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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세계.

종교학(宗敎學)

by 巡禮者 2010. 8. 18.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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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세계.  


1 법이란 말의 개념.


모든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고대 인도 사람들도 세계의 기원과 성립에 관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 하나의 주장을 하였다. 바로 세계의 기원에 대한 견해가 다르다는 것은 인생관을 달리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종교관이 다르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그러나, 누구의 주장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과학이 최고도로 발달한 오늘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어떠한 주장이 합리적으로 현실 세계의 현상을 잘 설명할 수 있느냐가 문제이다. 이 설명은 자연과학이나 철학과도 모순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종교가 인간의 보람이나 가치에 중시하고 있다고 해서 과학이나 철학에 모순되고 있다면 그것은 맹목적이 되기 쉽다. 반대로 도덕적 가치를 소홀히 해서는 한낱 이론을 위한 이론이 되어 무미건조한 학문으로 흐르기 쉽다 할 것이다. 이러한 양면을 생각하면서 고찰해 보기로 한다. 일반적으로 세계의 기원이나 우주에 대하여 사유하는 세 가지 견해가 있을 것이다.


1. 이 세계가 누구인가의 능력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창조설이다. 이 세계를 왜 창조하였으며 어떻게 만들었느냐는 우리들 인간으로서 물음의 대상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묻는다는 것 자체가 불경스럽고 오만한 일이 되어 창조자의 심판의 대상이 된다고 말한다. 오직 창조자 자신만의 의지이므로 만든 것이 성공적이냐 실패냐도 문제 밖이다. 만들어진 것들은 다만 만든 자의 의지에 순종하는 것만이 선(善)이 된다. 이러한 주장 속에는 인간의 자유의지나 선택은 무시되고 맹목적인 복종만이 선행(善行)이고 심판이나 징벌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한다. 창조자가 선과 악을 악을 심판하고 질서를 유지하게 한다고 보는 점에서 윤리 도덕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으나 과학적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고는 말할 수가 없어 믿음만이 있을 뿐 이해라는 것은 없다. 고대 바라문 교도들의 주장이 그렇고, 기독교적 교리가 그렇다. 신화적 차원을 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이 세계가 '그냥 있는 것'으로 이해함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몇 가지의 원소들 이 물리적 법칙에 따라 이합집산(離合集散)함으로 현실세계가 있게 된다는 견해다. 오직 물질적인 이합집산만이 있을 따름이지 인간이 왜 선하게 행동하여야만 되느냐 하는 가치의 설명이 없어 극단적으로 흐를 때 인간 사회의 윤리 도덕이 부정되고 인간마저도 물질적 대상으로만 파악하려는 폐단이 있게 된다. 유물론적 사고나 우연론 자들이 가지는 주장이다. 고대 인도 사회에서 바라문들의 창조설에 비판을 가했던 외도들의 견해가 그랬고 희랍의 초기 자연철학자들의 생각이 그렇다.


3. 만들어진 것이나 그냥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루어졌으나 그 속에는 질서와 조화를 유지하는 어떤 원칙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을 불교에서 법(法, dharma)이라고 말한다. 법이란 '유지하다, 있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dhr)에서 온 말이다. 어떠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 거한 일이 있기 위한 조건이 있다는 뜻으로 '연기(緣起)'라고 한다. 조건에 의하여 일어난다고 보았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서 깨달으셨다는 법의 내용이다. 그것을 불전에서는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음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짐으로 저것도 사라진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원칙으로서 법만이 확고부동하다고 하여 법인(法印)이라 부른다. 그러나, 불교에서 법이라고 말할 때 막연히 쓰이고 있어 혼란을 초래하는 경우가 있다. 즉 법 이라고 할 때 그 의미를 명확히 구분하여 써야 한다는 뜻이다. 이 구분을 세 가지로 보고 있는 것이 불교적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삼법인(三法印)이라 한다.


삼법인의 내용이 보이는 것은 원시불전이다. 즉 '물질적인 것(色)은 영원하지 못한 것(無常)이다. 수상행식(受想行識)도 덧없는 것이며, 일체 모든 행(行)은 덧없는 것이다. 모든 법은 '나'가 없고, 열반은 고요한 것이다'(色無常 受想行識無常 一切行無常 一切法無我 涅槃寂滅)라고 하였으나 술어로서 삼법인이 나타나는 것은 율전과 논서이다. 즉 유부비나야에서 악업으로 축생(물고기)에 떨어져 있는 겁비라를 향하여 '모든 행은 다 무상하다. 모든 법은 다 '나'가 없다. 고요함이 곧 열반이다, 이것을 삼법인이라 이름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으며, 불교의 중흥조라 불리우는 용수보살은 그의 저서에서 '모든 불법의 뜻이라 하고 세개의 인(印)이라 한다.'고 하였다.


