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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향기2: 월터 J. 취제크의 러시아에서 그분과 함께

宗敎哲學

by 巡禮者 2012. 8. 18.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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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향기에 취하다] (2) 월터 J. 취제크의 "러시아에서 그분과 함께"
 
신중신(시인, 전 한국가톨릭문인회장)
 
 
▲ 국내에선 바오로딸에서 번역, 두 권으로 출간된 월터 J. 취제크 신부의 「러시아에서 그분과 함께(With God In Russia)」 1ㆍ2권 표지.
 
 
가톨릭 소재의 문학작품들
 
신앙을 제재로 한 문학작품은, 우리가 볼 수 없고 감각하기 어려운 절대자의 존재, 그 섭리의 실체를 우리의 가시적 반경 내에 형상화함으로써 신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이로 하여금 현실적으로 느끼며 구체적으로 깨닫게 하는 데에 기여한다.
 
소설 장르에서 가톨릭 쪽의 경우, 신부를 주인공으로 삼아 교의를 구현하려는 열의를 통해 일반인의 폭넓은 관심을 얻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널리 알려진 장편 몇 편이 그 예증이 된다.
 
베르나노스의 「어떤 시골신부의 일기」는 작은 마을에 부임해 타성에 젖고 교활함에 길들여진 인성의 벽 앞에서 무기력한 초상으로 주저앉는 앙브리꾸르 본당신부의 모습을 조명한다. 그레엄 그린의 「권력과 영광」은 좌파 혁명이 돌발하자 일시에 쫓기는 신세가 되어 나약한 위상으로 하루의 연명에 급급하는 위스키 신부를 그린다.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는 영국 해외 선교단의 일원으로 중국에 파견돼 모진 시련을 겪고 초라한 외양으로 귀국한 치점 신부의 행로를 펼쳐 보인다.
 
이들 작품은 외관상 한결같이 패배자의 기록이라 할 만하고, 경우에 따라선 반교회적으로 오해될 만큼 사제의 그늘진 면과 교회의 일그러진 모서리, 이런 이야기 방식에 용해된 '이해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뜻'으로 읽혀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행간에 가려진, 밑바닥에 흐르는 속내에 있어선 하느님의 사랑, 그 현존하심,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승리와 가톨리시즘의 본질을 구현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러시아에서..." 작품은
 
한데 월터 J. 취제크의 「러시아에서 그분과 함께(With God In Russia)」(전 2권)는 소설과 유사한 화제를 담고 있지만 논픽션[手記]이므로 그 낱낱 장면은 모두 사실(fact)에 입각한다. 허구와 달리 이는 진상(reality)을 서술한다. 화자(話者)는 스탈린 강권 통치 아래 현세의 아수라도(阿修羅道)라 할 강제 노동수용소 진창구렁 속에서 살아 돌아왔다. 모두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남았습니까?"하고 묻게 마련이고, 그때마다 그는 "하느님의 섭리겠지요"하고 서슴없이 대답하는 문맥 속에서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주님을 섬기면'이라는 성경의 진리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수기는 상식을 초월하는 놀라운 기록이다. 적어도 20세기에 있어 가톨릭교회의 개가로 손꼽을 만한 귀중한 성과라 하겠다.
 
미국 국적인 저자 취제크 신부는 신학생 시절 예수회에 입회, 로마 유학 중에 무신론이 팽배한 소련 선교를 위한 바티칸 정책에 따라 일단 폴란드로 간다. 한데 곧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그가 사목하는 곳이 나치 독일 점령지가 되기에 이르렀고, 그 위기의 와중에 본래 목표대로 소련에 잠입하는데 성공한다. 신분을 속인 채 전쟁 물자의 보고라 할 우랄산맥 지대 노동자 모집에 자원해 간 것이다.
 
그는 이때부터 비밀경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우랄에서 1년여에 걸쳐 신앙의 불씨를 일구던 중 체포당해 모스크바 정치범형무소 루비안카에서 오랜 심문과 취조를 받고는 예정된 코스대로 시베리아 강제노동에 수용되는 신세가 됐다. 그것도 최악이라 할, 북극에 가까운 혹독한 추위가 정신과 육체를 할퀴는 두딘카와 노릴스크로 말이다.
 
루비안카의 취조라 하면, 스탈린의 제거 대상이 된 볼셰비키의 혁혁한 노병들이 온갖 회유와 고문을 견뎌내다 종내엔 굴복하여 반국가 스파이라는 죄목에 사인을 한 후 처형장 이슬로 사라져 간 곳이다. 노릴스크는 형기를 마치고 풀려나는 게 기적이란 소문이 파다한 소련의 악명 높은 강제 노동수용소이다. 취제크 신부는 '바티칸 스파이'란 낙인이 찍혀 이런 험지에서 15년 형을 치르고, 석방 후에도 이른바 '제한 자유인'으로 살다가 우여곡절 끝에 미국으로 귀환했다.
 
