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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자모상(鬼子母像)과 고대 한반도의 그리스도교 전래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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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巡禮者 2012. 4. 12.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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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온조지 소장 귀자모 상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일본 비와호 지역의 불교미술> 전시회를 다녀왔다. 나라 시대부터 에도 말까지의 일본 비와호 일대의 불교 관련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그 중에서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은 귀자모상이라고 불리는 상이었다. 11세기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 만들어진 이 신상은 어머니의 자애로운 모습이 느껴져서 감동적인 작품이었다. 헤이안 시대에서 무가 시대로 넘어가는 혼란기 속에 지친 일본인들에게 귀자모상은 종교적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필자가 귀자모상에 유독 관심을 가진 이유는 엉뚱할 수도 있지만 동방 그리스도교 전래, 고대 한반도의 그리스도교 전래 관련 문제 때문이었다.

 
△라파엘로 <대공의 성모>

  비와호의 귀자모 상을 보고 받은 인상은 그 상의 형태가 서구의 성모 마리아 상과 놀랍도록 흡사하다는 점이다. 필자도 귀자모 상을 본 순간 떠오른 생각이 '왠 일본에 성모 마리아 상?'이라는 것이었다. 그 정도로 그 형태가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그와 함께 떠오른 또 다른 유물이 있었다.

△ 숭실대 측에서 경주에서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7~8세기 소조 '성모 마리아 상'

  위의 소조 상은 숭실대학교 기독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일명 '성모 마리아 상'이라는 것이다.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 측에서는 이를 경주에서 출토된 7~8세기 '성모마리아' 상이라고 소개하면서 1960년 대 김양선 박사가 불국사에서 발견했다는 석재 십자가와 철 십자가와 함께 고대 동방 기독교의 한국 전래를 방증하는 유물이라고 보았다. 고대 기독교의 한국 전래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불교에서는 이러한 상을 제작한 예가 없기 때문에 신라에 전래된 성모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문명교류사를 연구하는 정수일 교수 역시 이 상을 언급하면서 고대 동방 그리스도교의 한국 전래설의 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반박하는 측은 이 소조상이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유입된 근대에 조작된 유물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힘들겠지만, 이 상이 설령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상이라고 할 지라도 과연 그것이 성모 마리아 상일지는 의문이 든다. 물론 7세기에 당나라에서 네스토리우스로 추측되는 경교가 전래되었고 이것이 신라에 소개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어떤 형태로 동아시아에 전해졌는지, 마리아 신앙이 동아시아에 전해졌는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교 사가들이 불교에서는 여인이 아이를 안고 있는 상을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그리스도교 사가들이 불교에 대한 관심이 적은 데서 비롯된 오류이다. 그에 대한 방증이 바로 서두에 제시된 일본의 <귀자모 상>이다. 즉 동아시아에 귀자모신(鬼子母神)에 대한 신앙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 간다라에서 출토된 귀자모상

  귀자모신에 대한 신앙은 법화경 다라니품에 등장한 10명의 나찰녀와 귀자모에 대한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귀자모는 하리테(한자로는 하리제, 하라제)라고 불리는 악신으로 아이들을 잡아먹는 신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유독 자신의 막내 아이는 극진히 아꼈다고 한다. 이에 석가모니는 그녀를 교화시키기 위해 그녀의 막내 아이를 몰래 숨겨두었다. 막내 아이를 잃은 귀자모는 슬퍼하면서 석가모니에게 애원하였고, 결국 석가모니에게 교화되어 아이들을 돌보는 육아의 수호신이 되었다. 이러한 법화경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간다라를 비롯하여 동아시아 지역에서 귀자모상이 제작되었다. 만약 숭실대에서 소장한 '마리아 상'이 만약 통일신라 시대에 제작된 유물이 맞다면 그것은 성모마리아 상이라기 보다는 대승불교의 귀자모 상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섣부른 추측일 수도 있겠지만 만약 그 상이 귀자모상이라면 모자를 둘러싼 8개의 얼굴은 귀자모와 함께 등장하는 나찰들의 얼굴을 형상화한 얼굴이 될 수 있다.

  고대사는 유물이 부족하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특히 한국의 고대사는 말이다. 따라서 어떠한 사료를 볾에 있어서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될 가능성이 많다. 이런 점을 염두해 두면서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연구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문명교류사의 측면도 그러하다. 여기서 언급된 고대 그리스도교의 한반도 전래 문제도 일부 불확실한 유물들을 가지고 속단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해석은 조심해야할 것이다.

 

 

 

 

 숭실대 박물관 '신라 성모 마리아상'이 가짜인 이유

- 오두의 문화비평 -  

 

1.60년대 말 동아일보의 기사와 '돌 십자가' 출처의 거짓

2.김양선, '돌 십자가 출처' 증거물을 스스로 없애다

3.한국에서 발견된 것처럼 왜곡시킨 이른바 '금강산 경교비'

4.숭실대의 다른 십자가 유물들의 문제점

5.'신라 마리아 성모상'이 불상인 이유

6.전통적인 모자불상: 송자관음(送子觀音)과 자모관음(慈母観音)

結.불교에도 모자불상이 있다

  

최근 보도된 뉴스 중에 "통일신라때 만든 '예수 안고 있는 성모상' 모습"이라는 기사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근간에 필자는 몇달 동안 신라의 선도성모 이슈로 온갖 자료와 장문의 글을 써오고 있던터라 대단한 자료가 있나 하고 반갑게 뉴스 기사를 클릭했다.

 

아니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60년대말에 일어났던 일을 다시 보도한 기사 내용 이외에 새로운 것은 별로 없었다. 이번에 기사를 낸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는 필자와는 조선닷컴 BBS 시절부터 안면은 아니라도 인터넷상의 '댓글면'을 제법 나누었던 바가 있는 유능한 기자이다.

 

그런데 비록 이슈에 대한 학계의 회의적 평가들을 취재하여 기사에 반영하고 있으면서도 왜 이러한 과거에 문제가 되었던 기사가 다시 보도되게 되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이번 조선일보의 보도는 동아일보 보도 후 40년만에 다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 필자는 이에 대하여 분명한 의견을 내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까지 숭실대 '신라 유물들'에 대한 의혹들은 제기하고 있어도 그 유물들의 문제점에 대한 명확한 분석을 내놓은 의견들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 문화 유물에 대한 그릇된 호도를 막아야 하며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의 이른바 '신라 기독교 유물들'이 가짜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두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이 글은 숭실대 박물관에 현재 다시 전시되면서 다시 뉴스 기사로 논란을 일으키는 '신라 때의 십자가와 성모 마리아상 등'이 왜 가짜인지를 분명하게 밝히는 글이 될 것이다.

 

 

1. 60년대 말 동아일보의 기사와 '돌 십자가' 출처의 거짓

 

1967년 8월 12일자 동아일보에서 보도한이래 가짜 의혹 논란에 빠져 숭실대 박물관측은 그로부터 수십년간 문을 닫은 일까지 일어났던 일이 "가짜 십자가상"과 "가짜 신라 성모상" 사건이다. 이미 70년대에 우리 사회에서 일단 비판을 받고 사라진 일이 다시 재발되고 있다는 것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동아일보의 당시 기사 본문에서 김양선씨가 '돌 십자가를 암석 위에서 나타난 걸 주웠다'고 보도했다.

 

“景敎傳來의 核心인 物的資料는 그가 慶州에서 수집했다는 銅十字架와 마리아 像과 함께 佛國寺에서 얻은 石十字架. 1956년 암석위에 나타난 걸 주워 감정한 石十字架는 浮*塔과 石質이 같고 腐蝕度가 같다는데서 30년간 고고학에 종사한 그의 확신으로 羅代의 것으로 주장한다.”(위의 동아일보) 

 

그런데 이번 조선일보 보도에서 숭실대 박물관측의 주장을 보면 돌십자가 발견 장소는 전혀 다른 곳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말이 바뀌고 있는 것은 이번만이 아니다. 이것말고도 또 다른 장소도 언급기도 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발견장소까지 중언부언이 되어야 할까? 유물 자체가 가짜 신라 유물로 허위 주장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동아일보의 당시 기사 내용에는 위의 기사 사진에서 보듯이 김양선 목사(당시 교수)의 주장을 인용 보도하면서 부제로 '종교, 학계, 근거없다고 반박'이라는 부제를 달기까지 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숭실대 박물관측은 전시하고 있던 문제의 '유물들'에 대하여 불교는 물론 기독교계에서도 많은 비판과 반대에 부딪쳐 당시의 전시를 철회하고 박물관 문을 닫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사회적인 논란과 질타를 받았던 '신라 십자가'와 '신라 마리아 성모상'을 발견했다는 김양선(金良善) 목사는 대한불교조계종과 사학계, 심지어 일부 기독교계의 극심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그로 인하여서인지 김양선은 그로부터 3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그후 간혹 불교와 기독교의 종교간의 대화 이슈가 나오면 문제의 그 '유물들'이 언급되기도 했다. 가짜 의혹을 받으면서도 '신라시대 기독교 유물'이라는 별난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주장이어서인지 곧잘 한국 종교문화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나 일부 기독교인들에게도 회자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결같은 의견은 '증거 불확실', '발견 경로 의혹'이라는 토를 달고 있었다.

