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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6) 지금, 서로 사랑하십시오 / 배광하 신부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0. 7. 31.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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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6) 지금, 서로 사랑하십시오 / 배광하 신부
부활 제6주일(요한 15, 9-17) : 하느님의 이름은 사랑
발행일 : 2009-05-17 [제2648호, 12면]

차별하지 않는 사랑

물이 수증기가 되려면 섭씨 100도가 되어야 합니다. 0도의 물이건 99도의 물이건 끓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 차이가 무려 99도라 하여도 결국 1도가 부족하면 물은 끓지 않습니다. 하나가 더 있어야 물은 수증기를 내뿜으면서 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100마리의 양 중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 그토록 애간장 끓이는 관심을 쏟으신 까닭은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물을 끓게 하는 1도나,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은 어쩌면 우리 가족에게서, 우리 단체에서, 우리 구역에서, 이웃에게서 여러 이유로 따돌림 당하고 있는 형제자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있어야 우리는 천국으로의 비상을 꿈꿀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사람을 차별하여 왔습니다. 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로, 나라가 같지 않아, 사상이 다르기 때문에, 믿는 종교가 같지 않기에, 고향이 틀리기 때문에, 출신 학교가 같지 않다는 등등의 이유로 쉽게 남을 배척하였습니다. 공평하지 못한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공평하지 못하고 차별 대우하여도 하느님께서는 세상 모든 이들을 받아들이시고 사랑하십니다. 이를 드디어 깨달은 베드로 사도는 오늘 이방인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의 집에서 이같이 설교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주십니다”(사도 10, 34-35).

진정 하느님께서는 세상 모든 이들을 당신 품안에 다 받아들이신다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실제로 베드로의 설교 도중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에게 성령께서 내리셨다고 사도행전은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농사철에 경운기 등 농기계를 쓰지만 예전에는 논밭을 갈 때 소를 부렸습니다. 대부분 소 한 마리를 부렸으나 험한 밭이나 땅을 깊게 팔 때에는 두 마리의 소를 부렸다고 합니다. 한 마리 소를 부리는 것을 ‘호릿소’, 두 마리의 소를 부리는 것을 ‘겨릿소’라 불렀다고 합니다. 농부가 두 마리 소를 부릴 때에는 오른쪽은 일 잘하는 소인 ‘안소’를, 왼쪽은 일이 서툰 소인 ‘마릿소’를 세워 일 못하는 소가 일을 잘하는 소를 따라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고 합니다. 소도 하물며 이러할 진데,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진정 부족한 이들, 나와 다른 이들을 틀렸다 할 것이 아니라 배우도록 일깨우며 함께 가야 합니다.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의 기도는 가끔 폭소를 자아내게 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여자 어린이가 강아지를 잃어 버렸는데, 어린이미사 기도 중에 눈물을 흘리며 강아지가 돌아오지 않아도 좋으니 보신탕집에 끌려가지 않게 해 달라고 하여 곁에 있는 아이들도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어린이들이 하느님께 드리는 편지를 소개합니다. 동심의 마음으로 읽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하느님,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을 대라는 건 알겠어요. 그런데 하느님은 여동생이 눈을 찌르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하느님, 저번 주에는 비가 3일 동안 계속 내렸어요. 노아 방주처럼 될까봐 걱정했어요. 하느님은 노아의 방주 안에 무슨 동물이든지 두 마리씩만 넣으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우리 집에는 고양이가 세 마리나 있어요.”

어찌 이 같은 어린이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세월 따라 늘어가는 것은 나이만이 아니라 죄와 잔꾀와 거짓으로 얼룩진 흉물스러움입니다. 이 꼴 보기 싫은 죄 많은 어른들까지도 주님께서는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죄인인 우리를 친구처럼 생각하시어 당신의 목숨을 다 내어 놓으시는 사랑의 완성을 보이시겠다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때문에 요한은 하느님의 사랑을 따라 살자고 강조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1요한 4,7).

이어서 예수님께서도 또다시 우리가 잃었던 사랑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은 사랑할 수 있는 시간도, 만남의 세월도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 빠른 세월의 흐름 속에 우리는 행복을 만들 수도, 사랑할 수도 있는 시간과 기회들을 얼마나 헛되이 흘려보냈는지 모릅니다. 이제와 후회하면 이미 때는 늦은 것입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시작의 때인 것입니다. 지금 당장 화해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기회는 영영 오지 않는 법입니다. 죄 많은 우리에게 사랑의 주님은 오늘 또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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