위의 경전에서 보았듯이 삼법인은 오온(인식의 주체)과 연결하여 설하고 있는 점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영원하지 못하여 덧없는 것에는 주재자(主宰者)로서 '나'라고 할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라고 집착하고 있는 생각을 일깨우기 위함이며, 덧없어 나라고 할 것이 없는데도 어리석음으로 나에 집착하여 업을 지어 생사윤회의 고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중생에게 바른법(敎法)을 설하여 윤회가 없는 열반의 고요함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첨에서 볼 때 법이라는 말은 다음과 같이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1. 존재 자체(一切 또는 세계)를 깊이 관찰하면 그러한 조화와 질서를 이루게 하는 데에는 하나의 변함없는 원리로서 법칙성을 말한다. 이때의 법의 개념을 '능지자성 궤생승해'(能持自性 軌生勝解)라고 하였다. '능히 자기의 성품을 보존하여, 그 성품을 통해 사물에 대한 뛰어난 이해를 하게 한다'는 말이다. 성품을 보존한다는 것은 일시적이 아니라 법의 불변함을 말하는 것이니 그것을 궤(軌)라 한다. 궤(軌)는 법칙을 뜻한다. 법칙을 가진다(持軌)는 것은 세상의 모든 사물이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되는 당연성(當然性)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한 당연성을 부처님께서는 무상(無常)이라고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일체의 모든 행(行)은 덧없이 무상한 것이다'라고 한다.


2. 사물의 존재하는 자체를 말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서로 의존하고 있는 것이지 무엇 하나도 자기 자신 혼자서 독립하여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위에서 본 것처럼 무상(無常)이란 법칙성의 결과이기도 하다. 오온으로 있는 중생들의 바램과는 별개로 본래 그렇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욕심을 떠나 있는 것'이란 의미에서 '이욕(離欲)이라고 한다. 인위적 욕심이 아니라 무위(無爲)이다. 우리들이 삼귀의할 때 '귀의법 이욕존(歸依法離欲尊)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사용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법에는 '나'가 없다'라고 말한다.


3. 존재 자체가 하나의 법칙을 이루고 있음을 깨달아 중생의 근기에 따라 쉽게 설명한 가르침으로서 교법(敎法)이다. 이 교법은 중생으로서 마땅이 실천하여야 할 방법으로서 흔히 '팔만사천법문'을 말한다. 이러한 법을 거쳐(法門) 열반과 해탈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열반은 고요한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부처님께서 '만약 연기를 보면 법을 볼 것이며, 법을 보게 되면 연기를 볼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삼법인 전체를 보라는 것이지만 '법에 의지하라'고 하시는 것은 좁은 의미로서 열반에 이르는 교설에 의지하라는 의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조건(가, 나, 다)을 충족시키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법인이다. 그래서 ‘법인에 따르면 불교라고 할 수 있지만 법인에 위배되면 불교라고 할 수 없다’라고 하였으니 삼법인은 바로 불교적이냐 아니냐의 척도라고 할 수 있다.


2. 삼법인 - 제행무상


일체 모든 행(行)은 덧없이 무상하다(諸行無常:一切有爲法無常)


인도의 정통바라문이나 서양 철학에서는 본체(本體)라든가 실체(實體)라고 하여 우리의 경험적 인식의 범주를 넘어서 존재하는 것을 상정하고 있으나 불교에서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들의 감각적 지각을 통하여 인식할 수 있는 경험적인 현상계만을 문제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생멸변화하지 않는 것은 인식의 능력이 인간에게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로 논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한 것이 있다거나 없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하나의 편견이요 독단일 따름이라는 견해이다. 그래서 그러한 문제를 무기(無記) 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행(samskara)은 바로 생멸변화하는 유위(有爲)로서 경험 가능한 범위의 현상 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생활이란 이러한 현상계 속에서 희노애락하면서 사는 것이며, 그것이 현실적 삶의 전부이기도 하다. 그런 현상계를 불교에서는 일체(一切) 또는 일체법(一切法)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제행무상의 행이다. 다시 말하여 제행(諦行)이라고 하면 '인연따라 생겨난 것, 시간따라 변해가는 것'으로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정신적이거나 물질적인 모든 현상을 총칭하는 말이다. 이러한 범주에 들어가 있는 것은 무엇하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것은 실질적으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은 나서(生) 늙다가(老) 병들어(病) 죽는다(死) 의학이 발달하고 아무리 철저한 종교적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자연적 현상으로서 죽음을 넘어설 수가 없는 것이다. 자연물도 발생하여(生) 머물다(住) 달라져서(異) 없어지고 만다(滅). 다만 시간적으로 그 기간이 길고 짧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변화의 요인은 외부의 작용이나 조건에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사물의 속성(自性)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것(內在)이라고 보고 있다. 예를 들어 유리컵을 내려뜨려 깨졌다고 한다면 지금 당장에 깨진 것은 내려뜨려 외부적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병이란 원래 깨지게 되어 있는 속성(自性)이 내재하여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태어나서 병들어 죽는 것도 본래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경전에 이르기를, 이 세상의 모든 것들 태어난 것 다 죽음으로 돌아가니 목숨 비록 길다 하나 반드시 끝남이 있네. 젊음이 왕성하나 쇠할 날이 있으며 만남에는 반드시 헤어짐이 있고 젊음은 오래 머물지 않으니 건강하나 병들면 그만, 산 목숨은 모두 죽음으로 돌아가니 변치않고 영원한 것 있을 수 없네.