 

그러한 사회적인 논란에 휩싸인 그 물건들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문화재 감정에서 보다 명확한 비판이 필요한 시점이다. 필자는 여기에 분명한 문제를 제기하고 그 유물들이 가짜라는 것을 명확히 밝히고 그 유물들의 정체를 드러내고자 한다. 

 

60년대 말 70년대에 사회적인 문제가 되어 박물관이 문을 닫을 정도였다가 수십년이 지난 2004년 숭실대의 '한국기독교박물관'을 재개관하면서 이번에 다시 사회적인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이번에 보도된 문제의 기사 내용에도 언급된대로 '돌십자가'와 '성모상'에 대하여 일부 불교계 인사들로부터 '절에서 기독교 유물이 나왔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항의를 다시 받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기독교 내부에서도 문제의 유물이 오히려 불교문화를 인정하는 배경이 된다하여 비난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이번에 그 문제의 유물에 대하여 뉴스 기사화가 된 것은 현 정권이 기독교 정권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경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보궐선거와 그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이것은 분명 유물 출처에 대한 어설픈 두벌 세벌 증언은 물론 그 고고학적 근거가 부족한 사건 외에도 다른 여타의 문제들을 안고 있다.

 

유물에 대한 분명한 출처 경로가 의혹을 받았다면, 추가적인 증거가 나오든지 문헌적이거나 더 많은 유물이 출토되든지 했어야 하는데도 오히려 더 나쁜 거짓 증거가 등장하면서까지 다시 이번에 기사화가 되고 있다는 것은 한심하기까지 하다.  

 

왜냐면 그 유물들을 찾아냈다는 장소의 이중 삼중적인 발표는 물론 김양선씨 자신이 출처에 대하여 스스로를 속이는 면이 있다는 것이 나의 이 글에서 밝혀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보도에서 숭실대 박물관 관장이면서 동대학 사학과의 고고학 전공자인 최병현 관장이 한 말은 이미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모순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최관장은 기사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 선생(김양선을 말함) 생전에 본인으로부터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 밑에서 돌십자가를 발견했다'는 말을 들었다"

 

앞서 동아일보 기사의 '암석 위'와는 정반대의 '석등 밑'이라는 전혀 다른 표현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동아일보 기사가 시기적으로 더 앞선 출처 증언이라면 이번에 말을 바꾼 '불국사 대웅전'이 동원된 것은 의도적으로 십자가와 불교의 한복판을 연결한 흔적이 있어 보인다.

 

돌십자가의 출처가 '암석 위에서 주웠다'고 했다가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 밑'이라는 중언부언은 과연 김양선씨가 애초에 그것을 '발견'했다는 장소가 문제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증언이 '의도하는 효과를 위하여' 바뀌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그것은 동시에 유물 습득의 동기 또한 문제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50년대 중반에 기독교 목사로서 김양선씨가 당시에 어떻게 다른 종교 한 복판의 석등 밑을 파보게 되었다는 말인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해도 그것을 가져갔다는 것은 장물이 아닌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불국사에 돌려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가?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은 장물 전시관인가?

 

그 '돌십자가'를 입수하게 된 동기에는 참으로 어딘가 의구심을 가지기에 알맞은 것이다. 이러한 장소 문제가 가짜라는 것을 필자가 드러내게 될 것이다.

 

보통 절이 아닌 불국사의 석등을 그것도 대웅전 앞의 석등 밑을 어떻게 파보게 되었다는 것인가? 이것은 불교의 정통 중앙에서 문제의 '돌 십자가'가 있었다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출처 경위와 장소에 대한 허위로 보이게 하기에 충분한 중언부언인 것이다.

 

이러한 동기 배경의 문제를 넘어서서 여기에서 필자는 '돌십자가'의 출처에 대한 근거가 '여러 말'이 나오고 있다는 것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신빙성이란 일관된 증언이 있어야 한다.

 

 

2. 김양선, 출처 증거물을 스스로 없애다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 아래에서 돌십자가를 발견했다"고 말한 김양선은 석탈해의 사기 수법을 쓰다가 들킨 것일까?

 

<삼국유사>에 보면 석탈해는 호공의 집터가 좋은 것을 보고 그것을 빼앗기 위하여 그 집 근처에다 몰래 숯을 묻어두고는 얼마 뒤에 그 집 주인에게 그곳이 자신들의 조상이 살던 곳이라고 우겨 그 증거로 그 숯을 파보여서 집을 빼았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것은 석탈해의 사기 행위도 들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라시대 기독교 유물' 발견자로서 김양선은 스스로 자신에게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했다. 자신이 처음 발표했던 유물 출처 증거물을 스스로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증거 사실은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언급하고 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 유물을 다룰 때에 대단히 흥분된 상태에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기독교인인 성기문(말씀발전소 대표)은 오래 전에 <김양선 목사, 불국사에서 기독교 보물 발견하다>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실 김양선 목사가 없었다면 나와 같은 기독교인들이 잠시 동안이라도 경교가 신라시대에 전래된 가능성 때문에 흥분과 설렘의 나날을 보낼 수 있었겠는가. 기독교가 한반도에 1000여 년 전에 이미 전래가 되었다니! 비록 이러한 흥분이 단지 젊은 날의 호기심으로 그치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러나 성기문은 이 유물들의 출처와 발견 경로에 대하여 의문을 던진다. "그런데 문제는 이 유물들의 역사적 가치를 지지해 줄 만한 근거, 즉 이 유물들이 언제, 어디서, 어떤 경로로 발견되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성기문의 글에서 인용되고 있는 '돌십자가' 발견 장소는 이번 조선일보 보도의 '불국사 대웅전 석등 밑'과는 또다른 장소로 증언되어 있다는 점이다. 

 

"김 목사와 함께 발굴에 참여했던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그 '돌 십자가가 불국사의 우물터에서 발굴되었다'고 한다." 

 

자! 필자가 왜 문제의 이 유물들의 사안이 가짜라는 것을 주장하는지 눈치를 챘을 것이다. 60년대 말 동아일보의 증언은 "암석 위에 나타난 것을 주워"라고 했었다. 현재의 숭실대 '한국기독교 박물관' 관장이라는 사람은 "돌 십자가가 불국사 대웅전 석등 밑"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발굴에 함께 참여했던 사람'은 "돌 십자가가 불국사의 우물터에서 발굴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사찰 경내에서 물건을 몰래 도굴 유출했다면 '발굴'이라는 표현은 또 왜 들어갔을까? 유물에 대한 학술적 신빙성을 높여주기 위하여 '도굴'을 '발굴'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일까? 김양선은 사망한 사람이라도 '함께 발굴에 참여한 사람'은 왜 그 신원을 밝히지 못할까? 그 무엇보다도 발견 장소가 '암석 위에서 주워'에서 '석등 아래에서 돌십자가를 발견했다"는 표현은 가히 조작냄새를 스스로 때를 달리하면서 달리 풍기고 있는 증거이다.

 

이렇게 세 다른 출처 경로의 중구난방에도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도록에는 "1956년 경주 불국사에서 발견된 유물"이라고 표현되어 있다니 이 사회의 '기독교 유물들'에마저 그 권위들을 추락시키는 결과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토록 역사적이고 자랑스럽다면 왜 이렇게 여러 다른 증언이 있게 되었다는 것인가? 이것은 이야기 전달 과정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 김양선의 행태에서 드러났다.

 

성기문은 김양선과 함께 문제의 돌십자가 발견에 함께 있었다는 사람에게 '김양선이 유물발견 기록 문서를 없앴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 목사가 어떻게 그러한 유물들을 발견하였는지를 기록한 문서는 김양선 목사 자신이 없애버렸다는 이야기만 들을 수 있었다. 사실 한국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증거인 유물에 대한 발굴 경위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며 이상한 일이다. 이와 관련된 진실을 알았으면 한다."

