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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리스도교의 전파와 중세 그리스도교 철학

古典의 향기

by 巡禮者 2012. 5. 12.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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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리스도교의 전파와 중세 그리스도교 철학

 

1. 예수와 바오로 : 그리스도교의 출현

 

서양의 고대 세계는 그리스 철학에서 시작하여 그리스도교로 끝난다.

서양을 이해하는 두 가지 코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고대의 시작과 끝에 놓여있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예수는 이전의 율법을 부인하고 새로운 율법을 주겠다고 선언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니 사랑의 율법이다. 위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거시 그 율법의 '사랑의 율법' 으로 바꾸어 놓는다. ... 이전에 철학에서 문제가 되었던 사랑은 '에로스eros'로 표현되는 사랑,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정열을 의미하는 사랑이었지만 예수가 가르친 사랑이란 '아가페agape'라고 불리는 인간에 대한 신의 무한한 사랑을 의미한다. 신의 사랑은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고, 그것이 곧 자연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인간 역시 이러한 신의 사랑에 대해 응답해야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 의무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우리 주변의 이웃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아가페'의 사랑이 고대의 율법을 대신한다. '

 

예수의 '사랑의 율법'은 모든 세속의 법위에 두었으며 '사랑의 율법'은 평등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 고대 사회질서와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예수가 체포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리스도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유대교는 유대 민족을 대표하는 종교였고 여호와는 유대인들의 신이었다. 예수 역시 유대인이었고 그의 가르침 또한 이스라엘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여기에 결정적인 변화를 일으킨 것이 사도 바울이다.

 

 

- 사도 바오로과 그리스도교의 성립

 

유대인으로서 로마 시민권을 가졌던 사울은 율법학자의 교육을 받았고 율법의 이름으로 예수의 추종자들을 억압하는데 앞장서고 있었다. 당시 예루살렘의 그리스도교인들은 박해를 피해 각지로 흩어졌고 그들이 가장 많이 몰려 있던 곳이 다마스쿠스였다. 그들을 체포하러 가는 길에 사울은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는 영적 체험을 받고 눈을 멀게 된다. 시력을 잃은 사울은 다마스쿠스 교회지도자 앞으로 인도되었고 그곳에서 안수를 받은 사울은 눈을 뜨게 되면서 그리스도교인이 된다. (이때부터 그는 바오로이란 이름을 쓴다.) 

 

 

<다마스쿠스로 가는길의 바오로의 개종(회심) >카라바조 1600

 

'예수는 유대인이었고 그의 가르침은 이스라엘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의 사랑의 율법 또한 여전히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민족적 틀을 뛰어넘어 그리스도교가 세계종교로 발돋움 한데는 사도 의바오로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바오로은 예수를 단지 이스라엘 민족만의 메시아가 아닌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아로 탈바꿈 시킨다. 메시아를 통해 구워받는 것은 단지 유대인만이 아닌 세상의 모든 사람이 되는 것이다. 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인류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었기에 예수의 속죄를 믿으면 사람들은 영혼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와서 십자가를 통해 인간의 죄를 한 몸에 지고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이제 예수의 가르침은 진리가 되고 모세의 엄격한 율법은 사랑의 율법에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결국 바오로이 강조했던 것은 십자가로 상징되는 '신의 희생'과 죽은 자 가운데서 '신의 부활(극복되어야할 악인 죽음의 극복)', 그리고 모든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논리이다.

 

바오로의 등장 이후 그리스도교는 비로소 새로운 종교의 모습을 갖추고 세계로 전파되기 시작한다. 수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의 공동체가 생겨나며 교는 그리스도빠른 속도로 지중해 세계에 퍼진다. 그러나 그들은 제각기 다른 지역에 통일적인 규율이 없이 무질서하게 퍼져 있었다. 바오로 이후 아구우스티누스 (354~430)에 이르는 긴 시간은 통일적인 교리와 체계를 갖추어 나가는 시간이었다.'

 

 

다마스쿠스에서 개종을 한 바오로은 곧바로 이스라엘로 가지 않고 소아시아에서 포교활동을 한다. 그는 스스로를 '예수의 사도'로 선포한다.

 

 

바오로은 포교활동을 하며 교회를 세우고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건설한다.

이러한 종교적 공동체는 인류 역사상 처음 나타난 것이다.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 엘 그레코 베드로에 의해 로마 가톨릭 교회가 세워졌다면 바오로에 의해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울타리를 넘어 로마 끝가지 전파되었다.

