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복음생각] (500) “제가 다시 볼 수 있게…”/배광하 신부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0. 7. 30. 15:37

본문

 

[복음생각] (500) “제가 다시 볼 수 있게…”/배광하 신부

연중 제30주일 (마르코 10, 46~52) : 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고치시다
발행일 : 2006-10-29 [제2522호, 6면]

- 아름답고 놀라운 기적의 세상 -

볼 수 있는 눈

어떤 사람이 스승의 뛰어난 명성을 직접 확인하려고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스승의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스승께서는 어떤 기적들을 행하셨습니까?” 제자가 말하였습니다. “글쎄요, 기적 천지지요. 당신 나라에서는 하느님께서 어떤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시면 그걸 기적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행하면 그걸 기적으로 생각합니다.”

인도의 ‘앤소니 드 멜로’ 신부님의 글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주 기적과 표징을 주님께 요구하여 왔습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가지게 되는 수 없는 기쁨 안에서 기적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살아가는 모든 것이 되돌아보면 기적 투성이인 것을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프랑스 매화마을 명상센터의 ‘팃낫한’ 스님도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이 순간 살아있는 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기적은 물위를 걷는 것이 아니다. 기적은 지금 이 순간 대지 위를 걷는 것이다. 이 순간의 평화와 아름다움과 만나는 일이다.”

내 주위를 둘러보면 모든 것이 기적 투성이이며 기적을 만들 수 있는 것뿐입니다. 다만 우리의 눈이 그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기적이 없어 보이는 것뿐입니다.

성경은 자주 죽은 자를 잠들었다고 하며 살아있는 자를 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눈뜬 이를 눈멀었다 하고 눈먼 이를 볼 수 있는 복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신비하고 아름답고 놀라운 일들이 더 많이 존재합니다. 볼 수 있는 육신의 눈으로 교만에 젖어 있을 때, 우리는 그 아름다운 것들을 놓쳐 버리게 됩니다. 그리하여 온통 세상적인 것들만 내 시야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파묻혀 그것이 전부인양 착각하며 집착을 보이다 끝내 허무하게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것은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우리가 세상 속에서 눈멀고 살았다면 이제라도 타는 목마름으로 천상의 것들을 볼 수 있도록 주님께 외쳐야 합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 10, 51)

어린 왕자 이야기

‘생 텍쥐페리’는 그의 작품 '어린 왕자'에서 세상에 눈먼 어른들에 대하여 신랄하고 우화적으로 고발합니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당신이 새로 사귄 친구에 대해 어른들에게 이야기해 주면, 그들은 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물음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 친구의 목소리가 어떻게 들리는지? 가장 좋아하는 경기가 무엇인지? 나비를 수집하곤 하는지?’와 같은 질문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 애는 몇 살이니? 몇 명의 형제가 있니? 그 애 아버지는 수입이 얼마나 되니?’ 라고 묻는다.

어른들은 단지 이러한 숫자들을 가지고 새 친구에 대해 무언가 알게 됐다고 생각한다.

어른들에게 ‘창턱에는 제라늄 화초가 자라고, 지붕에는 비둘기들이 있는, 장밋빛 벽돌로 지은 아름다운 집을 보았다’고 말하면 그들은 그 집에 대해 조금도 상상해 내지 못할 것이다.

대신 ‘2만 달러나 나가는 집을 보았다’고 이야기한다면, 그들은 ‘야, 정말 좋은 집이구나!’라고 말한다.”

결국 어른들은 수 백만 장미 꽃밭에 묻혀 있으면서도 단 한 송이의 장미꽃도 볼 수 없는 눈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둘러보면 온통 아름다움이 가득 넘쳐나고 사랑해야 할 것들이 쌓여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자주 잊어버리고 살았다면 우리의 눈은 감고 있는 것이며, 그 같은 감은 눈으로는 하느님을 볼 수 없는 어둠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신이 세상에 대해 뜬눈을 가졌어도 영적인 눈이 멀었음을 인식할 때, 그 때야말로 구원이 가까이 온 것입니다. 그럴 때 오늘 복음의 눈먼 소경처럼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는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비참한 신세였고 더구나 앞을 볼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자주 우리는 우리의 처지가 세속의 여러 유혹 때문에 가련한 신세가 되어 있다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온갖 체면을 무릅쓴 채 목놓아 부르짖게 되어 있습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 48)

오늘 소경에게 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가 나락에 떨어진 소경 거지는 멈출 수 없습니다. 우리 또한 영적인 순수를 볼 수 없는 처지임을 인식하며 구원의 눈을 열망하며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 10, 51)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