이처럼 제행무상을 감성적으로 받아들이면 고통이요 슬픔뿐이지만, 그러나 이성적으로 받아 들일 때는 기쁨과 희망의 근원이 되기도 하다. 변화가 있으므로 영원한 행복이나 성공도 없을 뿐 아니라 영원한 실패와 고통이라는 것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무상은 바로 현실의 삶에 정체하지 않고 부단히 창조하고 개척하는 노력의 바탕이고, 죽음이라는 무상 앞에서 현재를 성실하게 시간을 아끼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살펴 생의 맹목적 집착에서 오는 불안으로부터 초월하게 한다. 쉴사이 없이 변해간다는 사실은 교만심을 버려 겸허와 동정심(大慈心)을 일으키게도 한다. 무상하기 때문에 중생의 삶을 삶답게 살펴야 할 이유를 자각하게 한다. '물질적인 것(色)이 무상하고, 수상행식(受想行識)도 무상하다'는 것은 사상적 편견이나 독단에 매달리는 맹목적 집착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물질적인 것만이 무상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인식이라느 것도 변한다. 오히려 육신보다도 더 많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 자연과학적 입장에서 고찰


무상하다는 개념은 쉴새없이 변화하고 있는 운동이나 활동을 의미 한다. 우주는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쉴사이 없이 운동하고 있다. 팽창하거나 수축하거나 그것은 정지가 아니라 변하고 있음을 뜻한다.


태양계를 보면 태양을 중심으로 많은 행성이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 태양을 중심하여 돌고 있다고 해서 태양이 붙박이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라는 넓은 공간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우주라는 거시적 세계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정지하여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물체들도 그 본 바탕이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지구가 움직이고 있으나 우리들이 정지하여 있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생명이 있는 것만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생명이 없는 것들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물질은 수없이 많은 분자들의 모임이고, 그 분자들은 원자들의 결합인 것이다. 분자는 온도에 따라서 또는 주위 환경의 열진동에 보조를 맞추어서 진동하고 있는 것이 다. 그런데 이때 전자가 돌고 있는 궤도는 일정한 것이 아니라 한다. 그 궤도 또한 무상한 것이다. 더구나 핵이라는 것도 양자와 중성자가 극히 좁은 공간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회전한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결국 물질이란 그대로 운동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중성자와 양성자가 인연관계를 맺고 움직이고, 핵과 전자가 또한 인연관계를 맺으며 돌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자연은 정지되어 있는 것 이 아니라 동적인 균형을 이루며 정지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과학적 입장에서 볼 때 운동과 율동이 모든 물질의 근본적인 성질이라는 귀결을 얻게 된다. 그것은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모든 사물은 무상하다'는 진리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즉 모든 존재의 모습으로서 하나의 법칙은 '무상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 술어의 어원적 고찰


제행 무상이라고 할 때 '행(行)'이라는 말 자체가 '움직임'을 전제 하는 말이기도 하다. '업(業)'이라는 말은 '활동한다'는 의미이고, '윤회(輪廻)'라는 말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Samsara)을 뜻하고 있다. 즉 긴생명의 흐름이다.


불교에서 붓다(Buddha)란 '생의 흐름을 거역하지 않고 그와 함께 움직이는 사람'이기도 하다. 여래(tatha gata)는 '그렇게 왔다가 그렇게 가는 사람'을 뜻한다. 불교에서 뿐만이 아니라 힌두교도들까지도 우주의 실재를 브라흐만(Brahman)이라 하였는데 브라흐만이란 그 어원이 '브리흐'(Brih)에서 온 말이다. 브리흐란 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성장하다'라는 뜻이다. 라다크리 슈난은 인도 철학에서 브라흐만이란 말은 성장을 의미하며, 생명, 운동, 진행을 암시하고 있다고 하며, 우파니샤드에서는 '고정된 모양이 없고 영생하며 움직이는 것'을 브라흐만이라고 한다고 했다.


인도 최고의 종교시라고 할 수 있는 리그베다(Rig-veta)에서는 우주의 역동적(力動的)인 본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리타(Rita)라는 술어를 사용하는데 그 말은 '움직인다'라는 뜻을 가진 '리'(ri)에서 온 것이라 한다. 또한 인도인들이 자아라고 생각했던 아트만(atman)도 원래 '숨쉬다, 움직이다'등의 의미를 가진 말에서 유래되어 '호흡, 영혼, 자아, 본질' 등으로 쓰이고 있다.