<청소년을 위한 서양철학사>, 서용순, 두리미디어

 

2. 교부철학과 아우구스티누스

- 철학과 그리스도교

'그리스도교가 이론적으로 자신의 자리를 잡아가는 2세기에서 9세기 까지의 기독교 초기의 시기를 교부들의 시대라고 한다. 교부들이란 그리스도교의 이론가들로서 온갖 미신과 이단적인 주장에 반대하여 그리스도교를 지키는 신학자들을 가리킨다. 이 교부들의 노력을 통해 그리스도교는 일관적인 교리를 구축하게 된다.

 

초기 교부들의 활동은 이집트 지역의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교부들이 처음 맞닥뜨린그리스도교의 이단아들은 그노시스Gnosis파의 사상이었다. 그노시스는 '인식'이라는 의미이지만 이들의 인식은 이성의 합리성에 근거하기보다는 신앙을 위한 종교적인 인식이었고 신비주의적이고 미신적인 내용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교가 되기 전 그리스 철학을 공부했던 클레멘스라는 교부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인식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플라톤을 비롯한 고대철학과 신학을 결합시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오리게네스Origenes(185~254?)

 

그의 뒤를 잇는 교부인 '오리게네스'는 초기 교부시대의 대표적인 사상가이다. 철학과 그리스도교의 통일적 결합을 중시한 오리게네스는 신앙을 설명하는 방법은 이성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성서를 지극히 이성적인 관점에서 설명하낟. 이성을 통해 설명할 수 있는 신앙이야말로 가장 진실하다는 것이다.  그는 신플라톤주의와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받아 철학을 통하여 신학을 공고히 하려던 대표적인 교부라고 할 수 있다.  

 

교부의 시대, 교부들은 특히 플라톤 철학과 신플라톤주의의 학설을 차용하여 신앙의 체계화를 위해 노력하던 사람들이다. 이러한 시도들은 모두 신앙이 철학보다 우월하다는 전제하에 철학을 이용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들은 그리스도교를 하나의 원리아래 통일시키려는 노력이었고 그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립을 통해 결실을 맺게 된다. '

 

- 아우구스티누스 (교회의 아버지)

 

아우구스티누스 (354~430)

 

아우구스티누스는 북아프리카 누미디아 지방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는 이교도였지만 어머니는 독시란 기독교 신자였다. 젊은 시절을 방탕하게 보내기도 했던 그는 지식에 대한 지칠출 모르는 욕구를 지니고 있었고 15세에 수사학을, 19세에 키케로를 접하면서 철학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한때 마니교의 이원론에 의지하기도 했는데 그의 인생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 것은 밀라노 수사학 교수로 초빙된 384년이었다. 그곳엣 밀라노 주교인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듣고서 비로소 기독교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철학과 그리스도교 신학을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교그리스도의 사상체계를 완성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완벽한 존재에 대한 질문을 통해 신에게 접근하다. 그에게 육체적, 감각적 쾌락이란 덧없기만 한 것이었고 정신 역시 그것이 죄를 지을 수 있으므로 완벽한 것이 될 수 없었다. 그렇게 오류를 범하기 쉬운 정신만으로는 영원한 지식이나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영원한 진리란 신에게서 비롯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영원한 진리는 결코 유한한 정신에서 나올 수 없고, 오로지 신에게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신과 진리는 모두 영원한 것이기에 결국 진리의 존재와 신의 존재는 동일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에게 사물의 세계는 이러한 신의 존재와 활동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은 진리처럼 변하지 않는 존재이며 완전한 존재이다. 세상은 진리에 의해 창조되었으므로 비록 그 정도는 낮다 하더라도 역시 진리의 흔적을 지난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혼 또한 진리에 의해 창조되었으므로 진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결국 인간은 신이라는 존재를 통하여 그를 믿음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플로티누스의 주장과 비슷)

 

- 신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

 

아우구스티누스의 수많은 저작들 중 『고백록』과 함께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신국론』이다.

 

이 책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고유한 역사철학을 써내려 간다.

