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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에서의 종교 간 대화 40년

宗敎哲學

by 巡禮者 2012. 8. 18.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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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에서의 종교 간 대화 40년
 
이상택(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 아시아 담당 서기관, 대구대교구 신부)
 
 
1. 들어가는 말
 
지금부터 꼭 40년 전 성령강림 대축일이었던 1964년 5월 17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한창 진행되는 가운데 교황 바오로 6세는 세상 사람들에게 로마 교황청 안에 다른 종교와의 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한 기구 하나를 곧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틀 뒤인 5월 19일, 바오로 6세는 바티칸에 비(非)그리스도교 사무국(the Secretariat for Non-Christians)이라는 새로운 독립 부서 설립을 규정하는 문헌을 발표했다. 이 비그리스도교 사무국을 1988년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좀 더 긍정적으로 다시 이름 붙인 것이 지금의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Pontifical Council for Interreligious Dialogue)이다.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 사이의 만남이야 인류 역사 이래 부단히 있어온 사회적 현실이었지만, 한 종교가 다른 여러 종교와의 관계를 증진하고자 공식적인 창구를 개설한 것은 사실 인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역사학자 토인비(A. J. Toynbee)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로 종교 간의 이러한 만남, 특히 그리스도교와 동양 종교와의 만남을 꼽았다. 지난 40년간은 실제로 역사상 처음으로 그리스도교와 다른 종교들이 열린 마음으로 서로 진지하게 만난 시기였다. 이 만남의 시기는 인간의 참된 가치들, 그 가운데에서도 특별히 인간의 영적인 가치가 물질주의, 소비주의, 쾌락주의 등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진 때와도 일치한다. 또한 이 만남은 세계의 평화와 정의 그리고 창조계의 질서 등이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위협받아 온 시기에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종교들의 만남은 종교인들에게 이러한 시대적 도전에 함께 대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종교 간 대화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진행되어 온 것은 결코 아니었다. 종교 간 대화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 상대편의 의도에 대한 의심, 문화적 차이와 사회 정치적 요인 등은 서로에 대해 방어적이거나 또는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일은 참된 종교 간 대화를 위해 여전히 남아있는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지난 40년 동안 아시아에서 이루어져온 종교 간 대화의 실제를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어려움과 도전 그리고 그 열매를 탐색해 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2. 종교 간 대화의 네 양식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는 1984년 “다른 종교인들에 대한 교회의 태도”(The Attitude of the Church towards the Followers of Other Religions, 간단하게는 “대화와 사명(Dialogue and Mission)”으로 불린다.)라는 문헌을 발표했으며, 1991년에는 교황청 인류복음화성과 함께 “대화와 선포(Dialogue and Proclamation)”라는 문헌을 발표했다. 이 두 문헌에서는 종교 간 대화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양식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정의했다. 물론 이 네 가지는 서로 독립된 것이라기보다는 함께 연관된 대화의 양식이다. 아시아 교회의 종교 간 대화의 실제를 살펴보는 데도 이 네 양식은 유용한 준거가 될 수 있겠다.
 
1) 삶의 대화(Dialogue of Life)
 
삶의 대화를 통해 서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열린 정신과 선한 마음으로 서로의 기쁨과 슬픔, 문제와 걱정거리를 함께 나누며 이 세상을 살아간다. 이 삶의 대화는 가정, 이웃, 지역사회 안에서 다양한 상황을 통해 전개된다. 일상적인 접촉, 서로를 앎, 개방과 우정 등은 이 대화의 전제 조건이다. 삶의 대화를 통해 서로에 대한 선입견이 극복되고, 긴장이 완화되며, 폐쇄적인 사고방식이 교정된다.

인종적, 문화적, 종교적 소수자가 같은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이 삶의 대화를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삶의 대화는 언제나 가장 중요한 종교 간 대화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종교적 근본주의와 과도한 민족주의의 발흥으로 종교적 광신과 비관용이 상이한 종교인들 사이의 평화적 공존을 날이 갈수록 어렵게 만드는 현재의 아시아 여러 나라의 상황을 생각할 때 이 삶의 대화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삶의 대화를 증진하고자 하는 다양한 시도들이 지역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 왔다. 서로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이 자기의 생각이나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센터 또는 친교와 협력을 고무 진작하는 단체의 설립은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예이다. 또한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는 종교인들이 서로의 중요한 축일을 맞이하여 인사를 나누거나 서로를 방문하기도 한다. 여기서 또 언급할 수 있는 것이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에서 해마다 불자들과 힌두교도 그리고 회교도에게 그들의 가장 큰 축제일을 맞이하여 보내는 축하 메시지이다. 이 메시지는 같이 첨부되는 지역교회의 축하 메시지와 더불어 그리스도인들이 이들 세 종교의 신자들에게 호의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오고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일상생활을 통해 이 삶의 대화를 하도록 불림을 받는다. 특별히 다양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요인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이동이 점점 보편화되고 가속화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이 소명은 날이 갈수록 중요성을 더해간다고 할 수 있겠다.
 
