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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리스토텔레스와 지상의 철학

古典의 향기

by 巡禮者 2012. 5. 12.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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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리스토텔레스와 지상의 철학

 

 

1. 아리스토텔레스(BC 384~BC322)의 형이상학과 목적론

 

 

아리스토텔레스는 크러케 북동해면의 스타게이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케도니아 주치의로 이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일반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은 것으로 보인다.

 

17세에 그는 아테네로 가서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 등록한 후 그곳에서 20여년간 수학을 하게 된다. 그러나 플라톤 사후 아카데미아의 경영이 플라톤의 조카 스페우시포스에게 넘어가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카데미아를 떠나게 된다.

B.C343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대왕은 아들 알렉산드로스(당시 13세)의 스승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초빙하였고 3년동안 미래의 군주를 가르친 후 아테네로 돌아와 자신의 학교 '리케이온'을 세우게 된다.

 

                            

자신의 저서 '자연사'를 집필하기 위하여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다양한 동물을 가져오라고 명하는 알렉산더 황제
(Alexandre le Grand faisant porter à Aristote divers animaux étrangers afin qu'il écrive son " Histoire naturelle" vers 1672)
장 밥티스트 드 샹페뉴(Jean-Baptiste de Champaigne
 
'그는 리케이온에서 스승인 플라톤과는 아주 다른 자신의 고유한 철학 체계를 세운다. 수학에 천착했떤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과학을 신봉한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구체적인 것에서 출발하기를 원했다. 그런 그에게 사물이 이데아를 나누어 가지고 있고 그 사물의 세계 너머에 이데아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플라톤의 이론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었다. 그에게 어떤 본질은 현실적 사물 내부에 있는 것이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이데아의 세계를 현실의 세계로 끌어내린다.'

 

 

-  질료와 형상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현실세계뿐이다. 만약 이데아가 있다면 그것은 사물의 형태안에 있다.

사물은 질료(재료)와 형상(형태)로 나누는데, 모든 질료는 어떤 잠재력이 있고 이것을 현실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이 형상이 된다. 예를 뜰면 떡이 나타나는 것은 떡의 형상을 통해서이다. 이때 떡이라는 형상은 쌀이라는 질료를 필요로 한다. 결국 떡이란 쌀이라는 질료와 떡이라는 개념이 결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사물을 질료와 형상의 결합이라고 보았다.

 

- 네가지 원인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많은 변화를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의 원인을 설명하고자 했고 그것을 네가지로 나누었다.

 

1) 질료인 (그것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2) 형상인 ( 그것은 무엇인가?)

3) 작용인 ( 그것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4) 목적인 ( 그것은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지는가?)

 

책상의 예를 들면 책상의 질료인 나무는 질료인이 되고

책상의 형태가 형상인이 되며

목수의 노동은 작용인이고

완성된 책상의 유용성은 목적인이 된다.

 

결국 모든 질료란 형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된다.

질료는 형상을 갖추지 않았더라도 언제든 형상으로 완성될 가능성을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어 이러한 질료의 변화가능성을  가능태 potentiality 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질료가 책상이나 옷장의 형상을 가지게 되었을 때 ' 현실태'가 된다. 질료가 형상으로 실현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모든 변화는 가능태에서 현실태로의 발전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것은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발전하는 목적이 있다.

세계가 어떤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사유의 경향을 목적론이라고 한다.

살구씨는 살구나무라는 목적을 지니고 있듯이 모든 질료는 목적을 향하여 변화하는 끊임없는 운동속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세상은 목적의 끊임없는 이어짐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운동은 어디서 끝이 날까? 혹 어떤 의미도 없는 순환론이 아닌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끊임없는 운도 속에 있는 세계가 궁극의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고 믿었다. 그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없는 순수한 형상이라고 말한다.

 '부동의 동자 the Unmoved Mover', 또는 '절대자'로 표현되는 순수한 형상은 종교적인 신이라기 부다는 운동의 영원한 원리에 가깝다. 자신은 변화하지 않지만 모든 변화의 원인이 되고 세계는 순수한 형상을 그 목적지로 삼는 운동을 끊임없이 계속한다는 것이다.

 

2. 행복 - 실현되어야 하는 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선은 모든 사물의 목적일 뿐이다.

플라톤에게는 진리를 아는 것이 중요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그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 플라톤에게 선은 도달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선을 실현하기 위해 실천하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선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진정한 행복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행복을 단순히 만족과 쾌락으로 보지 않았다. 행복이란 어떤 물질적 수단으로 우리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덕 arete을 동반하고 이성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영혼의 활동이다.

 

행복이란 올바른 방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은 이성적인 부분을 통해 비이성적인 부분을 통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것은 노력없지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이성의 작용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덕이 바로 '중용'이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상태란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중용의 상태, 즉 적절한 비율로 조절된 상태이다.

 

예를 들어 용기의 덕은 비겁과 만용의 중용이며 절제의 덕이란 금욕과 방탕의 중용이다.

 

3. 도달할 수 있는 선으로서의 정치

 

 

    <호메로스 흉상을 바라보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렌브란트,1653

 

아리스토텔레스는 철저히 현실을 중심으로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본성상 사회안에서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운명적으로 국가 속에서 살게 되어 있다.

그는 국가도 다른 여러 사물과 마찬가지로 목적이 있다고 보았다. 국가는 단순히 삶의 영위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한 삶을 보장해주는 목적을 갖는다.

 

국가는 사람들이 좋은 삶, 행복하고 명예로운 삶을 누릴 수 있게 해 주는데 목적이 있다. 여기서 좋은 삶이란 물질적인 안락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도덕적이고 지적인 발전을 의미한다. 국가의 목적은 단순한 삶의 지속이 아니라 선한 삶인 것이다.

 

선한 삶의 추구를 위해 결정적인 것은 그 국가의 통치자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국가의 중심은 중간계급이다. 이 계급이 많아져 정치에 더 많이 참여할 수록 국가는 인간의 선한 살믈 보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왕이 무자비한 정치를 일삼거나 귀족들이 소수의 가진 자들의 편에서 통치를 하게 되면 선한 삶의 실현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불평등만 부각시켜 혁명의 감정만을 자극하게된다.

 

중산층의 정치 참여가 확대된다는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정치를 통해 자기를 실현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실용주의적은 정치관은 제도의 개선으로 향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사상을 요약한 것은 중용과 행복이다. 정치는 행복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그에게는 도달할 수 있는 선과 행복이 중요했기 때문에 플라톤의 이상적인 정치보다는 현실속에서늬 안정적인 정치를 추구했다.

 

 

3.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론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을 모방으로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예술은 인식과 완전히 다른 어떤 것으로 예술은 상상적인 것과 관련하여 욕망을 드러낸다. 이것이 카타르시스다.

 

카타르시스는 일종의 치유과정이다. 그에게 카타르시스란 감정들을 예술작품으로 전이시켜 제거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비극은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다. 비극은 아주 큰 고통과 슬픔의 감정을 모방함으로써 관객들에게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켜 관객들의 심리 내부에 있는 불안하고 무거운 감정을 몰아내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비극은 눈물을 통해 관객의 영혼을 정화시킨다.

 

 이렇게 예술의 기능은 치유적인 것이 되어 인식이나 계시와는 다른 것이 된다. 또한 예술은 이론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넓은 의미에서의 윤리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결국 예술의 규범은 영혼의 감정을 다스린다는 점에서 유용성이다. 예술의 역할은 모방속에서 인간 저신을 고양시키는 데 있다.

 

- 아래는 포털에서 퍼온 철학의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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