 

이제 사건은 스스로 붕괴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감추고 다른 말을 해야 하는 사실들이 드러난 이상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을 사람들은 더 이상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돌 십자가'는 물론 '마리아 성모상' 및 그 여타의 전시물의 그 어떤 것들도 신빙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김양선은 그의 <한국기독교사 연구>에서 그가 경주에서 발견한 유물이 "불교에 흡수된 기독교 유물로 생각된다"고 표현한 것부터가 어딘가 뒤가 꾸린 적극성이 약한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은 그 동기가 불순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정말 진정한 증거가 되는 돌 십자가이고 성모 마리아상이라면 왜 그는 그와같이 중요한 기독교 유물을 '불교에 흡수된 것'으로 표현했어야 했을까? 흡수된 것인지 경교 신도가 쓰던 것인지 어떤 기준에서 판단했단 말인가? 제 발 저린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그 표현은 기독교가 불교에 흡수되고 말았다는 것으로 기독교 내부에서도 문제의 유물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된 배경이 되기도 했었다.   

 

이러한 내용을 전하는 말씀발전사 대표 성기문씨는 "지금도 숭실대학교의 한국기독교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는 유물들이 통일신라 시대의 것이라는 증거는 너무 박약하다. 당시의 불교도들이나 고고학자들의 견해처럼 일반적인 고대 형태로써의 십자가와 유사하지만 기독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유물들일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동시에 기독교인인 그는 김양선의 발견 자체에 대하여 결과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완곡하게 선언하고 있다.

 

"신라 시대에 경교가 전래되어 왜곡되었다는 말인가, 신라 불교가 경교의 형식을 흡수하였다는 말인가, 어떠한 이유로 불국사나 경주에 그러한 유물들이 선물이나 기념물 등의 형식으로 존재하게 되었는가는 아직도 쉽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유사한 유물들이 여러 개 국내에서 발견된다든지, 신라에 이러한 유물들의 존재를 입증 혹은 방증해줄 만한 문헌들이 발견된다든지, 삼국 시대(혹은 남북조시대)에 특별히 신라에 경교가 전래되거나 영향을 주었다는 더 명확한 증거들이 발견되기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돌십자가' 정말 '돌' 십자가가 되었다. 발견자의 증언부언과 증거인멸, 발견 동참자의 증언 그리고 기독교 내부의 평가 이 모두가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 유물들임이 명백히 드러난 것이다. 그것은 '우물 안'에서 '석등 아래'와 '암석 위'만큼 수중, 지하 지상을 돌아다니는 쑥대머리가 된 유물 출처 경로에 대한 불신을 스스로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돌십자가는 더 이상 경주나 신라 유물로 들먹여서는 안될 것이다.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은 과거에 문을 닫았던 전과를 재범하고 있다. 불국사의 명에를 위해서도 기독교에 대한 신뢰감을 위해서도 영원히 문을 닫아야 한다.   

 

 

3. 한국에서 발견된 것처럼 왜곡시킨 이른바 '금강산 경교비'

 

이어서 '신라 성모상'이 가짜인 이유를 밝히기 전에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 또 다른 '한국 기독교 유물'이라는 '금강산 경교비'도 가짜로 왜곡해온 사실들을 밝혀내고자 한다.

 

불국사에서 '돌 십자가'와 '성모 마리아상'을 찾아냈다는 것을 여러 다른 방증을 드러내려 거짓 힘을 쓰다보니 이른바 '금강산 경교비'가 마치 금강산에서 발견된 양 허위 주장한 흔적과 그 기만성을 볼 수 있다. 

 

*"금강산 장안사에서 발견된 경교기념비"로 거짓 선전되고 있는

중국 경교비 모조비 탁본

 

위의 경교비는 이른바 '금강산 경교비'로 그릇 선전되어 왔다. 사실은 비림 박물관으로 옮긴 당나라 경교비를 대신하여 중국 장안의 경교비가 있던 곳에 세워진 모조비를 탁본한 것이다. 아래는 중국 경교비 모조비가 난데없이 '금강산 경교비 발견설'로 왜곡된 글의 내용의 한 예이다. 이 얼마나 사실과 다른 내용이 확대되어 가고 있는가를 보라.

 

"1917년에 금강산에서 경교 기념비가 발견되었다 했는데,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에는 그 기념비의 사진도 전시되고 있었다. 그 비석이 금강산의 장안사라는 절에서 발견되었다는 것도 당시의 한반도 사람들은 대승불교와 경교를 같은 종교로 생각했다는 증거인 것이다.... 이처럼 한반도에 경교의 발자취가 남아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한반도는 신라시대부터 미미하게나마 기독교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세월이 흘러 조선조의 남사고가 자신의 비결서(격암유록)에 로마서, 골로새서 같은 바울서신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자연스런 현상인 것이다."

 

금강산에서 1917년 경교비가 발견되었다? 말도 안되는 왜곡이 되고 있는 것이다. 위의 글을 쓴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한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에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종교적인 허위 선전으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왜곡시키는 '나비현상'을 확대시켜 가고 있는 원흉이 되고 있는가.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에 사진이 전시되고 있는 "금강산에서 경교비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도하고자 하는가? 이 경교비가 금강산에서 발견되었다면 사진이라도 전시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중국에서 가져온 사진이라면 여기에 전시할 필요가 전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더 많은 당나라 경교의 중요한 사진들이 더 많이 있으니까. 

 

그러나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은 이 '금강산 경교비' 사진을 전시한 것은 그것이 '금강산에서 1917년 발견되었다'는 것을 선전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증거로 사진을 전시하고 있었던 것이며, 그 결과 그 내용에 속은 일반 사람들에게 위와 같은 연도와 장소까지 표현한 '1917년 금강산에서 발견한 경교비"로서 인식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분단시기 오랜동안 갈 수 없었던 시기에 금강산 그것도 장안사에 경교비가 있다고 거짓 주장을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분단시대에 남북이 서로 왕래하지 못하던 시대를 노린 사기수법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그러나 90년대 말부터 남북교류가 진행되면서 금강산에 오가는 사람들에 의하여 사실이 들통이 나버렸다. 그런 결과 숭실대 박물관측은 말을 또 바꾸기 시작했다. "중국 당나라 때 경교가 성행했던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금강산 장안사에 세운 기념비를 탁본한 것"이라고 말을 바꾼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금강산에 어떤 기념비라도 사실 세웠었다는 말도 사실일까? 장안사에 갔다 온 사람들에게 그 경교비 기념비를 본 사람이 없다. 기독교인들이 그것이라도 사진찍어 난리를 칠 일인데 잠잠하다.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 자체마저도 '탁본'이란 것 외에 아무 현장 사진도 없다. 눈감고 아웅하고 있는 것이다. 

 

장안사 절에는 중국 경교 모조비를 한국에서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웠다는 주장 또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이 그렇담녀 그 증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금강산 교류가 그렇게 많았으면서도 장안사의 '경교 기념비'는 있었던 자리 사진도 장안사 사진도 찍어왔다는 사람들은 볼 수 없다.

 

어떤 외국인에 의하여 세워졌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현장의 흔적이 완전 없어지는 거은 아닐 것이다. 그 어떤 식으로든 '금강산에서 발견된 경교비'와 '중국의 경교를 기념하기 위하여 1916년에 세운 기념비'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우리나라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중국 경교비 사진을 찍어 마치 경교 신도들이 신라 때 금강산에 세운 경교비인양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돌십자가'에 대한 거짓 증언들을 보았다. 이제 경교비에서도 이와같은 허위와 혼동을 의도적으로 유발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이제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의 '경교비 탁본 사진'은 사라져야 한다. 그것이 금강산에서 탁본한 방증이 없으며 마치 금강산에 경교비가 본래 있었던 것처럼 허위선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박물관측은 '도굴'을 '발굴'이라고 표현한 것과 같이 금강산 경교비 탁본에 대하여 이제 와서 교묘한 말을 하고 있다. "경교의 동양 전래설을 주장했던 고든(E.A.Gordon) 여사가 우리 나라 경교 전래를 밝히기 위한 연구기념으로 1916년 금강산 장안사 입구에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를 모조한 경교비를 건립하였는데, 김양선 선생이 이를 탁본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의 근거나 그 어떤 원형의 사진 남은 흔적의 증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고든의 경교 기념비'의 근거도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사실이 대단히 학술적인 근거가 있는 것처럼 미사려구로 묘사하고 있다. 

 

중국 경교비의 모조비 탁본과 중국 모조비의 금강산 기념비 탁본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지금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 '중국 경교 모조비를 기념하는 금강산 기념비 탁본'이라는 것은 중국 찬양 기념비가 되고 있을 뿐이다. 