2) 행동의 대화(Dialogue of Action)
 
행동의 대화는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종교인들 사이에 무한한 협력의 장을 열어준다. 사실 대부분의 아시아 전통 종교들은 교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사회적 영역에 대한 관심이 그렇게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 영역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헌신은 이들 종교에 커다란 영감과 자극을 불러일으켰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하여 이제 인간 삶의 사회적 영역 안에서 종교인들이 서로 협력하는 일은 각 종교 자체의 쇄신을 위해서나 인류 사회에 대한 진정한 봉사를 위해서나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대화의 양식이 되었다. 이런 협력을 통해 각 종교는 현대사회에서 스스로의 진실성과 신빙성을 드러낼 수 있고, 나아가서 사람들에게 종교적 영적 가치를 전파할 수 있다.

이 분야의 좋은 예가 아시아에서 시작된 “세계종교인평화회의(World Conference on Religion and Peace)”이다. 일본의 평신도 불교운동 단체 가운데 하나인 “입정교성회(立正校成會, Rissho Kosei-kai)”의 주도로 1970년에 시작된 이 기구는 전 세계의 여러 나라와 지역 안에서 서로 다른 종교인들의 협력을 통해 세계 평화 증진에 큰 공헌을 해오고 있다. 또 다른 예로는 1987년 이래 해마다 8월 4일 일본 교토의 히에이 산(Mt. Hiei)에서 열리는 ‘평화를 위한 종교인들의 기도회’를 들 수 있겠다. 이 기도회는 1986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전 세계의 종교 지도자들을 이탈리아의 아시시(Assisi)에 초대해 함께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한 역사적인 사건과 관련된다. 여기에 참석했던 일본 천태종의 당시 종정 에타이 야마다 스님이 깊은 감동을 받고, 그 다음 해부터 지구 반대편의 도시 교토에서 세계 평화를 위한 종교 지도자들의 기도 모임을 계속해서 개최해 오고 있다.

개별 국가 차원에서 아시아 교회는 각국 주교회의 안에 대부분 종교 간 대화 위원회를 설치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다. 다른 종교와 협력하여 각 사회의 중요한 현안을 이해하고 그 해결에 공헌하려는 시도는 많은 국가 정부에서도 호의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종교들 사이의 이 행동의 대화를 위해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는 종교 지도자들의 모임이 상설화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경우 정부의 지원과 협조를 받고 있다.
사회 정의와 인간의 자유와 발전을 위한 종교인들의 투신은 두말할 필요 없이 대단히 중요하다.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불의에 맞서며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모든 종교인의 의무인 것이다. 서로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에게는 다양한 사회적 영역에서의 협력을 통해 서로에 대한 기존의 편견과 장벽을 허무는 상호 신뢰와 우정이 자라난다. 이런 상호 신뢰와 우정은 한 걸음 더 발전한 종교 간 대화의 길을 열어주기도 한다.
 
3) 신학적 교환의 대화(Dialogue of Theological Experience)
 