그가 살았던 4세기는 고대의 종말과 함께 중세로 접어드는 시기였다. 313년 밀라노칙령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이래 로마는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도들을 오로지 신에게만 열중하는 애국심없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던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로보 보여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를 변호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제국의 운명이 어찌되었던 간에 그리스도교는 계속해서 남아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신국론』의 내용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역사를 지상의 나라와 천상의 나라라는 두 개의 힘이 끊임없이 싸우는 과정으로 묘사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탐욕과 야심에 지배받는 지상의 나라는 국가에서 볼 수 있고, 아름다운 신의 나라는 교회에서 볼 수 있다. 이 두 나라는 비유적으로 표현된 것이고 국가 안에도 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가 어디에 있건 신의 나라에 속한 것이고, 세속의 이해에 물든 사람들이 있는 곳에 지상의 나라가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시대를 신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 사이의 긴장이 지배하는 시대라고 보았다. 로마의 멸망은 그리스도교도들의 탓이 아닌 로마제국에 팽배한 악덕때문이며 따라서 그것은 신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정점으로 하는 교부철학의 시대는 9세기까지 지속된다. 그 시기까지 중세의 봉건사회는 정착의 단계에 있었고 10세기경에 이르러서야 중세 기독교 사회는 안정기에 접어들게 된다.

 

3. 스콜라 철학과 토마스 아퀴나스

 

- 중세의 출발과 스콜라 철학의 성립

 

중세에 접어들어 유럽 곳곳에 수도원들에 소속된 학교가 생기기 시작한다.

 

 

 

 

                                                   샤를마뉴의 프랑크제국과 그의 친필 싸인

 

 

 

서유럽을 통일하고 서로마황제의 관을 받은 샤를마뉴는 고전학문의 재생을 위해 노력했다. 그가 투르에 설립한 학원에서는 많은 교사들이 배출되었고 유럽 각지에 학원이 설립되기 시작한다. 샤를마뉴사후 그의 대제국은 베르됭-메르센조약에 의해 분할되면서 잠시 침체기를 겪지만 11세기 들어 수도원과 학운을 중심으로 학문은 부활하기 시작한다. 12세기와 13세기를 거치면서 이들 학원의 일부는 대학으로 발전하고 그 전통에 오늘날까지 어이진다. 오늘날의 대학은 학문의 장소로서의 학원, schola가 발전한 것이다.

 

'유럽의 중세는 그리스도교로 통일되었던 시기다.  모든 사회는 기독교의 절대적인 지배와 영향력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고, 학문에서도 그것은 예외가 아니었다. 모든 학원은 주로 신학의 영역에서 출발하였고 철학 역시 신학에 봉사하는 '시녀'로서 학문의 영역에 존재했다. 그러나 스콜라의 학원이 오로지 신학으로만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었다. 신학과 철학 이외에도 법학이나 의학과 같은 학문이 학원에서 다루어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발전이 대학의 탄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의 철학은 스스로이 분야를 개척하기 보다는 신학과의 연관속에서만 의미가 잇는 것이었고 철학은 철저히 신학에 지배당하고 있엇다. 이렇게 '학원'에서 기독교 신학을 보좌하던 철학을 '스콜라 철학 scholasticism'이라고 부른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부활

 

스콜라철학의 특징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다시 수용했다는 데 있다. 기독교 성립기의 교부들이 신학을 위해 선택했던 철학은 신플라톤주의 철학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아랍권에서 널리 읽혔다가 유럽으로 다시 역수입되어 들어오면서 스콜라 철학의 중심이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의 철학자로 인정받아 '철학자'라는 말은 그대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지칭하는 단어가 될 정도였다.

 

- 토마스 아퀴나스 ; 중세 최대의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s(1225~1274) 이탈리아 나폴리 근처 아퀴노 백작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들이 고위성직자가 되기를 바란 아버지의 희망으로 5세에 몬테카시노 수도원에 들어가 9년동안 머물렀고, 14세가 되던해에 나폴리 대학에 입학한다. 이후 그는 학문과 가르침에 몰두하는 도미니크 수도사들의 생활에 감화받아 가족의 반대를 물리치고 도미니크 교단의 수도사가 된다. 그로부터 4년후, 파리대학에 입학하여 당시 최고의 현자로 불리던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의 문하로 들어가게 된다. 알베르투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재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철학자로 그리스도교의 신앙체계를 보다 정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철학과 과학의 중요성을 무척이나 강조한 사람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철학자들을 이용하는데 그쳤던 자신의 스승과는 달리 그들의 사상을 창조적으로 변형시키고 적용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사상을 발전시킨다.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을 비롯한 수많은 저작을 남겼고 그의 학설은 로마 가톨릭의 공식적인 사상으로 인정받게 된다. 가톨릭교회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향으로 이성을 통하여 신앙을 설명하고 증명하는 것에 많은 가치를 부여했고 인간의 이성에 의한 믿음을 참된 신앙으로 간주하게 된다. '

