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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향기5: 카를로 카레토의 주여, 왜?

宗敎哲學

by 巡禮者 2012. 8. 18.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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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향기에 취하다] (5) 카를로 카레토의 "주여,왜?"
 
"너희들이 선택한 고통 통해 구원으로 가기 때문이지"
 
구자명(임마쿨라타, 소설가)
 
 
▲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전하는 카를로 카레토 수사의 영성적 메시지를 담은 「주여, 왜?」. 국내에선 김형민씨 번역으로, 생활성서사에서 출간됐다.
 
 
근년 들어 봄은 내게 점점 잔인한 계절이 되어가는 듯하다. 만물의 기운이 새롭게 솟아나는 이 때, 어째서 나는 한없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기분이 되는 걸까? 그 까닭을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도 봄의 밝은 기운과 대비되는 내 안의 어떤 어둠이 자괴감의 그림자로 인해 더욱 짙어지기 때문이 아닌가도 싶다.
 
해마다 더 일찍, 그리고 더 빈번하게 덮치는 황사바람 속이라고는 해도 명랑한 봄새들의 지저귐에도 다투어 피어나는 봄꽃들의 향기에도 예전처럼 가슴이 설레지 않는 나의 상태는 확실히 이상하다.
 
언제부턴가 내 마음의 들판은 저 먼 고비사막 언저리의 불모지처럼 메마르고 삭막해져 봄이 와도 새싹 한 톨 틔워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온종일 무기력과 공허의 먼지바람에 시달리다보면 어떤 때는 잠자리에 들어서 이대로 영원히 아침이 오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으로 취침기도를 대신하기도 한다. 이러한 봄앓이를 올해는 유난히 심하게 겪고 있던 차 나는 무슨 은총의 작용에선지 놀라운 책 한 권을 만나게 됐다.
 
 
이탈리아 영성가, 고통을 이야기하다
 
이탈리아 영성가 카를로 카레토(예수의 작은형제회) 수사의 저서 「주여, 왜?」는 책 제목이 암시하는 대로 고통에 대한 책이다. 저자는 인간 삶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고통에 대한 순차적이고 직접적인 해부를 통해 우리에게 근원적 문제 해결의 차원을 열어 보인다.
 
인간이란 생명체는 끊임없이 고통을 느끼며 우는 존재다. 그러다가 문득 억울한 생각이 들어 시시때때로 저항도 하는 존재다. 내가 왜 이렇게 울어야 하지? 내가 뭘 잘못했어? 왜 하필 나야? 내가 왜? 카를로 카레토는 이 책에서 죄 없다고 믿어지는 자기 자신 혹은 이웃이 고통 받아야 하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우리 보통 인간들의 가슴에 맺힌 통렬한 의문들을 하느님께 대신 물어준다. 주여, 왜? 그리고 친절한 담임선생님처럼 자신이 이미 거쳐 온 답풀이 과정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여준다.
 
카를로 카레토는 가장 회의적인 사람조차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고통의 비밀을 헤쳐 보인다. 오랜 관상생활과 기도 속에서 자신이 깨닫게 된 하느님의 뜻하시는 바를, 그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친숙한 성경 내용을 인용해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비유를 써서 단순명징하게 펼쳐 보인다.
 
이 훌륭한 모범해답서를 얼마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내 안의 어둠은 조금씩 엷어지는 듯 했다. 카를로 카레토는 이렇게 선언한다. '고통은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저는 "왜?"라고 물을 권리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고통들에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하늘과 땅을 지어내신 그분이 아무런 까닭도 없이, 고통의 무거운 외투 속으로 우리를 삼키려고 하는 어둠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는 또 이렇게 천명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은 하느님 나라의 <되어가고 있는 실재>이며 하느님과 우리들 자신은 하느님 나라의 실현자들인 것입니다.'
 
나는 뭔가 강력한 빛이 견고한 내 어둠의 벽을 뚫고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세상이 다 귀찮아 방기했던 일들과 사람들이 하나 둘 머리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집안을 청소하고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수첩에 할 일을 메모하고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허나 막상 외출을 하자 곳곳에서 환호를 지르며 피어나는 봄꽃들의 덧없는 위세에 또 금방 기가 질려 어둠의 처소로 되돌아가기 위해 허둥대는 내 영혼은 그리 쉽게 구원받을 기색이 아니었다.
 