전문가들의 대화라고도 불리는 이 신학적 교환의 대화는 각 종교의 전문가들이 서로의 종교적 유산과 영적인 가치들을 좀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탐구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종교인들과 그저 피상적이 아닌 참되고 실속 있는 대화를 하고자 한다면 상대편 종교에 대해 객관적이고 적절한 이해를 하려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모든 것을 다 상대적인 것으로 돌리는 손쉬운 상대주의(relativism)나 종교 간의 유사점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단순한 화합주의(irenicism)는 당연히 경계해야 한다. 오히려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뚜렷한 차이에 대해 더 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차이에 대한 이해가 서로의 정체성과 특이성에 대한 이해를 더욱 명확하게 해주며, 이로써 또한 서로의 종교적 삶을 더욱 참되게 살도록 도와준다.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는 이러한 정신으로 불교와 직접적인 신학적 교환의 대화 모임을 지금까지 세 차례 실시한 바 있다. 첫 모임은 1995년 대만의 한 불교 사원에서 “불교와 그리스도교 - 합치점(Convergence)과 상이점(Divergence)”이라는 주제로 열렸으며, 둘째 모임은 “불교와 그리스도교에서의 말씀과 침묵”을 주제로 1998년 인도의 한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열렸다. 세 번째 모임은 2002년 도쿄에 있는 입정교성회 본부에서 “불교의 승가와 그리스도교의 교회”라는 주제로 개최되었다.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공존하는 국가의 학자들이 참가한 이 모임들은 특정한 문제에 대한 두 종교의 견해와 입장을 각각 제시하고 함께 토론함으로써 두 종교 사이의 합치점과 상이점을 좀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기회들을 제공해 주었다.

이러한 신학적 교환의 대화도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불교 측에서 더 적극적으로 그리스도교와 대화를 추진하고 있으며, 한국을 비롯하여 대만, 홍콩, 태국, 인도, 스리랑카,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 등의 나라에서는 가톨릭 교회가 앞장서 그 나라의 주요한 종교들과 신학적 교환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아시아 각국 교회로서는 그 나라의 주요 전통 종교에 대한 신학적 탐구가 종교 간 대화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이른바 그리스도 신앙의 토착화(inculturation)를 위해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아시아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심성 그리고 영성적 기초 등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아시아의 주요 전통 종교에 대한 참된 이해 없이 교회는 결코 자신의 신앙을 이들 나라에 뿌리내리게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신학적 교환의 대화는 아시아 교회가 계속해서 그 영역을 확대하며 추진해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겠다.
 
4) 종교적 체험의 대화(Dialogue of Religious Experience)
 
종교적 체험의 대화는 좀 더 깊은 종교 간 대화의 양식으로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종교인들이 서로의 종교적 체험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이 대화를 통해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종교인들은 서로의 종교적 전통에 뿌리를 둔 영적 자산들, 예컨대 기도와 묵상, 신앙과 절대자를 찾는 길 등에 대해 서로의 체험을 얘기하는 것이다. 이 대화는 수도생활의 오랜 전통을 가진 종교, 특별히 가톨릭 교회와 불교가 활발히 전개해 왔다. 가톨릭과 불교의 수도자들 사이의 만남은 이러한 양식의 종교 간 대화를 위한 비옥한 토양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가톨릭 교회와 불교 간의 종교적 체험의 대화에는 서양의 수도자들이 더욱 적극적이었다. 시토회의 유명한 수사 토마스 머튼은 불교(특히 선 불교)에 대단히 심취했으며 불교 수도자들과 만나고자 태국에 갔다가 거기서 세상을 떠났다. 아시아에서는 일본 선승들이 서양 수도자들의 가장 적극적인 대화 파트너이다. 교토에 있는 “하나조노 대학 선(禪)연구소”는 유럽의 “국제 수도자 종교간대화 위원회(Commission Internationale pour le Dialogue Interreligieux Monastique, DIM)”와 함께 1979년 이래 불교와 그리스도교 수도자 간의 영적 교환 프로그램을, 일본의 불교 수도원과 유럽의 가톨릭 수도원을 번갈아 오가며 해마다 운영해 오고 있다. 북아메리카의 “수도자 종교간대화 위원회(Monastic Interreligious Dialogue, MID)”는 이른바 “수도원 환대 프로그램(Monastic Hospitality Program)”이라는 것을 개발했다. 이 프로그램은 불교 수도자들은 가톨릭 수도원에, 가톨릭 수도자들은 불교 수도원에 초대하여 일정 기간을 함께 생활하는 것인데,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티벳의 불교 수도자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 수도자 간 대화의 특징은 그것이 밖으로 표현되는 언어적 대화가 아니라 침묵과 기도, 공동생활의 나눔 등을 통한 깊은 영적 만남이라는 데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언젠가 가톨릭 수도자와 티벳 불교 수도자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여러분이 나누는 수도자 간 대화는 참으로 하나의 종교적 체험이며, 또한 가난의 정신과 서로에게 고유한 전통에 대한 상호 신뢰와 존경으로 활기를 띠는 마음 깊은 곳에서의 만남입니다. 그것은 항상 언어로는 충분히 표현될 수 없는, 기도와 충만한 침묵으로 가장 잘 표현될 수 있는 체험입니다”(1989년 9월 20일 일반 알현에서 하신 말씀).
 