 

781년 당나라 씨안에 세워진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는 845년 사라졌다가 1625년 명나라때 발견되었다. 중국에서 발견된 당나라 때의 경교비를 대신하여 씨안의 발견된 장소에 중국측은 모조비석을 세웠다. 그런데 "중국의 그 모조비석을 금강산 장안사 입구에 기념으로 세운 것이 지난 1916년이며 그것을 세운 사람이 E.A. Gorden 여사"라는 것이다.

 

고든 여사가 '기념비'를 세웠다면 한국과 관련한 단 한 줄의 의미 부여의 귀절도 넣지 않고 중국 경교 유행비의 모조비를 본딴 '모형비'였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그 '모형비'는 금강산 장안사에서 확인이 안된단 말인가? 이 모두 거짓이다. 왜 '탁본'만 있고 그 사진은 없다는 것인가.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의 그 '탁본'은 그동안 '사진'이라고 거짓 선전되어 오기도 했다. 사진이 있다면 장안사의 어느 위치에 어떤 배경인지 왜 밝히지 못하고 있는가?

 

고든이라는 외국 여인이 그 기념비를 세웠다면 왜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 경주 등에 세우지 않고 하필 심심산곡 금강산 장안사 입구에다 세웠다는 것인가? 당나라 '장안(씨안)'과 같은 이름의 '장안사'라서? 경교비 기념이 장안사를 위한 것인가 한국을 위한 것인가? 사기 행위를 위한 한심한 말놀이에 불과한 것을 볼 수 있다.

 

'금강산 기념비 탁본'에서도 '돌 십자가' 출처 기록을 스스로 없앴던 김양선이 다시 등장한다."금강산 경교비를 김양선 선생이 탁본하였다"는 것이다. 분명 앞서 '석등 밑'인지 '우물 안'인지 '암석 위'인지 그 정체불명의 '돌십자가' 발견 장소 기록을 없앴던 그 김양선이다. 과연 김양선은 금강산 장안사에서 탁본을 한 것일까?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김양선은 그 탁본을 마치 금강산에 경교신도들이 경교비를 세운 것처럼 선전했던 결과가 '금강산 경교비'로 표현되는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경교비 사진'인 것이다.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은 6-70년대 물의를 일으켜 2004년 재개장 될 때까지 공백 기간 동안 신라의 역사적 유적인 경주 불국사에 대하여 수많은 왜곡된 선전이 이루어졌다.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 유물들'에 대한 문제 속에는 이렇게 당나라 경교비 모조비가 '금강산에 있는 경교비 사진'으로 호도되어 왔던 허위까지 들어 있는 것이다.

 

경교(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중국 당나라 시기에 들어온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문헌이나 고고학적 유물들이 지금도 중국에 남아 있다. 물론 씨안의 경교비도 781년에 세운 것이 1625년 명나라때 발견되어 지금 씨안의 비림 박물관에 그 원형이 보존되어 있다. 

 

 

 

Nestorian Tablet

 

*중국 씨안 비림(碑林)에 있는 1625년 명나라때 발견되었을 때의 

당나라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의 오리지날 모습

This stele, erected in 781 in Xi’an, includes a list of 70 Nestorians who, with Arabs and Persians, were active traders in China during Umayyad and Abbasid times. The Nestorian Tablet had been originally Located at the Chongren Monastery, a mile west of the old Xi’an city walls. The tablet disappeared, probably during religious persecutions in 845. It was unearthed eight hundred years later, in 1625

 

 

Image

1907년 덴마크인이 반출하려했던 사건으로 세워진 

 경교비 모조비의 모습. 

 

 

금강산 경교 모조비 탁본이란 것은 우리나라와 경교의 역사를 밝히는 그 어떤 근거를 가지는 자료가 아닌 것이다. 그런대도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에는 마치 대단한 '금강산 경교비'인양 인식되기에 알맞게 정체불명의 '돌십자가'와 함께 '금강산 경교비 사진'으로 호도하는 전시를 계속하고 있다.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 경교 부분 전시 모습.

문제의 돌십자가 옆으로 '경교유행중국비 탁본'이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 모조비를 탁본한 이 탁본은 '금강산에 경교비가 있다'는 것처럼 호도되어 왔다.

 

당나라 경교비 즉 '대진경교유행중국비'의 진품은 씨안의 비림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고 그 모조품은 씨안의 발견된 장소에는 세워져 있다. '중국의 경교비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 모조비를 금강산에 세웠다는 모형비석 탁본'이라는 것은 그래서 많은 왜곡된 인식을 확산시키는 근원지가 되고 있다. 중국 경교비가 아닌 그 중국 모조비를 기념하는 비문을 탁본해 놓고 '금강산 경교비'가 세워진 것처럼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허위 사실들을 왜곡 선전해 온 결과는 "금강산 장안사에서 발견된 경교기념비"에 이어 "신라 사람 김대성이 석굴암을 축조할 때 하늘의 계시가 있었던 것일까?" 하는 등의 어처구니 없는 그야말로 허구의 사실들이 확대되는 글들이 나오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4.숭실대의 다른 십자가 유물들의 문제점

 

아래의 사진 또한 숭실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른바 '십자가상'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지나친 아전인수식의 기독교 박물관측의 해석일 뿐이다. 이보다 더 많은 '십자가상'이 경교가 중국에 들어온 시기보다 1천년 이상 앞선 청동기 시대의 유물로 발견되어 왔기 때문이다.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이 전시 주장하고 있는 '한국 경교 십자가' 이 십자가상들을 놓고 "경교(景敎)의 한국 전래 가능성을 보여주는 동제(銅製) 십자무늬 장식"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위의 동제 유물은 유물이 맞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아래 사진에서 보는대로 청동기시대의 팔주령 방울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2천년 이상된 청동기 시대의 유물인 아래 사진들을 보라. 이 유물들도 '십자가'이다. 이들 청동기 시대의 유물들도 경교의 십자가라고 하겠는가?

 

 

 

 

*전남 대곡리 출토 팔주령 방울.

 

      전북 익산출초 원형유문청동기(圓形有文靑銅器) 

 

위 사진 왼편의 팔주령은 이미 고대 우리나라 무속의 전통 방울의 하나라는 것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숭실대에 전시하고 있는 '동제 십자가 장식'이라는 것은 오히려 그 가장자리의 구멍들에 방울을 달았을 팔주령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차라리 십자가를 주장하려면 위 사진 오른편의 전북 익산 출토 원형유문청동기圓形有文靑銅器)의 십자일광문(十字日光文)이 더 십자가를 닮아 있다. 이것을 만일에 전문 발굴팀이 발굴하지 않고 김양선과 같은 어느 신뢰성 없는 기독교인이 찾아냈다면 이것도 경교 유물?이라고 했을 것이 아닌가.

 

이 원형유문청동기 무늬는 한국식 세형동검 2기 ~ 3기 (대략 기원전 3세기)에 유행했던 십자문으로 기독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십자문양이다. 십자가 문양만 보면 경교의 경끼를 일으키다간 차라리 한자의 열을 나타내는 '十' 자가 경교의 것이라고 우기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이 아닐까.

 

이제 그 다음으로 "경교의 한국 전래 가능성을 보여주는 화살촉 모양의 비금속세 십자무늬"로 호도하고 있다는 숭실대 전시 물건을 보자.

 

*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이 '통일신라 십자무늬 장식 유물'로 주장 전시하고 있는 물건.

위의 사진의 문양은 십자가 문양이 아니라 오히려 만다라 문양이다. 무속적 태양숭배의 오방사상이 나중에 전이된 불교의 댜니 만다라(Dyani Buddha Mandala) 모양에서나 오방향을 나타내는 금강저 비스바즈라(Visvavajra)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이미지일 뿐이다. 

 

*오방향을 나타내는 금강저 비스바즈라(Visvavajra)

전체적으로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특정 종교의 로고가 아니다. 아메리카 인디안들의 무덤 모양에도 등장한다. 필자가 오하이오주 현장에서 찍은 사진도 있다. 그렇다고 아무도 기독교인 인디안이 그곳에 묻혔다고 해석하지는 않는다.

 

십자가는 무조건 기독교의 것이라는 인식은 우리나라 고대 청동기시대의 무속적 방울에서도 발견된다. 경교가 당나라에 들어오기 거의 1천년 전에 한반도에 기독교가 들어왔다고 어거지를 쓸까 사진을 올리기조차 민망하다. 