인간 역사를 이뤄 온 사람들의 전체 수만큼이나 다양하고 제각각일 고통의 모습 중에 내가 요즈음 겪고 있는 고통은 어느 범주에 속하는 것일까? 나는 몸이 여기저기 좀 부실한 데가 있긴 해도 큰 병을 앓고 있지 않다. 나는 부자도 아니지만 그리 궁핍하지도 않다. 지금은 다들 돌아가셨지만 자애로운 부모 밑에서 정다운 형제들과 함께 자라났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여 25년째 큰 갈등 없이 잘 살고 있으며, 슬하에 밝고 건강한 자식도 두고 있다. 나는 큰돈은 못 벌지만 사람들이 존중해 주는 직업을 갖고 있다. 나는 일반적으로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해 왔다. 나는……. 이렇게 열거하다 보니 더더욱 나란 사람은 고통을 운운한 자격조차 없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왜 나는 이렇게 주기적으로 침몰하여 다시는 재기할 수 없을 것처럼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걸까?
 
 
고통에 대한 값진 깨달음
 
나는 이 물음을 「주여, 왜?」의 제8장이 놀랍도록 또렷하게 다루고 있는 것을 뒤늦게 알고 감격했다. '사랑, 가볍게 볼 수 없는 것'이라는 제목이 붙은 그 장은 온통 사랑이신 하느님이 인간의 고통을 방치하는 그 모순을 정면으로 다룬다. 시편 137편의 구절 '네 어린 것들을 잡아다가 바위에 메어치는 사람에게 행운이 있을지라'를 인용하며, 하느님이 역설적 방법을 쓰는 이유를 설명한다. 지상에서는 우리의 나약함으로 인해 이른바 '반대되는 것들의 종합'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진리에 접근할 수밖에 없다고.
 
그런 후 카를로 카레토는 자신의 깨달음을 선물로 내어놓는다. '고통과 눈물은 하느님이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불러들이고 선택한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그리고 제10장에 가서는 구약의 야곱 이야기를 인용하며 또 다른 깨달음을 보너스로 전해준다. '우리에게 내일을 향해 움직이게 하는 데 고통보다 더욱 효과적인 박차는 없습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야곱의 엉덩이뼈를 걷어차신 이유입니다.'
 
고통은 나의 성장에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며 내가 궁극적 미래, 즉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데 있어 더없이 값진 전략이라 것. 그 고통을 불러들이고 선택하는 주체가 하느님이 아닌 나 자신이라는 것. 이 두 가지 얘기는 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게 외적으로 고통이 충분치 않을 경우 내적으로 그것을 불러들여서라도 고통과 함께 살아나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 나의 구원에 투자하는 것이라는 이야기? 그렇다면 나의 이 봄앓이도 무의미한 좌절이 아닐뿐더러 영적으로 해이해졌던 안이한 삶에 찾아든 '야곱의 엉덩이뼈 차기'와 같은 은총의 발길질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 카를로 카레토 수사님. 정말 고맙습니다. 당신이 '주여, 왜?'하고 함께 물어주셔서 저는 '왜, 주님인가?'를 새롭게 생각하게 됐습니다. 당신의 이 훌륭한 저서가 많은 이들에게 각자 나름대로 안고 사는 어쩌지 못할 고통에 대한 값진 깨달음의 계기가 되리라 믿습니다. 


카를로 카레토(Carlo Carretto, 1910~1988) 수사는
 
▲ 사막에서의 카를로 카레토 수사를 그린 판화 이미지.
 
 
1910년 이탈리아 알렉산드리아 피에몬테 태생으로, 연구와 교직생활을 거쳐 1952년 이탈리아 가톨릭액션협회장으로 활동했다. 1954년 샤를르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 1858~1916)의 영성을 사는 '예수의 작은 형제회(Little Brothers of Jesus)'에 입회, 10년간 사하라 사막에서 관상생활을 했다. 1964년 이탈리아로 돌아와 아시시에 기도 및 묵상 센터를 설립했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영성가이자 저술가로 활동하다가 1988년 78살로 선종했다. 저서로는 「가시나무 덤불이 타는 곳」 「복되다 믿으신 분」 「아버지 나를 당신께 맡기나이다」 「도시의 광야」 「사막에서의 편지」 「오시는 주님」 「나와 함께 광야로 가자」 등이 있다. 
 
[평화신문, 제1017호(2009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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