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고전의 향기4: 엔도 슈사쿠의 침묵

宗敎哲學

by 巡禮者 2012. 8. 18. 08:23

본문

[고전의 향기에 취하다] (4) 엔도 슈사쿠의 "침묵"
 
불러도 대답없는 주님, 눈물 흘리고 계셨네
 
정길연(베트라, 소설가)
 
 
▲ 김윤성(가브리엘) 시인이 우리말로 옮겨 바오로딸에서 출간한 엔도 슈사쿠의 「침묵」 한국판.
 
 
고백하면, 나는 오랫동안 교회를 떠나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내게 종교를 물으면 나는 종교주의자가 아닙니다, 라고 대꾸했다.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지구상에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는 그 어떤)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모든 독선과 야만, 종교가 야기한 모든 갈등과 적대감에 대체로 아전인수하는 종교인들의 모습에 실망했기 때문이었다. 현대 종교가 외적 성장에 치우쳐 지나치게 화려해지고 타성적이 돼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교회에 나가던 동안 나는 제자리걸음이었다. 내 믿음을 믿지 못했다. 순정하지 않았고, 다분히 기계적이었다. 습관적 출석과 입에 밴 기도문 암송으로 외형상 착실하게 종교적 행위를 했을 뿐이었다. 물론 내 영혼이 허약한 탓이었다.
 
다시 조심스럽게 고백하면, 교회에 나가지 않는 동안 나는 오히려 더 꾸준히, 더 집중적으로 성경을 읽었다. 희미하게나마 길이 보이는 듯했다. 회의하고 투정하고 고꾸라지고 일어나면서, 말씀 안에 모든 대답이 다 들어 있음을 조금씩 깨달아갔다. 여전히 교회에 나가지는 않으면서, 비록 종교주의자는 아니지만 믿음은 가지고 있다고, 하느님은 존재한다고 떠듬거릴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완전한 승복은 아니었다. 나는 아직 내 믿음에 대해 내놓고 말하기가 불편하다. 지구촌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는 악몽 같은 현실을 떠올리면 더더욱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총칼을 앞세운 군인들에 의해 제 땅 제 집에서 쫓겨나는 난민들, 핍박받는 하층민들, 착취당하는 노동자들, 맨발로 쓰레기더미를 뒤져야 하는 어린아이들……. 이 불공평하고 절망적인 세계를 납득할 수 없어서다.
 
하느님의 손이 절대적으로 절실한 이 순간에도 어떻게 아무런 메시지가 없을 수 있는가? 도대체 왜 이런 세상을 내버려 두시는가?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다시 찾아 읽게 된 것도 어쩌면 그 질문과 새롭게 맞닥뜨리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엔도 슈사쿠의 1966년 작 소설 「침묵」은 17세기 일본 규슈 나가사키 지방의 가톨릭 박해 상황을 배경으로, 배교를 강요당하는 포르투칼 신부 페레이라와 로돌리코의 내밀한 고뇌와 번민을 다룬 소설이다.
 
스승 페레이라 신부의 배교 소문을 확인하고자 일본으로 밀항한 로돌리코 신부 일행은 교활하고 비굴한 인물 기치지로와 피할 수 없는 악연으로 얽힌다. 동료 신부 가르페가 순교한 뒤,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기듯이 기치지로 또한 로돌리코를 팔아넘기지만, 그러면서도 끝까지 그의 주변을 맴돌기를 그만두지 않는다.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던 로돌리코를 후미에(성화판을 발로 밟음으로써 배교를 증명하는 행위)로 이끈 건 옥사 너머로 들려오던 코 고는 소리의 진실이었다.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 직전에 들었던 소리이기도 했다.
 
"나도 저 소리를 들었다.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린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말이다."
 
그 말이 그치자 다시금 코 고는 소리가 높게 낮게 귀에 들려 왔다. 아니, 그것은 이미 코 고는 소리가 아니고,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린 사람들의 지쳐 떨어진 숨이 끊길 듯 끊길 듯한 신음소리라는 것이 신부에게도 지금은 뚜렷이 느껴졌다'(195쪽).
 
결국 로돌리코 신부 또한 '자기 생애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 온 것, 가장 성스럽다고 여겨 온 것, 인간의 가장 높은 이상과 꿈으로 가득 차 있는' 성화판에 발을 올리고 만다.
 