 

충남 예산군에서 출토된 십자문이 들어 있는 청동기시대 팔주령을 보면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은 또 하나의 '청동기 시대 기독교 십자가'라고 우기며 전시할 것인가 그것이 궁금하다.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팔주령 안에 보이는 십자일광문
충남 예산군 출토

 

경교의 십자가는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스러운 문양을 가졌던 것만도 아니었다. 오히려 불교적인 요소가 더 중심에 서린 내용이 많다. 경교는 오늘날 신흥종교의 일부처럼 불교와 기독교의 합종파의 한 양상이었다. 아래 사진은 전형적인 당나라 시대에 들어온 중국의 경교 십자가이다.  

 
*불교의 卍자가 강조된 중국 네스토리안 십자가.
만다라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5. '신라 마리아 성모상'이 불상인 이유

 

이제 본격적으로 '신라 마리아 성모상'의 허구를 분석할 차례이다.

 

이번 조선일보 기사에서 특히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것은 "불교에서는 성모자상이 없다"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는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측이 주장한 내용이다.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최 관장은 '부처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의 불상은 없다'며 '당시 중국의 경교 선교사들은 목탁을 두드리며 예배를 보는 등 불교와 융합되는 현상을 보였는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모상을 불상처럼 만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여기에서 더욱 경악했다. 기독교가 불교와의 문화적 교류를 주장하는 유물을 다루는 숭실대의 기독교 박물관에서 어떻게 이렇게 불교 문화를 모르고 있을까 하는 점에서다.

 

과연 '불교에는 성모자상이 없다'는 것이 맞는 말인가? 이른바 '불국사의 돌십자가, 성모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 어떤 리서치도 그 어떤 불교 유물에도 관심이 없었다는 증거가 되는 말이다.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이 '통일신라 마리아상'이라고 주장하는

문제의 '성모자상'

 

위의 사진은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이 주장하고 있는 문제의 그 '신라 마리아상'이라고 주장하는 그 물건이다. 분명 아기를 안고 있는 '성모자상'이다. 한 눈에 보기에 이것이 기독교의 성모상은 아니다. 그것을 지금 필자는 증명해 보이고자 한다.

 

먼저 불교에도 관음보살상에서 '모자(母子)불상'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고자 한다. 숭실대 최관장은 여기에 대해서 분명한 오류를 안고 있는 발언을 한 것에서 위의 '성모자상'이 결코 기독교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증한 것이 될 것이다.

 

이글에서 여러 사진 증거들을 필자가 첨부해두겠지만, 불상의 역사는 관음보살상의 역사와 함께 '모자불상'이 수많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있는 이른바 '성모상' 또는 '모자상'이 마치 기독교에만 있는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 박물관측의 주장을 볼 때 기독교인들의 문화 역사 인식의 폭에 대해서 참으로 배타적 무지에 함몰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기독교권 외적인 곳에서 종교적으로 찾을 수 있는 '모자상'은 고대 인도 및 메소포타미아 유물, 동아시아의 도교 유물들은 물론, 불교의 관음보살상을 포함한 수많은 '모자불상'이 존재하고 있다. 특히 중국과 일본에 불교 및 도교 그리고 토속 신도(神道)에 남아 있는 모자상 또한 모자불상(母子佛像)과 더불어 많이 남아 있다. 

 

성기문씨도 일본의 모자상들에 대하여 겨우 '일본 천주교의 성모자상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편협한 인식의 폭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에 남아있는 기독교적인 측면에서 이와 유사한 형태는 일본에서 발견되는데, 1638년 이후에 기독교에 대한 박해시대에 천주교인들(카쿠레 크리시탄)이 감시의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서 관음상과 같이 생긴 성모자상을 만들고 관음상인 것처럼 사람들을 속였다고 한다. 이는 비밀리에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하였던 성모관음상(Maria Kannon)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기문의 앞 글에서)

 

성기문의 '일본에는 천주교 성모상만 있다'는 말은 일본에는 기독교적인 성모상 또는 기독교 박해로 성모상을 속이기 위하여 '성모관음상(Maria Kannon)만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고자 하는 기독교인들마저 일본 종교에 대한 무지를 보여주는 한 예이다. 일본에도 '모자불상'은 무수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에서 이른바 지금까지 논란이 되어오고 있는 '통일신라시대 성모 마리아상'에 대한 주장은 다음과 같이 왜곡 선전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경주에서 출토된 불보살상(佛菩薩像) 모양의 마리아상이다.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추정되며, 경교와 불교문화의 교류와 경교의 한반도 유입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화형보관(花形寶冠)으로 머리를 장식한 여인이 손을 입에 물고 있는 어린 아이를 무릎 위로 안고 있는 형상이다. 전체적인 신상의 양식은 당시의 불보살상을 따르고 있으나,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기존의 불보살상 양식과 차이가 있다."

 

 

위의 주장을 보면 '어머니와 아들'이 나오는 성모상은 무조건 기독교의 것으로 보려는 그릇된 판단에서 기인하는 '성모상 = 기독교의 것'이라는 그릇된 인식의 오류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불상이나 보살상의 종류가 얼마나 다양한지를 전혀 모르는 결과이며, 불상만이 아니라 도교적인 성모상 및 태양숭배시대의 대지지모(大地之母) 등의 무속적인 성모상에 대한 인식 또한 완전히 결여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면은 관음보살상에 대한 인식 또한 다양한 역사적 배경의 이해 부족에서 오는 결과이다. 관음보살상 중에는 송자관음(送子觀音), 자모관음(慈母観音)등의 불교적 배경이 있고 도가적인 성모자상으로서는 대지지모(大地之母) 선도성모(仙桃聖母) 등이 있다. 인도 힌두교의 하리티(hariti) 계통의 성모자상 또한 그 파급이 세계적으로 넓다.

 

기독교인들이 '성모상 = 기독교의 것'으로만 그릇 인식한데는, 무엇보다도 서양 기독교 측면에서 보더라도 마리(Mary) 여신이나 소피아(Sophia) 여신 등의 성모적 위치를 비롯한 유럽이나 중동에서 기독교 외의 또는 기독교 이전의 전통 토속 종교들이 가진 'Divine Mother(또는 Holy Mother)'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결과라고 하겠다. 마치 기독교 성현들의 광배라고 하면 그것이 고대 인도 불교의 영향을 전혀 모른 채 광배가 그려진 인물만 보면 '기독교 성현'으로 주장하는 꼴과 같은 것이다.

 

필자는 문화비평으로 <광배(光背)의 유래는 일광신(日光神)의 무지개> 라는 글에서 동서양 광배를 다룬 바가 있다.

 

비잔틴 기독교에서 시작한 기독교 성현들의 광배(aureola 또는 aureole)는 역사적으로 동양의 광배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성모상의 전신광배인 이른바 만돌라(Mandorla) 또한 그 이름에서 보듯이 고대 인도의 만다라(Mandala) 문양의 영향이라는 것은 이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경교의 영향이 당나라까지 들어왔다고 해서, 성모자자상이 그때 처음 들어온 듯한 착각은 버려야 한다. 이미 동양에는 어머니가 아들을 안고 있는 선불 신불의 성모자상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경교가 마치 오늘날 천주교에서도 별로 강조하지 않는 '캐토릭의 동방 이단'으로 여기고 있을 정도인데 오늘날 타문화에 배타성을 버리지 못하거나 문화수용의 제한에서 이단논란을 가장 강하게 고집하고 있는 기독교에서 마치 경교가 기독교의 정통의 역사를 대변하는 것처럼 선전하는 것도 모순을 보이는 것이다. 

 

부처와 마니를 일치시켜 신앙화했던 마니교가 그랬듯이 네스토리우스 경교 또한 지중해로 간 기독교와는 전혀 다르게 부처와 예수를 일치시킨 어떤 면에서는 불교의 합성종교적 성격까지 있는 그런 종교이다. 그래서 기독교와 차별화하여 '경교(景敎)'라고 표현한 것이다. 

 

경교(景敎)는 그 심벌에서도 십자가보다 '卍' 자를 중심 로고로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 중국 당나라 경교가 종교간 융화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은 좋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개신교단에서 진실 여부를 무시한 채 '불국사에서 성모마리아상이나 돌 십자가를 발견했다'는 식의 주장을 다시 재개하고 있는 것은 종교간의 대화나 우리 문화의 올바른 이해에서 커다란 문제를 보여주고 있으며, 진정한 기독교 이해의 차원에서도 신뢰성을 떨어트리는 행태일 뿐이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개신교의 타종교에 배타적인 자세와 너무나 모순적인 행태라 할 수 있다. 경교를 예를 들면서 진정한 종교 포용 정신이라면 십자가와 성모상이 무엇이 중요할 것인가. 이웃사랑 문화간의 대화를 선교 이상 적극 추진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한 일인 것이다.