중국 사람들은 우주의 바탕을 '역'(易)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고정이나 정체를 거부하고 '모든 것은 변한다'는 대전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역은 '변역'(變易)을 의미하고 있다. 흔히 도(道)라고 말 하는 것도 자연을 관조하여 그 자연을 질서있게 하는 길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도인(道人)이란 사물의 본성에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는 조화로운 사람을 뜻하고 있다. 이 도의 중요한 개념은 끊임없는 운동과 변화의 순환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노자(老子)는 '돌아옴이 도의 움직임이다. 멀리 가는 것은 돌아오는 것을 뜻한다'(反者道之動, 遠曰反)고 하는 것은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태극도를 보면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임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희랍의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도 '만물은 유전(流轉)한다'고 하였다. 그 역시 존재의 밑바탕은 움직이는 것이란 뜻이다.


이렇게 보면 옛부터 모든 사물의 바턍은 변화하고 있는 운동으로 보았고, 그것은 바로 현대과학이 증명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즉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존재는 무상하다'는 것은 종교적인 영역을 넘어서 그대로 우주의 바탕이며 과학이기도 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함 끊임없는 움직임, 즉 변화 속에 살고 있으면서 변화하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않고 고정된 형상, 사물, 인간, 관념에 집착하는 데서 인간의 고통은 비롯된다고 설명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무상'(無常)을 바르게 보는 눈에서부터 불교는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3. 삼법인 - 제법무아


모든 법에는 '나'라고 할 것이 없다(諸法無我 : 一切法無我)


우리의 인식에 의하여 파악되어지는 현실 세계의 모든 것을 제법(諸法)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제법을 사유하고 있는 주체자를 '아'(我)라고 한다. 여기서 아(我: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불교와 인도의 다른 사상과의 확연한 구별이 되고 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에서 제행(諸行)과 제법무아(諸法無我)에서 제법(諸法)은 산스크리트어(범 어)로 표시할 때 '사르바달마'(sarva-dharma)라는 동의어로 쓰기도 한다. 즉 행(行)과 법(法)은 같은 개념에 속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한역(漢譯) 경전을 살펴보면 '일체 모든 행(行)은 무상하다. 지혜로 이렇게 살펴 이 고통을 깨달으면 도(道)를 실천함에 그 삶이 청정하다'라고 표현한 일체행무상(一切行無常)의 부분을 '일체의 많은 행(行)은 괴로움이다'(一切衆行苦), '일체의 모든 행은 텅 빈 것이다'(一切衆行空), '일체의 모든 행은 무아다'(一切行無我)라고 한 것을 보면 '행'과 법(法)은 같은 뜻이며 그것은 바로 '고'(苦)이며 '공'(空)이며 '무아'(無我)요 무상(無常)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게 된다.


사물을 인식하고 있는 나 역시 그러한 사물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모든 사물이 무상한 것이라고 파악되었다면 그 속의 '나' 또한 무상한 것임은 자명한 논리적 귀결이다. 무상하다는 것은 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것이요, 그것은 바로 여러 가지 인(因)과 연(緣)의 모임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용수보살은 '일찌기 어느 한 법도 인연따라 생기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불교에서는 인식의 주관자로서 '아'(我:나)를 오온으로 보고 있는데 오온이라는 것은 '색, 수, 상, 행, 식'(色受想行識)의 다섯 가지 요소가 유기적 인연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한다. 경전에 '오온은 인연따라 생기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것은 물질적인 것(色)이 무상하듯이 수상행식(受想行識)도 무상한 것으로서 '생멸법'(生滅法)이며, 영원하지 못하고 소멸하는 견고하지 못한 변역법(無常磨滅不堅固變易法)이며, 실천적으로는 욕심을 버리게 하는 '이욕지법'(離欲之法)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부처님이 제행무상을 설하시고 다시 제법무아를 거듭 설하시는 의도를 간파하여야 할 것이다. 무상을 보이심이 존재 열반에 대한 인식론에 입각한 교설이라면, 제법무아를 설하는 것은 무상하다고 보는 인식 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시는 실천적 의미가 강조되는 가르침임을 알 수가 있다.


무상한 것은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음을 보였음에도 중생은 자기 자신(오온)에 대하여만은 무상으로 보지 않으려는 맹목적 집착과 무지가 있게 된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고'(苦)의 근원이라고 한다.