이러한 종교적 체험의 대화가 단지 관상 수도자들에게만 제한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대화는 사제들이나 활동 수도자들 그리고 평신도들에게도 물론 열려있다. 여러 나라에서 특별히 구미 각국에서는 이러한 대화를 지향하며 세미나, 강의, 피정 모임 등을 실시하고 있다.
 
 
3. 아시아 교회의 종교 간 대화의 어려움과 도전
 
1) 종교 간 대화의 어려움
 
종교 간 대화에 대한 오해나 불충분한 이해는 참된 종교 간 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종교 간 대화에 대해서는 특히 종교신학이라는 비교적 새로운 학문 영역 안에서 적지 않은 신학적 논쟁이 벌어져온 것이 사실이지만, 가톨릭 교회가 이해하는 종교 간 대화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종교 간 대화 당사자들의 뚜렷한 종교적 정체성이다. 종교적 정체성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사람에게 종교 간 대화는 오히려 불필요한 혼란만을 가중시킬 수 있다. 예컨대, 다른 종교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는 일이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느님의 절대 진리에 대한 배반이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약함의 표출로 여겨진다. 또한 어떤 사람들에게는 기존의 종교의 틀을 뛰어넘어 더 많은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새로운 종교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종교 간 대화에 대한 이런 양극단의 오해는 그리스도교인들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인들도 함께 극복해야 할 기본적인 과제이다. 참된 종교 간 대화는 각기 자기 신앙에 충실한 사람들이 상호 존중과 개방의 정신으로 만나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서로가 더욱 풍요로워지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러한 대화의 열매가 바로 자신의 종교적 삶에 더욱 헌신하는 것이요, 이를 바탕으로 보편적인 인류의 공동선에 더 이바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어려움과 더불어 아시아 여러 나라의 교회는 종교 간 대화를 수행하면서 특별히 지나간 근대의 역사와 관련된 어려움을 대면해야 한다.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은 그리스도교를 서구 제국주의 세력과 함께 맞이해야 했다. 그러므로 이들 국가의 적지 않은 국민들 마음에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뿌리 깊은 적개심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아있다. 이 불행한 과거에 대한 치유는 아시아 교회를 비롯하여 전 세계 교회가 수행해야 할 무거운 숙제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과거의 문제만이 아니라 현재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상황과도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단기간에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요인 가운데 하나가 일부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의 공격적인 선교활동이다. 이른바 “비윤리적 개종(unethical conversion)”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들 근본주의자의 선교활동은 개종을 목표로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용하며, 특별히 인도와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몇 개월 전에 스리랑카에서 발생한 불교 근본주의자들의 그리스도교의 교회 건물에 대한 무차별한 방화와 공격은 바로 이런 공격적인 선교에 대한 격렬한 대응이었던 것이다. 다른 종교의 근본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를 공격할 때 가톨릭 교회와 개신 교회를 굳이 구별하지 않는다. 주로 미국을 근거지로 하는 이 근본주의 개신교파들의 아시아 대륙에서의 공격적인 선교활동은 미국이 주도하는 이른바 세계화(globalization) 추세에 대한 거센 반발과 함께 아시아 국가들 안에 반(反)그리스도교적 종교 근본주의자들의 생성을 가속화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참된 종교 간 대화는 제대로 수행되기 어렵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종교 간 대화의 필수적인 조건 가운데 하나가 그리스도교 교회 간의 대화라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또 다른 어려움은 교회가 기울이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토착화 노력과 결부되어 나타난다. 특정 종교가 한 나라의 문화적 정체성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는 경우, 교회가 기울이는 신앙의 토착화 노력이 다른 종교인들에게는 마치 자신들에 대한 새로운 선교 전략인 양 오해받기가 십상이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태국에서의 종교 간 대화의 어려움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태국 교회는 전례, 교리교육, 교회 건물 건축 등에서 태국 고유의 언어, 음악, 관습, 미술 양식 등을 사용하면서 가톨릭 신앙의 토착화를 시도해 왔다. 이것이 태국의 불교 신자들에게는 자기들을 개종시키려는 교회의 새로운 선교 전략으로 비쳐지면서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관계가 급속히 냉각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불교가 문화와 긴밀히 결합된 태국에서 그리스도교는 항상 외래 종교로서만 생존이 가능할 뿐, 그것을 넘어서서 또 하나의 태국 종교가 되는 것은 결코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이 밖에 종교 간 대화를 어렵게 만드는 요소 가운데는 종교 자체를 벗어나는 여러 가지 외적 요인들이 많이 있다. 