 

진정한 대화는 하기 싫어하고 일찍 '기독교'가 동양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건지고 싶은 이율배반적인 행태일 뿐인 것이다. 불교 유물들을 거짓으로 기독교의 것으로 주장하려 '돌 십자가'나 '성모 마리아상'을 기독교의 팽창주의 상징으로 이용해보려는 약은 술책의 자세가 노출되고 있을 뿐이다.

 

역사적 유물의 감정으로 보아도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 '신라 성모 마리아상'은 경교 유입의 결과로 나타나는 성모상일 수가 없다. 당나라에 들어왔다고 해서 무조건 신라가 모두 수입했다고 보는 것도 역사적 사대주의에 불과하다. 오히려 인도와 당나라의 법난으로 퇴색해 가는 것을 보고 신라 불교는 서역 천축국 중심 세계관에서 신라 즉 동축국 중심의 불국사상에 의하여 불국사를 만들었다. 

 

이러한 역사적 차원에서도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측이 다시 전시 주장하고 있는 '신라시대 기독교 유물들'에 대한 선전은 전혀 기독교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며, 자세히 그 유물들을 감정해보면, 전통 불교 모자불상일 따름이라는 것이 필자의 해석이다. 

 

따라서 숭실대 전시의 성모상은 다음과 같은 면에서 기독교 성모상이 아니라 불교의 관음보살상의 하나로 송자관음상 또는 자보관음상이라고 필자는 결론을 내린다. 이것은 숭실대 '신라시대 기독교 유물들'에 대한 첫 분석일 것이다. 우선 문제의 성모상을 자세히 보라!

 

 

 

 

 

 

1) 연화대가 있다

 

먼저 위의 모자불상(母子佛像)의 사진을 자세히 보라. 앞서 올린 숭실대측이 조명을 어둡게 하여 퍼트리는 사진들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성모상 기단 아래에 연화대(蓮花臺)가 보일 것이다. 숭실대 전시 '성모상'의 기단부의 연화대가 기독교의 것이겠는가? 

 

연화까지 기독교의 것이라고 말한다면 모르겠으나, 기독교 성모상에는 연화대가 없다. 있다면 그 증거 유물들을 제시할 수 있을까? 더더욱 연화대가 있는 위의 모자불상을 이것을 '불교화된 성모상'이라고 고집한다면 다시 '우물'로 갔다가 '암석'으로 갔다가 하는 헤메는 말이 될 뿐이다.

 

 

2) '성모상'의 전신광배인 오레올라(aureola)의 문양이 불교적이다.

 

기독교 성모상에는 전신광배가 톱니바퀴 모양이 기본이고 작은 여러 개의 불상 모양들을 두른 전신광배를 하지 않는다. 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전신광배 오레올라(aureola) 주변에 '염견(焰肩) 불상'의 작은 불상 얼굴들을 새겨넣고 있다. 위 사진의 '성모상'의 꼭대기 부분 또한 또 하나의 작은 불상이다. 이러한 중앙 불상 주변에 여러 작은 불상을 새겨 넣는 불상을 댜니 불상(Dhyani Buddha)에서 볼 수 있다. 특히 모자불상으로서 관음보살상 중에 송자관음(送子觀音) 또는 자모관음(慈母観音)의 모자불상이라는 것을 이 글을 통하여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관음보살 계열에서 바다(또는 물)와 관련하여 불보다 물인 파도를 전신 광배에 두른 '수견(水肩)불상들'이 있다. 그러한 둥근 파도 문양이 전신광배로 둘러질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양은 때로 '수견(水肩)불상'이 불상의 얼굴이 아닌 파도 이미지인 둥근 무늬로 대신하기도 한다. 문제의 숭실대 '신라 성모상'과 비교해 보라.   

 

*수견(水肩)불상 계통의 관음보살의 기본적인 모습

Cosmic Kwan Yin Mini Statue

 

중앙 불상 주변에 작고 둥근 문양을 넣는 것은 기독교 성모상이 아니라 불상 전통에서 중요한 계통의 하나이다. 지장보살 계통의 오지여래(五智如来) 또는 대일여래(大日如來)에서 볼 수 있는 다중 소불의 전신 광배 모양을 한 티벳의 탄트라 불상의 댜니 불상 바이로차나(Dhyani buddha Vairochana)에서 그러한 모양을 볼 수 있다.  

 

*티벳의 댜니 보살 바이로차나 (Dhyani buddha Vairochana) 

http://www.mydzi.blogspot.com/2008/06/dhyani-buddha-vairochana.html

 

 

인도 티벳불교는 중국, 한국, 일본에 영향을 주어 이러한 댜니 불상의 역사는 '모자불상'인 송자관음 및 자모관음에서도 표현되어 있다. 

 

 

3) 불교에서 모자불상이 있다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측은 '유물들이 가짜라면 박물관을 문닫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 왜 닫아야 하는지를 명확히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신라시대 성모 마리아상'이 불교의 모자불상이라면 그것은 가짜 기독교 성모상을 선전한 것이 되기에 박물관은 문을 닫아야 한다. 아래의 송자관음(送子觀音)과 자모관음(慈母観音) 불상들을 보라.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 관장의 말과는 전혀 달리 '불교에도 아기를 안은 불상'이 있다. 

 

*연화대 위에 아기를 않은 송자관음의 전형적인 예.

불교에도 '성모상'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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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 中期, 弘寶齎博物館

 

 

*일본의 지보칸논(慈母観音)

 

 

이쯤 해서도 이미 결론은 난 것이다.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은 이미 70년대 사회적인 논란으로 문을 수십년간 닫은 바가 있다. 2004년 다시 재 개장하여 허위선전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불국사 등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에 대한 폄훼의 문제를 유발시키는 문제라는 면에서 그냥 방치해서는 안될 것이다. 모자불상에 대한 무지로 인하여 우리는 더 이상의 쓸데없는 논란에 휩싸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6. 전통적인 모자불상: 송자관음(送子觀音)과 자모관음(慈母観音)

 

우리나라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하여 신불(神佛) 또는 선불(仙佛)의 전통이 약화되고 오히려 선불(禪佛)의 영향이 강하여 어떤 면에서 중국과 일본에 비하여 관음보살 유물들의 다양성이 적어진 면이 있다. 통일신라시대까지 강하게 존재했던 신선 도가사상이 고려 오백년 불교시대와 조선시대 유교 오백년의 영향으로 무속적인 전통으로 퇴화된 감이 있다. 특히 일제시대에 문화재 반출사건은 천문학적인 일이었으며, 전란 속에서도 사라진 유물들이 부지기수였다.

 

반면에 짧은 왕조시대의 교체 속에서 중국의 불교는 오히려 관음불상에서 다양한 도가적 토속적 선불(仙佛)의 전통이 남아 질 수 있었다. 일본 또한 고대 한반도의 무속적 신선(神仙) 사상이 신도로 발전하였던 바, 중국과 일본의 관음상의 전통에는 상대적으로 송자관음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게 되었다. 송자관음(送子观音)을 일본에서는 지보칸논, 즉 자모관음(慈母観音)이라고 한다.

 

왕조의 역사와 식민지 및 전란을 통하여 없어졌을 또는 반출되었을 우리나라의 모자불상의 이해를 위하여 우리는 지금 중국과 일본에 남아 있는 송자관음과 자모관음으로부터 그 역사와 존재를 파악해야 한다.

 

 

1) 중국의 송자관음(送子观音)

 

먼저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릇 불교 성모상에 대한 배경 이해가 약할 수 있기 때문에 중국불교의 송자관음(送子观音)에 대한 유래를 여기에 필자의 번역으로 첨부해 둔다.

