무슬림 공동체를 표본으로 삼아 이슬람 신앙 안에서 세속주의 정치가들이 했던 것보다 더욱 더 국민들에게 봉사를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를 원했다.


학생들은 이슬람 학생들을 위한 공간으로서, 예를 들어, 그늘진 잔디 한 부분을 제공하든지 혹은 서로의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자유게시판을 허락하도록 요청한다. 이는 세속주의 사회에서 도외시 되고 소외되어 왔던 자신들이 이슬람 신자들의 권리를 주장한다는 의미다. 그들은 더 나아가 신성한 지역을 요구하는데 이는 이스라엘 유대교 근본주의자들이 West Bank를 점령하여 정착하여 살면서 아랍지역을 요구하고 그 지역을 유대교의 지배 아래 두기를 바라는 것과도 같은 방식으로 변화되기도 한다.


5. 무슬림 여성의 베일과 복장의 의미


무슬림 여성들은 베일을 쓰는 것은 식민지 이전시대로 돌아가는 상징으로 생각하는데 식민지 시대에 그들 사회에 존재해왔던 참되고 가치 있는 전통양식들을 파괴시키고 금지시켰던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시계를 뒤로 되돌려 놓는 것과는 다르다. 어떤 무슬림 여성들에게 베일을 착용한다는 것은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그들 고유문화의 전통성을 유지하면서 급변하는 현대사회의 요소들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현대사회에 적응해나가면서도 그들 자신들의 정체성과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는 올바른 이슬람 신앙을 잃지 않겠다는 것을 뜻한다.


다른 한편으로 베일을 쓴다는 것은 현대사회에 대한 무언의 비판으로 볼 수 있다. 성적인 문제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보이는 이질적이고 서구적인 강한 성적 욕망과 눈에 보이는 현세적 물질주의에 반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들의 몸에 죽은 사람의 몸을 감싸는 수의와 같은 이슬람 복장을 한다는 것은 내세를 향한 초월을 지향하고 있고 복장의 통일은 계급적인 차별들을 폐지하는 것을 뜻함과 동시에 서구사회의 개인주의를 넘어서 함께 나누고 보듬어 주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6. 호메이니 이란혁명


일부 수니파와 시아파의 근본자의들은 종교를 현대문화와는 동떨어진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정의하면서 신앙을 훨씬 의미 있고 영적인 측면으로 접근한다. 그들은 서구문화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문화적 기반위에서도 현대화가 가능하다고 무언중에 주장한다.


이란혁명(1978-1979)은 이런 관점에서 볼 수 있다.


1960년대에 이란의 시아파 성직자이자 정치, 종교지도자였던 호메이니(1902-1989)는 무하마드 레자 팔레비의 잔인하고 비합적인 정책에 항거하면서 이란 국민들을 거리로 불러 모았다. 호메이니는 팔레비를 야지드와 같다고 했는데 야지드는 카르발라(이라크의 도시의 하나)에서 후세인(예언자 무하마드의 손자이자 시아파 제3대 이맘)을 살해한 우마야드 칼리프(680-683)로 시아파 이슬람에서는 그를 정의롭지 못한 지도자의 전형으로 본다.


이란 무슬림들은 그런 독재자에 대항하여 싸울 의무가 있었고 이러한 사회주의자에 대해 냉정한 대중들은 호메이니에 호소에 응답했고 이것은 그들의 내면 깊숙이 흐르는 전통들을 불러 일으켰다. 호메이니는 국민들에게 풀뿌리민주주의를 호소했던 것이다.


러시아와 중국혁명은 둘 다 칼막스에 의해 19세기 비젼에 영감을 받았다면 이란혁명은 오직 20세기 이데올로기에 영감을 받았다. 호메이니는 근본적으로 시아파의 새로운 해석을 전개해 나갔다. 다시 말해서, 이맘(지도자)이 없는 상황에서는 오직 신비적으로 영감을 받은 신성한 법을 아는 법률가만이 국가를 합법적으로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 세기 동안 12 이맘파(시아파)는 성직자들이 정부에 참가하는 것을 금했으나 호메이니는 기꺼이 법률가 위임이론을 적용하였다. 혁명을 통하여 카르발라의 상징(후세인이 죽은 장소)이 지배적이었다.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전통적인 종교예식과 후세인을 기리는 거룩한 날은 기존 통치에 대항함을 보여주는 것이 되었다.


참된 신앙은 중동국가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강력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던 팔레비 왕국을 무너뜨리는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근본주의자들처럼 호메이니의 비젼 또한 왜곡되고 있었다. 테헤란에서 미국인 인질 억류와 후에 레바논에서 이란을 모범으로 삼은 시아파 근본주의자들의 인질 억류는 분명히 죄수들을 다루는 꾸란의 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꾸란에서는 존엄성과 존경심을 가지고 대해야 하고 가능한 자유롭게 해주라고 가르친다. 꾸란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쟁을 제외하고는 인질을 억류하는 것을 분명히 금한다. 신앙의 강요 또한 꾸란에서 금한다.