특히 정치, 경제, 인종 등의 요인이 함께 얽혀 종교적 외피를 입게 될 때, 바로 어떠한 극단적인 투쟁도 불사하는 종교 갈등으로 비치게 되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몰루카 지역의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분쟁, 필리핀 민다나오 지역의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분쟁, 인도 구즈라트 주의 힌두교와 이슬람 분쟁, 스리랑카의 힌두교와 불교 분쟁, 파키스탄의 이슬람 시아파와 수니파 분쟁 등 아시아의 유명한 종교적 분쟁도 사실은 종교 자체의 분쟁이라기보다는 위에서 말한 종교 외적인 요인들이 난마처럼 얽혀 종교라는 이름의 옷을 입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런 분쟁 지역의 가톨릭 교회는 뜻있는 다른 종교인들과 함께 분쟁을 해소하고자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2) 종교 간 대화의 도전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종교 간 대화의 기본적인 전제 조건은 대화 당사자들의 종교적 정체성이다. 올바로 수행된 종교 간 대화는 그 당사자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결코 약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강화시킨다.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특별히 동양의 종교, 곧 불교나 힌두교와 개방적인 만남을 갖는 것은 이 종교적 정체성과 관련해 중요한 도전 거리를 교회에 제공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신(神) 중심적(theistic) 종교인 그리스도교와 달리 일종의 신비주의적(mystical) 종교에 속하는 불교나 힌두교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침묵과 명상을 통한 자기실현을 강조하며, 교리적 가르침보다는 영적 깨달음의 체험을 더욱 중요시한다. 이러한 종교적 지향은 특별히 오늘날 다양한 문화적 요인 때문에 이른바 “약한 사유(weak thought)”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 현대인들에게, 더구나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이들에게 대단히 큰 매력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오늘날 동서양 할 것 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특히 더욱 깊은 영적 체험과 영성생활을 원하는 사람들이 이 두 종교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 종교가 가르치는 기도의 방법과 기교, 예컨대 선이나 요가 등을 배우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그리스도인(특히 가톨릭 신자)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이들이 불교나 힌두교의 가르침을 흔쾌히 받아들이면서도 그리스도교 신앙 또한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들이 일종의 종교적 이중 소속(double belonging)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적지 않은 가톨릭 신자들이 주일에는 미사에 참례하고 주중에는 선이나 요가 센터를 찾아 개인적인 수련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불교(또는 힌두교)적 그리스도인 또는 가톨릭 선불교도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 소속은 분명히 교회로서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중요한 도전이다. 이러한 문제는 이른바 뉴에이지 운동과 관련하여서도 발생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더욱더 포괄적인 접근이 필요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교황청 신앙 교리성은 1989년 “세계 주교들에게 보낸 서한(Letter to the Bishops of the Catholic Church on Some Aspects of Christian Meditation)”을 통해 그리스도교 기도의 본질과 특성을 동양적 명상과 비교하여 밝혔다. 이에 호응하여 수도자 종교 간 대화에 참여해 온 가톨릭 수도자들도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있게 논의했으며 그 결과를 「관상과 종교 간 대화」(Contemplation et Dialogue Interreligieux)라는 문헌으로 발표하기도 했다(종교간대화평의회, Pro Dialogo, 1993년, 84면). 이러한 문헌들이 제공하는 일반적이고 원론적인 분석을 토대로 더욱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탐구가 사목적 배려를 고려해 각 지역교회의 특수성 안에서 면밀히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적지 않은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이 한편으로는 그들의 기도와 영성생활에 동양 종교의 기도 방법을 적용하면서 나름대로 풍요로움을 얻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그리스도교 신앙과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종국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기해 버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동양 종교와의 만남이 제공하는 이러한 도전에 응답하는 것은 앞으로 아시아 각국의 교회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4. 종교 간 대화의 열매
 
아시아에서 지난 40년간 진행되어 온 종교 간 대화에 대한 개관을 마무리하기 전에 이런 질문이 제기될 법하다. “종교 간 대화, 특별히 그리스도교와 동양 종교 간의 대화가 그리스도교 자체, 곧 그리스도교 교리와 신앙에 가져다준 열매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 대화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이 갖는 신비적이며 부정신학적(apophatic)인 측면을 일깨웠다고 대답할 수 있겠다.