경전에 '중생은 물질적인 것(色)에 집착하여 얽매이게 됨으로 번뇌가 있게 된다'고 하셨으며, '색에 얽매이게 되므로 색을 자기라고 보게 된다. 무상한 색을 영원한 자기라고 착각함으로 없었던 근심걱정은 더욱 늘어나게 된다'고 한다. 흔히 색(色)만을 말하고 있으나 그것은 수상행식(受想行識)도 마찬가지라는 술어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오온 가운데서 중생이 가장 쉽게 집착하는 색(色:물질적인 것, 육신)을 대표로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중생은 오온에 매달려 결박당하고 있는 것을 속성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 정통 바라문들이나 사문들(고행주의자)도 오온으로 구성된 중생 속에는 무상을 초월하여 있는 '아'(我)가 있는 것으로 보려는 경향이 지배적이었으나 부처님은 '12처, 18계, 5온, 12연기, 제행무상' 등의 설법으로 그들의 잘못된 견해를 논박하였다.


어리석은 범부들이 오온에 대하여 '나라는 생각'(我見)을 일으켜 얽매임으로, 얽매이는 마음이 탐욕을 내게 되고 색(色)을 불변하는 나의 실체라고 집착하여 선과 악의 업을 짓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수행자들은 오온을 바르게 알아 탐욕을 눌러 이기고 끊어버려 그것을 초월하는 것이 지혜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등식이 성립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색은 무상(덧없음, 영원하지 못함)하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다. 괴로움 은 나가 아니다'(色是無常, 無常則苦, 苦則非我)와 '색에는 나의 실체가 없다. 나의 실체가 없으니 무상하다. 무상은 바로 괴로움이다'(色無我, 無我者 則無常, 無常者則是苦) 이러한 등식의 전제 아래에서 무아설은 실천적 의미로 설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많이 들어 지혜로운 제자들아, 이 오온에서 '나'가 아니요, '나의 것'이 아니라고 관찰하라. 이와같이 살펴보면 이 세상에 취할 것이 없게 된다. 취할 것이 없다 함은 집착할 것이 없다 함이다. 집착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라야 스스로 마음의 평화(열반)를 깨닫는다'


이미 제행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바라문들이나 중국의 사상가들도 세계의 바탕을 '변화' '운동' '율동' 등의 무상으로 이해하였다는 점에서는 뜻을 같이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속에 있는 우리들 자신(중생)을 바라보는 견해는 전혀 달리하고 있다. 즉 바라문들이나 신진사상가들(사문:불교를 제외)은 '나'를 변하지 않는 영원한 실체(實體)로 이해하고 있었으나 불교에서는 '나 자신도 실체가 아니다'라고 보는 점에서 특색을 이룬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것은 이론을 떠나 실천이라는 점에서 대전환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즉 불변하는 자기의 실체를 부정할 때 이기주의나 편견과 아집이라는 깊은 늪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무아(無我)로 번역한 안아트만(anatman)은 아트만(atman)의 부정이다. 아트만은 추상적 개체, 자아, 본질, 실체 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말의 부정은 '추상적 개체가 아님, 자가가 아님, 실체가 아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역으로 '무아'(無我)라고 하기보다는 '비아'(非我)라고 하는 것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원래 안아트만은 '나 아닌 것'과 '나를 갖지 않는 것'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무아라고 할 때 무엇을 부정하려는 것이었을까? '만약 불법을 반드시 무아라고 결정하여 제자들에게 무아만을 닦으라고 말한다면 이것을 '전도(顚倒:잘못된 견해)'라 하였고, '자기의 실체가 있다는 관념에 매달려 자기만을 높여 교만하면 생사에 윤회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만을 버려야 문득 열반에 들어가게 된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도 일상 생활의 행위의 주체인 자기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자아(自我)는 고정 불변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당시 바라문들의 사상을 부정하는 태도였다.


불타 당시 독단과 편견에 빠져 있는 바라문들의 사상과 외도들의 견해를 부정하고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세계 속에 독선과 이기주의로 살아서는 안된다는 사상적 견해를 보인 것이 무아(無我)라고 할 수 있다. 콘즈는 인도 불교사상에서 '블타는 아트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을 파악할 수 없다'고 가르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경전에서 '물질적 존재(색)은 무상하다. 무상은 바로 고(苦)다. 이 무상한 고(苦)는 무아다. 무아는 아소(我所)가 아니며 아(我)가 아니다'라 하였으니, 아소(我所)는 '나의 것'이라는 소유관념을 말한다. 나에게 속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집착하는 마음을 물리치기 위함이다.


법구경에 「어리석은 사람은 '이 아이는 내 아들이다' 또는 '이것은 내 재산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걱정한다. 그 자신조차 그의 것이 못되는데, 어찌 아들이나 재산이 그의 것이 되랴」라고 말하고 있다. 내 자신도 영원하지 못하거늘 어찌 내 것인들 영원히 내 것이라고 집착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흔히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무한히 소유하다가 죽음 후에도 그것이 자기의 것이 되는 것처럼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비리를 저지르는 것은 '내것'이라는 소유관념에서 비롯되는 것이 많이 있다. 재물, 명예, 이성에 대하여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식의 인생마저도 부모의 소유인양 생각하는 어리석음과 집착이 있음도 사실이다.