 

-아퀴나스의 종합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기독교 신앙을 창조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결함시킨 사람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최초로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 그리고 바울의 그리스도교 사상을 종합하였는데, 그것은 철학적으로 플라톤을 계승한 것이었다. 아퀴나스는 이러한 아우쿠스티누스의 종합 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결합시킨다. 아퀴나스의 사상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기독교 사상을 종합한 것이고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보급으로 가능해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당시까지 그리스도교와 동떨어져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이제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으로 자리잡는다.

 

신학자로서의 아퀴나스에게 관심의 대상은 이성과 신앙사이의 관계였다. 그에게 있어 철학과 신학은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충적인 관계이다. 철학과 신학은 모두 신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신학은 사물을 인식하는데 그다지 필요하지 않고, 철학은 신앙이 갖는 특수한 부분을 다룰 수 없다. 아퀴나스는 신의 존재나 영혼의 불멸성 등은 철학을 통해 증명가능한 것이지만, 삼위일체나 부활, 최후의 심판 같은 기독교적 진리들의 증명은 철학의 몫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그러한 교리들은 철학을 통해서는 증명불가능한 것이고 오로지 신학을 통해서만 다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아퀴나스는 이성과 신앙을 조화롭게 하기 위하여 각자에게 서로 다른 역할을 부여했고, 둘을 구분했다.

 

 

- 신의 존재 증명

 

이전의 안셀무스가  신을 '완전한 존재'라는 경험을 초월한 존재를 미리 가정하고 출발했다면 아퀴나스는 경험적 사실에 근거하여 신의 존재로 나아간다.

 

첫번째 증명은 모든 사물이 운동 속에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에 의해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운동의 인과적 성격을 생각하면 결국 더이상 다른 것에 움직이지 않는 '최초의 운동자'가 필요하다. 바로 그것이 제1의 운동자인 神 이다.

 

두번째 증명은 작용인을 통한 증명으로 경험 세계의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책상의 작용인이 목수라고 할 때 그 목수의 작용인은 목수의 부모가 된다. 원인들은 계속 이어지지만 그 원인들은 제1의 작용인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원인일 수 있다. 그 제1의 원인이 바로 神 이다.

 

세번째 증명은 필연적 존재를 통한 증명이다. 세계의 사물들은 '가능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모든 우연적인 것이 생기려면 반드시 필연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 결국 모든 우연적인 것은 필연적인 것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 필연적인 것이 바로 神 이다.

 

네번째는 존재의 완전성을 통한 증명이다. 사물의 완전성의 정도는 실제 아주 다양한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우리가 그 사물을 비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을 비교할 수 있는 어떠한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지고至高의 존재'가 없다면 비교는 불가능하게 된다. 그 지고의 존재는 완전성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서 그것이 곧 神 이다.

 

다섯번째 증명은 '세계의 목적'을 통한 증명이다. 아퀴나스는 비록 지성을 갖지 않았더라도 세계의 모든 사물들은 질서 정연하게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고 말한다. 마치 궁수에 의해 화살의 방향이 결정되듯이 그 사물들은 어떤 지성을 가진 존재에 의해 정해진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사물들을 목적으로 인도하는 지성적인 존재가 바로 神 이다

 

- 아퀴나스의 윤리와 정치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이어받아 윤리와 도덕을 행복의 추구와 동일시한다. 인간은 행복을 위해 자신의 목적을 충족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아퀴나스는 이러한 자연적 목적의 다른 목적 즉 자연적 요구를 벗어나는 '초자연적 목적'을 덧붙인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을 신에게서 찾는 것이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지만 자연적인 목적만을 추구하는 것으로는 행복을 얻을 수 없고 초자연적인 목적을 추구할 때만, 그 목적이 신으로 햐알 때만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완전한 행복이란 결국 최고의 존재이자 최고의 선인 '신'안에서만 발견되는 것이다.

 

 아퀴나스에게는 신의 은총을 통해 인간의 영혼을 타락 이전의 고결한 상태로 돌이키는 것이야말로 신이라는 근원으로 돌아가는 최고의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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