 

《法华经》中说:“若有女人设欲求男,礼拜供养观世音菩萨,便生福德智慧之男;设欲求女,便生端正有相之女。”这是民间“送子观音”的由来。

 

“送子观音”俗称“送子娘娘”,是抱着一个男孩的妇女形象。“送子观音”很受中国妇女喜爱,信徒们认为,妇女只要摸摸这尊塑像,或是口中诵念和心中默念观音,即可得子。

 

中国佛教之所以创造出一个“送子观音”来,无非是基于下述原因:
  一、 受儒家“不孝有三,无后为大”思想的影响,认为婚后没有孩子,断绝香火,是对祖宗最大的不孝。所以创造出“送子观音”珲,使之成为没有孩子的夫妇叩拜、供养的主要神灵。

 

  二、 受封建伦理“多子多福”思想的影响,认为子孙满堂、香火旺盛,是最大的“福气”。所以创造出“送子观音”来,使之成为新婚夫妇祈求生儿育女的主要神灵。

 

  三、 受中国传统“母以子贵”思想的影响,认为“养儿可以防老”,没有儿女老了就没有依靠;儿子升官发财,父母也能富贵、享福。所以创造出“送子观音”来,使之成为天下母亲祈请保佑早生贵子的主要神灵。

 

送子观音是观音菩萨化身之一,通常作手捧婴儿的中年妇女相;也有作观音双手合十状,前立一童男。此外,还有“子安观音”,亦为中年妇女的形象。这是中国佛教为了保佑孕妇安全生产而创造的神灵形象。

 

 

《法华经》에서 "만일 여인이 남자에 욕심을 내지 않고 관세음보살에 예배 공양하면, 복과 덕과 지혜의 남자로 다시 태어나고, 여인이 다른 여자를 탐하는 일을 버리면 단정한 여인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것이 '송자관음'의 유래이다.

 

송자관음(送子观音)의 속칭은 송자낭낭(送子娘娘)이라고도 하는데 남자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의 형상을 말한다. 송자관음은 중국의 여인들에게 많은 기쁨과 사랑을 주고 있고 불교신도들을 위하여 대단히 존귀하고 절실한 불상이다. 만일 마음을 모아 송자관음에게 묵념하여 기원하면 득남하는 수가 많다.

 

중국불교에서 말하는 송자관음은 유교에서 말하는 불효를 세번하면 나중에 크게 될 수 없다는 사상의 영향을 받아 혼인 후에 자식이 없게 되어 결국 제사가 끊어져 조상들에 최대의 불효를 범하게 된다. 송자관음은 그래서 아기가 없는 부녀들이 공양하는 신령한 불상이다. 

  

나아가 봉건논리인 '多子多福' 사상의 영향을 받아 자손이 집안에 번성하여 제사가 번성하는 것이 최대의 복과 기운을 가져온다는데서 송자관음 신앙이 비롯되었다. 송자관음 신앙은 그래서 신혼부부가 신령한 송자관음상에 빌어 소생을 얻는 신령한 불상이다.  

 

중국 전통에서 "어머니가 아들을 귀하게 한다(母以子贵)"는 믿음의 영향을 받아 "아이를 기르면 늙지 않는다(养儿可以防老)고 하고 자녀가 없으면 늙어 의지할데가 없게된다는 믿음이 있다. 아이을 낳으면 사회에서 벼슬을 하거나 부자가 되고, 부모는 부귀하게 되며, 복을 누리게 된다. 관음송자는 하늘 아래 어머니가 자녀를 귀하게 보호하는 것을 기원하는 신령한 존재이다.  

 

송자관음은 관음보살의 화신의 하나로서 보통 어린 아기를 한 손에 안고 있는 중년의 여인상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두 손을 모아 합장하는 모습의 관음상이 아이를 앞에 세운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 외에 아기를 안고 있는 불상으로 '자안관음(子安观音)'도 중년 여인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 불교의 임신한 여인을 안전하게 출산하도록 보호하는 신령한 형상이라 할 수 있다. (번역/ 필자)

 

 

중국의 송자관음에 해당하는 일본의 자모관음은 다양한 역사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한반도의 태양숭배 영향의 결과이기도 한 것이기에 우리나라 고대의 태양의 여신 숭배에서도 분명 아기를 안고 있는 성모상이 존재했을 개연성을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현재 일본에 남아 있는 토속 모자상들 가운데는 신라의 '선도성모자상(仙桃聖母像)' 등의 신라의 유물들이 있을 개연성도 없지 않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일본의 자모관음(慈母観音)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2) 일본의 지보칸논(慈母観音)과 카리데이모(訶梨帝母)

 

지보칸논, 즉 일본의 자모관음(慈母観音) 불상은 글자 그대로 "자애로우신 어머니"의 의미를 지닌다.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대자 대비하신 부처님'의 그 '자비'의 표현은 다분히 태양숭배시대의 태양의 성모에 대한 믿음의 잔흔이라 할 수 있다.

 

동아시아의 관음은 자비의 불교 여신이다. 자모관음의 그 오리지날 유래는 인도의 힌두교 하리티(hariti) 불상과 전통 태양숭배시대의 신도(神道)의 성모상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지보칸논이 관음보살상 계열의 모자불상이라면 카리데이모, 키시모진(또는 키시보진)은 신도모자상 계열의 불상이다. 아래 사진에서 보는 13세기 카마쿠라 시대의 성모자상인 카리데이모(訶梨帝母) 키시보진(鬼子母神)은 신도(神道) 유래의 성모자 불상이다.

 

 

*일본의 카리데이모(訶梨帝母) 성모자 불상. 13세기 카마쿠라. 시가현 온조우지(園城寺) 

Kariteimo (Kishibojin, Kishimojin)
 Kamakura Era (Early 13th Century), Painted Wood, Height 43.9 cm
Treasure of onjouji Temple (園城寺, also called Miidera 三井寺)
in Shiga Prefecture (Designated an Important Cultural Property)

 

일본의 불상에도 이와같이 분명하게 성모자불상이 있다. 이것을 일본 천주교 성모상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신도 종교의 배경에서 유래하는 성모자상을 보면 고대 한반도의 선도성모상 등의 모습에서 이와같은 성모자상이 존재했을 수가 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일본 자모관음(慈母観音)의 전통은 시간이 흐르면서 힌두교와 신도의 자모관음이 합류하여 상호 거의 유사성을 지니게 되었다. 예를 들어 아기를 잘 낳게 한다는 신도의 여신인 코야스사마는 불교의 코야스관음(子安観音), 코야스 지장((子安地藏), 코야스키시보진(子安鬼子母神), 자모관음(慈母観音), 카리테이모(訶梨帝母)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 것이다.

 

In Japan, there are many deities who are worshipped especially for their ability to bless couples with children, and to protect and save children from disaster. These guardians often appear as heroes in modern stories and cartoons. Most originated in Hindu myth and over time were incorporated into Buddhism, while others sprang from Japan's indigenous Shinto tradition.

 

Over the centuries, however, the two traditions have merged, and many of the deities now share similar attributes. For example, the Shinto goddess Koyasu-sama, who grants easy childbirth, has Buddhist counterparts named Koyasu Kannon, Koyasu Jizo, Koyasu Kishibojin, and Jibo Kannon. 

 

 

인도의 관음상은 남성적인 경우가 많았지만, 중국 한국 일본의 관음상은 여성적으로 표현되어 왔다. 그것은 해돋는 동방의 나라들에서 태양숭배시대의 태양의 여신에 대한 고대 성모 신앙의 영향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해석한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시조신으로 믿는 일본의 여신 신앙은 신라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 전통에서 일본의 지보칸논, 카리테이모 모자불상이 남아 있는 것이다.

 

단지 에도시대 말기에 일본의 천주교 성모상들의 일부는 일본 전통 자모관음을 모방한 면은 있지만, 일본의 성모상은 모두 천주교 성모상이라는 관점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중국과 일본에서 송자관음, 자모관음, 자안관음(子安観音), 자안지장(子安地藏), 키시보진(鬼子母神), 카리테이모(訶梨帝母) 등의 성모상을 기독교 성모상이라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기독교박물관의 최관장은 "부처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의 불상은 없다"고 이번 조선일보 기사에서 말했다. 과연 불교에는 성모자상이 없는 것일까. 필자가 오랜 추적으로 찾아낸 자료들을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은 모두 '기독교 성모상'이라고 전시할 것인가 그것이 궁금하다.

 

 

*漆彩绘木雕 送子观音菩萨像

新华网河南频道

 

 

*명나라시대 송자관음상
德化窑 送子观音像,高62CM,印款:张寿山(明代德化窑瓷塑大师),劳请师友断代并估价。

 

*송자관음상

 

 

 

 

*모자불상. 중국 쓰촨성 玉蟾山

 

*모자불상, 타이완

 

後來世界之母濕娃女神投胎為陀剎的女兒莎蒂(雪山神女),最後成為濕婆的妻子。
看著上方的濕婆神與妻子雪山神女,在凱拉薩神山上,底下的多頭魔王『羅婆有那』用千隻手臂搖動這神山,山裡的獅子都驚惶失措的站起來逃跑,然後上一層有些鳥人、象人、馬人等半人半神的動物希望濕婆能夠打走這個魔王,但濕婆一付心不在焉的樣子,根本不把魔王放在眼裡

 

불교와 도교는 서로 오늘날 한국 산사에서 칠성각과 대웅전이 함께 존재하는 것처럼 역사적으로 관음보살상에 융합되어 있었다. 신선도가적인 선도성모(仙桃聖母), 대지지모(大地之母), 후래세계지모(後來世界之母), 처자설산신녀(妻子雪山神女),송자관음(送子观音) 등은 불교가 과거 태양 성모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기도 하다. 