무아(無我)라고 할 때의 '아'(我)는 일상적으로 밥먹고 잠자며 현실을 살아가는 과정에 있는 '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삶을 누리다가 죽은 다음에도 나의 실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어지는 '나'에 대한 맹목적 집착을 말하는 것이다. 바라문교도들이 우주의 본질인 범(梵 : Brahman)과 나의 본체인 아트만(我 : Atman)이 인간 속에 있다고 하여 수행의 극치를 우주의 본질인 범(Brahman)과 나의 본체인 아트만(Atman)이 하나되는 것이라고 하여 '범아일여'(梵我一如)를 주장하였었다.


여기서 영원 불멸하는 실체로서의 자아(我)가 있을 것이라는 집착을 부정하는 것이 불교에서의 무아(無我) 또는 비아(非我)인 것이다. 어떤 실체로서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에 매달리는 '집착심'(執着心)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육체가 없어진 뒤에도 아트만이라는 것이 있느냐 없느냐는 우리가 현실적으로 경험하고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불교적 입장에서는 무기(無記)라고 하여 크게 문제삼지 않는다. 경험할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없는 것들에 매달려 현실을 외면하는 것을 더 큰 문제로 보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경험할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없는 신이나 절대자라는 관념에 매달려 현실적으로 빚어지는 인간들의 지혜롭지 못한 비리가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현실적 폐단으로부터 벗어나 선행을 닦으면서 지혜롭게 살고자 했던 의도가 내재하여 하나의 사상적 견해가 바로 불교의 무아설이다. 그러한 존재가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인식의 범주내에 있는 일체법이 '아(我)가 아니다'라고는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르므로 무아(無我), 즉 '아가 없다'라는 뜻 보다는 비아(非我), 즉 '我)가 아니다'의 의미가 역설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인간의 행위 가운데 어떤 것이 종교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이것이다'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으나, '이런 것이 아니다'라고 부정할 수는 있는 것이다. 그래서 '비아(非아8)라거나 무아(無我)'라는 부정적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불교에서 지혜의 완성을 중요시하고 있는 반야부 경전에서는 수없이 반복되는 부정으로 진실에 접근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사랑이라는 말을 보자. 사랑은 감싸고 아껴주는 것만이 사랑이라고 할 수가 없다. 때로는 '사랑의 매'라는 말처럼 질책과 꾸짖음이 더 깊은 사랑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이것이다'라고 말하기 보다 '이런 것은 사랑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사랑을 정확히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이다.


'어리석고 무식한 범부는 물질적 존재인 색(色)은 '나'라거나, '나와 다르다'거나 그렇지 않으면 '둘이 합한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수상행식 (受想行識)도 마찬가지라고 헤아린다. 그러나, 배움이 있는 지혜로운 제자들은 물질적 존재인 색(色)은 '나'라거나 '나와 다르다'거나 '둘이 합한 것' 이라고 보지 않는다. 수상행식에서도 마찬가지다. 또한 아는 것도 아니며 보는 것도 아니다. 현재의 물질적 존재(色)는 영원하지 못하다. 수상행식도 영원하지 못하다. 물질적인 것은 괴로움이요, 수상행식도 괴로움이다. 물질적 존재(색 : 육신)에는 '나'가 없다. 수상행식에도 '나'가 없다. 지금의 물질적 존재인 육인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수상행식도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물질적인 존재는 허물어지는 것이다. 수상행식도 허물어지는 것이므로 '나'가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니다. '나'와 '나의 것'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해탈하면 욕계(欲界)의 다섯 가지 번뇌를 끊는다'고 하였다.


오온이 나의 실체는 아니지만 그 오온을 떠나서 현실의 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오온은 '나'이면서 '나'라고 고집할 실체가 아니다. 즉 육체가 '나'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육체를 떠나서 '지금의 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양자의 조화로운 통일체 속에서 '나'라고 말할 수 있는 내가 발견되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발견 위에서 '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불전에서 '자기를 스승으로 하라. 남을 스승으로 삼지 말라. 자기를 스승으로 삼는 사람이 모든 고통에서 해탈한다.'고 한 것이나 '그대 젊은이여,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것과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찾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라고 말씀하신 가운데의 '자기'라는 말의 참뜻을 알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 무아라고 했다해서 '자기를 죽여라, 자기를 포기하라, 자기를 망각하라'는 뜻이 아니다. 다만 성숙된 인격형성을 위하여 잘못된 견해를 버리고 참다운 자신을 발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실천적 의미에서의 무아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은 무지와 집착으로 잃어버린 자기를 회복하는 것이요 참다운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다. 자기의 실현은 탐욕적 이기주의에 빠져 있는 상태로부터 벗어나 우리가 동근 중생임을 눈떠 자비로 이웃을 사랑하는 이타주의적인 윤리 도덕적 가치를 생활화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을 '잘 조어된 사람'이라고 한다. 그것은 제행이 무상함을 철저히 자각하고 무아의 정신으로 조화와 질서를 이루며 사는 모범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사람을 '법을 실천하는 사람' '언제나 법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아라는 것이 망아(忘我)의 황홀경을 뜻하거나 무념(無念) 무상(無想)의 목석과 같은 무미건조한 인간생활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무아(無我)를 '나가 없다'라고만 이해하여 나의 절대적인 부정으로 보려는 사람이 있다. 일체법이 무아요, 공적(空寂)이라면 현실적으로 보고 듣는 것은 과연 누구며, 중생이 자신의 업력을 따라 윤회한다고 하는데 '나가 없다'(무아)라고만 한다면 누가 윤회를 받게 되느냐는 의심이 부처님 당시에도 있었다. 원시불교에서 이상적인 수행자를 아라한이라 했고, 아라한은 윤회를 벗어난다고 하여 죽음 후에는 아무것도 없는 '허무'에 떨어진다는 단견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경전의 말씀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 이야기는 야마카비구와 사리불과의 대화로 엮어지고 있다.