'발에 둔중한 아픔을 느꼈다.(……) 이 발의 아픔. 이때 밟아도 좋다고 목판 속의 그분은 신부를 향해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은 바로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 너희들의 아픔을 나눠 갖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졌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부가 성화에다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닭이 먼 곳에서 울었다'(201쪽).
 
소설은 배교자 바오로, 오카다 산우에몬이 된 로돌리코가 고백성사를 애원하는 기치지로의 청을 들어주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경멸하고 저주했던 기치지로야말로 나약한 인간의 표상이며, 그조차 용서하고 품는 것이 예수의 사랑임을 깨달으면서.
 
'성직자들은 이 모독적인 행위를 몹시 책할 테지만, 나는 그들을 배반했을지 모르나 결코 그분을 배반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와는 아주 다른 형태로 그분을 사랑하고 있다. 내가 그 사랑을 알기 위해서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226-227쪽).
 
교회법으로 보자면, 페레이라와 로돌리코의 후미에는 배교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그 종교적 불명예는 예수 사랑이라는 통찰에서 행해진 것이다. 그것은 처절하고도 숭고한 자기희생, 또 다른 의미의 순교다. 스스로 아름답고 자랑스럽고자 하는 순교는 종교적 명예심에 붙들린 제스처에 불과하다.
 
▲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성화 '후미에(ふみえ, 踏み繪)'. 에도(江戶) 막부는 1628~1858년 해마다 나가사키 주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나 성모를 그린 성화나 목판, 동판 등을 밟고 지나가도록 함으로써 가톨릭 신자들을 색출하려고 했다. 이같은 절차를 '후미에'라고 불렀고, 때론 그림 자체를 후미에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하느님은 이 참혹한 고통의 순간에 어디 계시는가?
 
「침묵」에서도 되풀이하는 이 질문은 우리가 크고 작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부당한 폭력 앞에 정의가 무너지는 순간을 목격할 때마다, 또는 인간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재난이나 가난으로 비참함을 느낄 때마다 하늘에다 종주먹을 들이대듯 던지는 물음이기도 하다.
 
나 역시도 가슴이 먹먹할 때, 그 먹먹한 가슴을 손바닥으로 짓누른 채 차오르는 설움을 토해낼 때, 모멸감과 무력감에 치를 떨 때에야 비로소 다급하고도 간절하게 하느님을 찾지 않는가.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 앞에 현현하지도, 직접 나서서 어떤 대답을 들려주지도 않는다. 신의 자비로 고통을 면할 방법은 없다. 고통은 오롯이 내 몫이다. 껴안아 내 뜨거움으로 녹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답이나 해결책을 듣지 못할 때 버릇처럼 하느님이 침묵한다고 절규한다. 그러는 동안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가?…라고. 페레이라와 로돌리코가 배교 직전에 깨닫게 된 것처럼, 침묵하고 계시는 게 아니라 함께 괴로워하고 계시는가?…라고.
 
정녕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라면, 고통의 눈물은 닦아주시리라.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 비로소 평화를 허락하시리라.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1996)는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엔도 슈사쿠는 가톨릭 신자였던 이모의 영향으로 열두 살 때 세례를 받았다. 1943년 게이오대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1950년 프랑스 리옹대학으로 건너가 현대 가톨릭문학을 공부하던 중 결핵으로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2년 반만에 귀국해 본격적으로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종교와 인간에 대한 성찰이 녹아 있는 묵직한 주제의 작품들을 많이 발표한 걸로 알려졌으나, 의외로 밝고 유머러스한 문체로 일상적 이야기들을 써내려간 산문으로도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가톨릭문학과 순수문학을 잘 아우른 격조 있는 작품들로 양쪽에서 모두 성공적 평가를 받은 행복한 작가이기도 하다.
 
대표작으로는 종교적 색채가 짙은 소설 「침묵」 「바다와 독약」 「그리스도의 탄생」 등이 있으며, 이 외에도 「백인」 「여자의 일생」 「지금은 사랑할 때」 등 작품을 남겼다. 신쵸샤 문학상과 마이니치 출판문화상,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했으며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여러 번 거론됐다.
 
최근에는 「택시 드라이버」 「좋은 친구들」 등 영화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2010년쯤 개봉 예정으로 「침묵」의 영화화 작업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린다.
 
[평화신문, 제1012호(2009년 3월 29일)]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