접으며 


앞서 언급한 흔히 메스컴이나 사람들안에서 얘기되어지는 "21세기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충돌" 문제는 잘못된 그리스도관과 이슬람관을 가진 서구문명과 아랍문명을 기반으로 한 부정적 의미의 종교 근본주의자들로 인해 생겨났다고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그리스도교=서구문명, 이슬람교=아랍문명 이란 잘못된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앞서 설명한 데로 부정적 의미의 근본주의자는 이슬람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유대교, 불교, 힌두교 등 다른 종교에서도 나타날 뿐 아니라 민족, 나라, 작게는 지역, 가문에게까지 삶의 전반에 나타난다.


서구문명은 자신들의 사회 안에서 생겨났던 배타적이고 부정적인 기독교 근본주의 용어를 이슬람 전체에 그대로 도입함으로써 참으로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는 대다수의 무슬림 신앙인들의 마음에 큰 충격과 상처를 입혔다.


이슬람 근본주의(Islamic Fundamentalism)의 용어는 서구세계, 특히 영어권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무슬림 세계에서는 거의 쓰여지지 않는다. 앞서 설명한 과격한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의 극단적인 세속화 반대운동에 처음 붙여졌던 이 용어가 1940년대 중동, 이슬람 세계에서 서구식 정치질서와 세속주의에 반대하는 이슬람 운동이 일어나자 이 용어를 신중치 못하게 극단적 근본주의자와 경건한 무슬림들을 구별하지 않고 전 이슬람에게 적용했다. 이것은 이슬람 원리주의는 반서구, 반 세속 정부를 외치는 모든 무슬림운동을 매우 악의적으로 해석하여 참 신앙생활을 하는 무슬림인들까지 적용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너무나 서구의 언어와 문명 그리고 메스컴에 영항을 받아 그들의 관점과 언어 그리고 보도 내용이 옳다는 타성에 젖어 있고 세뇌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이 곧 서구인이 아니듯 무슬림은 아랍인이 아니다. 모두가 산에서 흐르는 샘물을 마실 권리가 있는 것처럼 모든 민족이 자신의 생각과 언어와 행동으로 믿을 수 있다. 자신들의 언어와 문명으로 말하는 하느님만이 절대적인 것으로 안다. 서구문명의 근본주의자들의 눈에는 God, Deus는 하느님이고 알라는 하느님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최근 몇 년 동안 일어났던 아프카니스탄에서의 한국인 개신교 신자 피랍 사건과 최근에 있었던 터키와 모로코 등에서 추방된 개신교 한국 선교사 추방사건은 선교의 진정한 의미를 성찰케 해준 사건이다. 진정한 동기로 선교하러 간 것이냐 하는 것은 오직 하느님만이 아시는 것이지만 동기야 어떻든 그들의 신앙의 뜨거운 열정은 높이 살만하다. 그러나 신중한 식별력을 가지고 갔는지 아니면 자기만족적이고 일시적인 반짝 선교를 하러 간 것인지 겸허히 되돌아 볼 일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일부러 순교를 자처하러 가는 것은 복음의 뜻에 맞지 않다. 환영 받지못한 고장은 떠나고 박해하면 피신하라고 '뱀같이 지혜로운 처신'을 예수님은 오늘도 선교사들게 당부 하신다.


이슬람 지역에서 오랫동안 드러내지 않고 그들과 공존하면서 그리스도교 우월주의를 내세우지 않고 그들의 종교를 존중하면서 평화를 모색하는 숨은 크리스챤 선교사들은 물론 그곳에 거주하는 다른 한국인들에게도 위험성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는지 깊이 성찰해야 할 것이다. 이번 사건은 이슬람 선교를 준비하는 크리스챤 선교사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리라 믿는다.


이제 그리스도인들 먼저 자신부터 회개하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처럼 새로운 영안이 열려야 할 때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은 초월적 종교이기에 특정 문명이나 국가나 민족의 소유물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서구 문명이 그리스도교를 자신들의 것으로 아랍문명이 이슬람을 자신의 것으로 독점해 오면서 그 논리를 다른 민족들에게 힘과 폭력의 논리로 식민지화하는 경향을 보여왔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물론 그들 중에는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전파한 많은 성인들도 있음을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모든 민족의 자신의 고유한 언어와 사상과 문화의 관점 안에서 하느님을 신앙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사순시기에 잘못된 근본주의에 사로잡혀 살고 있지 않는지 우리 자신부터 겸허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오직 예수만'을 부르짖으며 말로만 우리 신앙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독선적 근본주의로 기울려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주님께서 꾸짖으신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


'오직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 받는다'는 생각으로 다른 종교보다 우월의식을 가지고 하느님을 진정으로 찾고 믿는 이들을 비방하며 개종하려는 낡은 생각에 사로잡힌 근본주의적 편협함으로 기우는 우리의 마음을 주님은 단호히 질타하신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다.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32).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


'예수'란 이름을 부르며 오직 찬양과 기도 안에서만 당신을 찾으려는 무사안일적인 우리 신앙인들 보다 현재 당신의 이름을 부르지는 않지만 행동으로서 굶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으신 이들을 극진히 대하는 당신의 자녀 무슬림 형제자매들이 더 하늘나라에 가까이 있음을 주님께서 영안이 뜨이지 못한 눈먼 우리 신앙인들을 깨우치고 계신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린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38-40).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익명의 무슬림이 될 수 있고 진정한 무슬림이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으며 불교적 신심을 가진 그리스도인, 무슬림적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타종교인과의 만남 안에서 발견 할 수 있는 영안이 뜨이길 소망해 본다.


주) 용어들은 아랍어 발음 표기를 기준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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