이런 행형 제도는 서방세계에선 얼마나 낯선가? 도스토예프스키에 의해 제정러시아 시대 시베리아 유형지 실상이 장편 「죽음의 집의 기록」을 통해서, 그리고 소비에트 치하에선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수용소 군도」에 의해서 그곳의 반인륜적이며 잔혹한 노동 실태가 만천하에 알려지게 됐다. 자국민의 픽션을 빌은 폭로에다 명예롭게도 외국 가톨릭 신부에 의한 논픽션이 가세한 셈이다.
 
취제크 신부는 불행 중 다행으로 몇 가지 의지할 것을 갖추고 있었다. 폴란드 이민 2세라는 점, 타고난 강건한 체력과 그 체력을 유지하기 위한 후천적 성향,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지켜주는 하느님 손길을 믿고 그분의 의중에 여일하게 감사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는 어떤 극난의 처지에 있을 때에도 기도에 소홀하지 않았고, 그 기도의 힘이 자신을 보호해 줄 것임을 잊지 않았다. 이 글은 그에 대한 반영에 다름 아니다.
 
노릴스크 수용소의 벽돌공장에서 수인들이 처우 개선이라는 요구사항을 내걸고 사보타지(태업)를 해서 경비대와 대치하며 죽음의 항거를 할 때였다. 그는 벼랑 끝에 몰린 심정으로 견디기 어려운 자기 연민과 고독감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 절체절명의 찰나에 솟구쳤던 생각을 그는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 나는 마음속으로 반문했다. "정말 하느님도 너를 잊으셨다고 생각하는가?… 바로 그 순간 나는 하느님 뜻을 완전히 믿는다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심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확고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20세기 가톨릭교회의 개가
 
이 수기가 20세기에 있어 가톨릭교회의 개가라는 긍지는 도처의 국면들이 보증한다. 첫째, 세계가 공산주의 블록으로 인해 반분돼 냉전시대에 접어들자 보편교회인 가톨릭은 종교의 싹이 잘린 그 블록, 특히 종주국인 소련에 복음을 비춰야 한다는 사명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역대 교황은 얼마나 노심초사했으며, 전 세계 가톨릭 공동체는 러시아를 위해 얼마나 많이 기도 지향을 두고 적극적으로 기도 캠페인을 펼쳐왔던가?
 
둘째, 이 사명에 따라 다수 성직자가 그곳 수용소에서 선교에 매진하며 모진 고초와 박해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취제크 신부는 그 일원으로, 주로 폴란드인과 독일인, 리투아니아인 등을 대상으로 한 라틴 전례는 물론, 잠입하기 전에 교육받은 동방 전례로 정교회 신앙에 목마른 러시아인을 비롯한 슬라브 민족에게 미사를 드리는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다. 이럴진대 이 책이 동토에도 하느님 빛이 면면히 비쳐졌다는 확고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밖에도 이 수기 자체의 문학적 매력도 빼놓을 수 없다. 편견이나 군더더기가 없는 문장, 힘찬 메시지, 그리고 읽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진정성이야말로 이 논픽션의 문학적 요체다. 이 진정성은, 기차간에서 호송장교가 떨어뜨려 의자 밑으로 굴러들어간 빵조각을 호송병 몰래, 애면글면 애타게 손에 넣어 목구멍으로 꿀컥 삼키는, 굶주린 짐승의 경계에서 충분히 일별된다. 이 경우, 비루함도 한낱 인간적 슬픔으로 카타르시스가 되기에 한껏 순연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월터 J. 취제크(Walter J. Ciszek)는
 
 
폴란드계로 1904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출생했다. 신학교에 재학 중 예수회에 입회한 뒤 1934년에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에 유학, 이태 후에 사제품을 받고는 러시아 선교를 목적으로 폴란드에 건너갔다.
 
1940년 봄, 위장 이주노동자로 소련 잠입에 성공했으나 곧 체포당해 장기 취조를 받고 15년간 노동형 언도를 받았다. 부틸카 수용소에 수감생활을 하다가 시베리아 강제 노동수용소로 이감됐다. 노동 조건이 가장 험난한 곳에서 극한의 추위와 굶주림을 견뎌내며 석탄 수송과 탄광, 구리공장, 각종 노동현장 등을 전전하다 마침내 형기를 끝내고 '제한 자유인'으로 노릴스크와 아바칸에서 거주하며 선교활동을 수행했다.
 
러시아에 체류한 지 23년 만에, 미국과 소련 간에 각각 2명씩 인적 교환이 성립되어 1963년 귀환했으며 1984년 선종했다.
 
[평화신문, 제1006호(2009년 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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