이 중요한 측면은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삼위일체(Trinity) 교리와 강생 교리의 해석에 적용될 수 있다. 사실 이 두 교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갖는 긍정적 표현 형태의 가장 극단적인 예라고 하겠다. 하지만 삼위일체 교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부정신학적(apophatic) 교리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교리가 인간의 경험에서 얻은 단순한 인격(persona) 개념을 결국 취소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물론 말씀하시는 하느님(God-Logos)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이 교리는 로고스에서 비롯되는 더 큰 침묵을 보존하며, 우리에게 그 침묵 안으로 들어가기를 재촉한다고 하겠다.

비슷한 이야기를 강생 교리에 대해서도 할 수 있겠다. 하느님께서 역사 안에 들어오셔서 구체적인 분, 만질 수 있는 분이 되신다. 그분은 육신의 형태로 인간에게 접근하신다. 하지만 바로 이 하느님은 전적으로 신비로운 분이시다. 그분 자신이 선택한 굴종, 그분의 ‘비움(kenosis)’은 결코 마르지 않는 신비의 샘으로서 그 안에서 그분은 자신을 계시하시기도 하고 또한 자신을 숨기시기도 한다. 강생하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말씀은 항상 인간의 모든 언어를 훨씬 능가한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비움은 종교들이 자신의 주권을 주장하지 않으며 만날 수 있는 바로 그 자리가 되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교 안에 신비적이고 부정신학적인 흐름이 없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40년간 이루어진 그리스도교와 동양 종교의 만남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교 전통의 이러한 흐름을 새롭게 일깨우는 데 실질적인 자극을 주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다른 한편, 동양 종교와 만남은 역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명제로 표현될 수 있는 진리에 대해 서슴없이 이야기하도록 자극한다고도 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부정신학적, 신비적 요소가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교 신앙은 진리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가 없다. 그것도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진리 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단순한 사람이라도 나이에 상관없이 올바른 신앙을 가질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신앙의 모든 언어와 형식은 언어 이전의 그리고 언어 너머의 영역으로 인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는 신앙을 표현하면서도 그것이 표현하는 신앙의 영원에 이르는 내용은 결코 완전하게 포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언어는 실재의 본질에 침투하면 할수록 스스로를 더욱 불충분한 것으로 경험하는 법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이 신앙의 명제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신앙의 명제들이 진리 자체의 자기 현시라는 사실과 바로 이 신앙의 명제들이 마침내 그들을 참된 구원으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는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스도인과 타 종교인을 한자리에 불러모으는 진정한 매개물도 궁극적으로는 서로가 공유하고 있는 인간에 대해 진리와 나아가서 하느님과 실재 전체에 대한 진리여야 하고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5. 나오는 말
 
종교 간 대화는 그리스도교 일치를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교회일치 운동(Ecumenism)과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렇지만 종교 간 대화는 교회일치 운동과 달리 결코 종교의 통일을 그 궁극적인 목표로 삼지 않는다. 이것은 아마 역사 안에서는 이루어지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 간 대화의 미래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스도교와 아시아의 다른 종교와의 대화에는 미래가 있는가?

아시아의 다른 종교들이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초월적 존재(또는 초월)에 대한 강한 의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그들을 내적으로 철저히 변모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자아에 대한 깊은 의식을 일깨움으로써 인류의 선익을 위해 요청되는 다양한 윤리적 책임을 감당하게 하는 한, 그리스도교와 이들 종교 간 대화의 영역은 앞으로 계속해서 무한하게 확장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희망적인 미래는 아래의 조건들이 충만히 채워질 때에야 온전히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대화를 하는 사람은 자기 종교의 전통과 신념에 충실하고, 상대방의 종교 전통과 신념을 이해하려고 열려있어야 한다. 이 대화는 가식이나 편견 없이 진실과 겸손과 솔직으로 하며, 대화가 서로를 풍요롭게 한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할 것이다. 여기에는 원칙의 포기나 거짓 평화주의를 배제하고, 오히려 종교적 탐구나 체험을 함께한다는 것과 편견과 편협과 오해를 불식한다는 것을 서로 증거하여야 한다. 대화는 내적 정화와 회심으로 이끈다. 이런 것을 성령께 대한 순종으로 추구하면 영적으로 유익할 것이다”(요한 바오로 2세, 「교회의 선교 사명」, 56항).
 
[사목, 2004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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