"야마카여, 너는 번뇌가 다한 아라한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하였느냐?"

"그렇습니다, 사리불이시여."

"이제 너에게 물을 터이니 네 생각대로 대답하라.물질적인 것(色)이 영원한가?"

"아닙니다. 무상한 것입니다."

"만약 영원하지 못하다면 괴로움이라 생각하느냐?"

"무상한 것은 괴로움입니다."

"만일 덧없고(무상) 괴로운 것이라면 그것은 변하고 바뀌는 것을 말할 것이다. 그런데 지혜로운 제자들이 어찌 무상한 것 속에서 '나'라거나 '나와 다른 어떤 모양'이 있다고 볼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볼 수가 없습니다."

"수상행식도 마찬가지니라. 야마카여, 물질적인 것(色)이 여래인가?"

"아닙니다, 사리불이시여."

"그렇다면 육신 안이나 수상행식 속에 여래가 있다고 하겠느냐?"

"아닙니다."

"여래에게 색(色)이나 수상행식이 있겠느냐?"

"아닙니다. 사리불이시여."

"그렇다면 육신(色)과 수상행식도 아닌 곳에 여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리불이시여."

"야마카여, 번뇌를 다한 아라한이 죽으면 일체 아무것도 없게 된다고 생각하느냐?"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너는 어째서 전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더니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느냐?"

"전에는 제가 어리석었기 때문에 그런 삿된 생각을 하였습니다."

한 경전에서는 빈비사라왕이 무아(無我)라고 한다면 과연 누가 과보를 받게 되겠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만약 육근(안이비설신의)과 육경(색성향미촉법)과 육식(眼識界乃至意識界)이 만날 때 객관대상에 대하여 육식이 애착을 일으켜 번뇌가 쌓인다.


이와같은 관게로 생사에 윤회하고 과보를 받게 된다.
만약 객관대상에 집착하여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번뇌는 사라져 해탈하리라.
육근과 육경과 육식의 세가지가 인연을 맺을 때 동시에 선악업을 일으키고 과보를 받게 된다.이것을 떠나 따로 나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비유로 말하면 부식돌로 불을 낸다고 하자.
손을 인연으로 부싯돌을 문지를 때 불이 일어난다.
그러나 불의 성품은 손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부싯돌에서 나온다.
그렇지만 손과 부싯돌을 떠나서는 불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육근과 육경과 육식의 만남에 의하여 과보도 생기는 것이다."


불의 성품이 이 세상 어느 곳이든지 있으나 조건이 맞지 않으면 불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때 어느 곳이라도 인연이 맞으면 불이 일어나게 된다. 다시 말하여 물(水)과 불(火)은 정반대인 것 같지만 크게 보면 물이 그대로 불이라고 할 수 있다. 물의 분자는 가연성의 산소와 수소가 있으니 불의 성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어디에서나 언제라도 불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무아이므로 실체는 없으나 불의 성품이 어느 곳에나 있는 것처럼 사람이 지은 선악의 업력도 편재하여 있어 조건만 성립되면 과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업의 주체로서 나는 불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과 연의 조건에 따라 자기의 모습을 바꾸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이해하기는 대단이 어려운 것이다. 불전에 '부처님이시여, 저는 부처님의 말씀을 들으나 더욱 의심만 더할 뿐입니다'라고 심정을 토로하니 부처님께서는 당연하다고 하셨다.


'마땅이 의심을 더해야 할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이것은 매우 깊은 이치로서 보기 어렵고 알기도 어려워서 모름지기 깊이 관찰하여 미묘하게 도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만이 알 수 있고 범부중생들은 능히 분별하여 알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중생들은 긴 어둠속에서 잘못 보았고, 잘못 알았으며, 잘못 찾았고, 잘못 원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 말을 듣고도 그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하여 '나'가 있다는 교만심을 일으킨다. 그래서 완전히 평등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을 그렇게 보지 않기 때문에 곧 교만을 끊지 못하여 오온을 버린 뒤에서야 다른 오온에 합하여 게속하여 낳게 된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 그 뜻을 능히 이해한 사람은 모든 교만에서 평등함을 얻는다. 그는 집착함이 없어 윤회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시 태어날 인연을 맺지 않기 때문이다.'