 

 

結.불교에도 모자불상이 있다

 

일본의 카리테이모(訶梨帝母)에 영향을 미쳤을 신라의 선도성모에 대한 성모상은 지리산 성모제단에 남아 있었고 지금도 그 성모상 종류의 하나를 지리산 인근 천황사에다 옮겨 모셔놓고 있기도 하다. 

 

신라의 선도성모(仙桃聖母)는 <삼국유사>에 나오며 <삼국사기>에는 김부식이 신라의 동신성모(東神聖母)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동신성모(東神聖母)의 '東神'은 뜻 그대로 동쪽에서 뜨는 태양의 여신이며 일본의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의 프로토타입이라는 것은 필자가 이미 <신화이야기> 시리즈글에서 수차 논하였다. 

 

세계 신화에서 고대 여신은 어머니신을 말하며 아기를 태어나게 하는 태양신을 의미한다. 삼국시대 시조 신화들이 모두 태양의 여신과 관련한 그 시조 아기들이 탄생하는 이야기는 그래서 중요한 성모자 신화이기도 하다. 이것은 기독교의 예수탄생과 성모 마리아의 배경에도 같은 작용을 했다.

 

성모 마리아는 예수탄생 시대에 괌범위하게 퍼져 있었던 중동 인도 문명의 하리티(hariti) 성모와 마리(Mary) 성모, 커어키 비잔틴 지역의 소피아(Sophia) 성모 전통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캐톨릭의 역사에서 예수에 대한 믿음과는 독립적인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앙의 고백이 강하게 자리해 왔음은 이러한 고대 성모 신앙의 연장선에 있었기 때문이다.

 

칼빈 루터이래 개신교의 등장은 동아시아의 불교의 그것처럼 여성적 종교를 남성화시킨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불교는 태양의 여신이 관음보살에 융합의 과정을 거쳐 오늘날까지 모자불상이 남게 된 배경이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캐토릭이 성모자상을 유지해왔다면 동아시아 불교에서 관음보살 신앙 역시 여성적이며 모자불상을 남겨온 것이다. 

 

결론적으로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 것은 '통일신라시대 성모 마리아상'이라는 것은 역사적으로나 그 유물의 정확한 감정에서나 불교의 관음보살상으로서 '모자불상' 특히 송자관음상 또는 자모관음상의 모자불상이라는 것이 판명난 것이다. 

 

이제 '불교에도 아기를 안은 불상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이상,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측은 스스로 말한대로 박물관을 문닫아야 할 것이다. 김양선 목사의 '돌십자가' 발굴에 경로에 대한 거짓은 물론 '신라 마리아 성모상'은 기독교 외의 불교모자상이라는 것을 이제 모르는 사람들이 없게 될 것이다.

 

더 이상 우리나라의 전통 문화유산에 대하여 허위나 오류를 불러일으키는 일은 계속되지 말아야 한다.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은 연화대가 있는 송자관음(또는 자모관음) 불상을 전시하고 있다. '불교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04/25/09 오두) 

 

* 이어서 <숭실대 '신라 마리아 성모상' 주변의 아홉 얼굴의 정체>가 이어질 것이다. 보다 구체적인 동아시아 불교 전통의 모자불상에 대한 필자의 분석이 전개될 것이다.

 

 

BHAIRAVA

인도 벵갈 팔라왕조. 바이라파(BHAIRAVA) 성모상 

주변에 여러 명의 소불들이 있고 오른손에 아기를 안고 있다.

India - Bengal - Pala Dynasty - 10th / 11th Century
 
 
 

 

*댜니 불상 계열의 금동여래. 국보 제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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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에 만든 성모 마리아像이 있다고?

 

2009.04.25 03:29

 

"관세음보살상처럼 보이는 찰흙상 아기예수 안고 있는 성모 표현"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측 주장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전해진 것은 1300년 전 통일신라시대의 일이다."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관장 최병현)에선 이 진술이 '참'이다. 이 박물관에는 '경주에서 출토된 서기 8~9세기의 기독교 유물'이라는 설명이 붙은 소장품이 네 점이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1950년대 경주에서 출토됐다는 '성모(聖母) 마리아상(瑪利亞像)'이다. 높이 7.2㎝의 이 소상(塑像·찰흙으로 만든 형상)이
중국에서 신라로 들어온 유물이라는 것이다. 얼핏 관세음보살상처럼 보이는 이 소상은 배(舟) 모양의 광배(光背·성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해 몸 뒤에 표현한 장식) 같은 형상이 더욱 불상 같은 분위기를 풍기지만 불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물을 자세히 보면 화관(花冠)으로 머리를 장식한 여인이 손을 입에 물고 있는 어린아이를 무릎 위에 안고 있는 형상을 볼 수 있다.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했다는 게 박물관의 해석이다.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이 소장한‘경교 돌십자가’. 박물관 도록에는 1956년 경주 불국사에서 발견된 유물이라고 적혀 있다.

함께 전시된 유물은 ▲1956년 경주 불국사에서 발견됐다는 높이 24.5㎝의 '돌 십자가' ▲원형과 십자가 형태가 어우러진 동제(銅製) 십자무늬장식 ▲화살촉 모양의 십자무늬장식이다. 박물관은 일제시대 중국 지린성(吉林省) 훈춘(琿春)에서 나왔으나 지금은 사라진 '발해 삼존불'의 사진도 전시했는데, 세 부처 중 왼쪽에 있는 부처는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박물관측은 일찍이 동양에 전파된 기독교의 한 유파인 경교(景敎)의 산물로 본다. 경교는 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Nestorius)파를 말한다. 이 교파는 서기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이후 페르시아 등 동방으로 전래됐다.

7세기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에 들어온 경교는 매우 국제적이고 개방적인 문화 풍토를 지녔던 당(唐)나라 조정의 환대를 받았다. 경교는 이후 150년 동안 중국 사회에 크게 유행했다. 이때 경교가 신라에까지 전파됐을 가능성이 큰데, 바로 이들 유물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경교의 근본적인 성격으로 볼 때 성모상이 만들어질 수 없었다는 의견도 있다. 네스토리우스파가 이단으로 몰린 이유 중 하나가 성모의 신성(神性)에 대해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박물관의 한명근 학예연구원은 "7~8세기에 중국에까지 온 경교가 4~5세기 유럽에서 지니고 있었던 초기의 교리를 그렇게 철저하게 유지하고 있었을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불상일까, 아니면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상일까?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이 서기 8~9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 소개하고 있는‘마리아상’. 박물관 도록에는‘경교(景敎)와 불교의 교류 및 경교의 한반도 유입을 보여주는 중요 유물’이라고 적혀 있다. /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제공

이 유물들은 한국기독교박물관 설립자인 매산 김양선(金良善·1907~1970) 선생이 수습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고학 전공자인 최병현 관장(숭실대 사학과 교수)은 "김 선생 생전에 본인으로부터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 밑에서 돌십자가를 발견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회고했다. 2004년 한국기독교박물관을 재개관하면서 이 유물들의 존재가 알려지자 일부 불교계 인사들로부터 '절에서 기독교 유물이 나왔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항의를 받았다고도 했다.

최 관장은 "부처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의 불상은 없다"며 "당시 중국의 경교 선교사들은 목탁을 두드리며 예배를 보는 등 불교와 융합되는 현상을 보였는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모상을 불상처럼 만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라 성모상'에 대한 학계의 반응은 엇갈린다. 정수일(일명 무하마드 깐수)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처럼 "고대 기독교 전래의 유력한 증거물"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지만 상당수의 문화재 전문가들은 '기독교 유물'이라는 데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다.

강우방 전
이화여대 교수(미술사학)는 "워낙 모호한 성격의 유물이어서 나도 시대나 성격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성모상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조유전 경기문화재연구원장은 "정확한 발굴기록이 없는 유물로 신라 때 것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일본 천주교도들이 박해를 피하기 위해 성모상을 관음보살상의 형태로 만들었던 '성모관음상'처럼 이것은 혹시 근대에 만들어진 유물은 아닐까? 이에 대해 최병현 관장은 "만약 그렇다면 박물관 문을 닫아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최 관장은 "종교로서 들어온 것인지 문화로서 들어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성모상과 십자가인 것이 확실하다면 이미 신라 때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와 불교의 종교 화합이 이뤄지고 있었던 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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