중생이 어리석음과 탐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업력에 이끌려 윤회하지만 지혜로서 진리를 깨달아 바르게 살아가면 해탈하는 것이다. 이 수행을 통하여 해탈에 이르는 '나'는 인정하고 있다. 일상적으로 말하는 '나'를 가아(假我)라 하고 수행을 통하여 진리에 눈 뜬 '나'를 진아(眞我)라고 하며 이러한 사람을 진인(眞人), 즉 '참사람'이라 부른다.


4. 삼법인 - 열반적정


열반은 고요하다 (열반적정, 적정즉열반)


열반은 '니르바나(nirvana)의 음역이고, 그 뜻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적정이다. 적정은 '고요함'이니 비유하여 바람이 불지 않을 때 호수물이 거울처럼 맑은 것과 같다. 그러므로 열반이 고요한 것이 아니라 '열반 그대로가 고요함'이다. 열반이란 말은 '바나'의 부정어이다. 바나(vana)는 원래 '좋아하다, 욕구하다, 사랑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에서 왔으므로 '강렬한 욕구'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열반은 '강렬한 욕구가 아님' 또는 '강렬한 욕망을 벗어남'이라 볼 수 있다. 옛부터 열반을 활활 타오르는 불을 꺼버린 상태라고 비유하였다. 적정의 뜻은 '열반으로부터 자유, 마음의 평온'이다. 즉, 욕망의 소멸로 마음이 자유로운 상태를 의미한다.


불전에 '탐욕이 다하고, 분노가 길이 소멸했고, 어리석음이 끝내 사라진 것'이며, '마음속에 교만심을 버린 것', '일체 모든 애착을 끊어버림', '나와 나의 것이란 집착을 떠남'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열반이란 다만 정신의 소극적인 상태가 아니다. 중생이 현실적으로 부딪치게 되는 고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뇌 속에 뛰어들어 문제의 하나하나를 해결한 다음에 누리게 되는 해방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대하게 되는 객관대상이 감각기관을 통하여 들어오는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남이다. 그래서 해탈이라고도 한다.


원효스님의 말씀처럼 '이미 생긴 번뇌를 끊어 버리는 것이 열반이 아니라 아예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 열반'인 것이다. 소극적인 표현이 열반이라면 적극적 행동의 표현을 해탈이라 한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서 오는 감정적 번뇌로부터 벗어남이 마음의 해탈(心解脫) 이라 하고, 사상적 편견과 독단으로부터 벗어남을 지혜의 해탈(慧解脫)이라 말한다
.

우리가 열반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영원하지 못한 속에서 영원하기를 맹목적으로 희구하고, '나와 나의 것'이 아닌 것들이 나와 나의 것이라고 강렬하게 집착하게 됨으로 필연적으로 고뇌하고 고통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참다운 모습이 무상하고 무아함을 철저히 이해하고 주체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열반은 지혜를 통하여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지성적 사고로서 스스로 도리에 맞게' 행위하는 곳에 열반과 해탈의 길은 열리는 것이지 인간의 반성되지 않은 무한한 욕망이 인간의 합리적인 노력으로 달성될 수 없을 때 신이나 부처님께 맹목적으로 매달려 성취하려는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에게 열려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매달림은 또 하나의 속박이 되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다. 흔히 '자기를 잘 조어한 사람'에게 열리는 것이다.


세속적인 탐욕심이 자신의 노력으로 성취되지 않을 때 종교적 수단에 매달려 인간적인 무한한 욕망을 이루고자 한다면 종교의 세계 또한 세속적인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 깊이 파묻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열반이나 해탈은 인간적인 탐욕에 구속되어 있는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욕망의 굴레로부터 탈피, 초월케 하여 완전한 자유의 경지를 얻음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진리를 안다는 것은 이 세상의 흐름을 거역하는 것과 같으므로 욕심에 매달려 있고 어리석음에 덮혀 있는 사람에게는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반야심경에 '반야 바라밀에 의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에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져 잘못되 꿈같은 생각을 멀리 벗어나 마침내 열반을 이룬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는 것이 진정한 인격의 성숙이고 고통당하고 있는 모든 중생들이 반드시 실현해야 할 궁극적 경지이다.


열반이란 고요함은 없었던 것이 수행을 통하여 새롭게 얻어지는 것이라기 보다는 바로 우리와 항상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못보고 못느끼고 있었을 뿐이다.


체행무상하고 제법무아한 그대로가 고요함이다. 그것을 거역하려 함이 고통이요 번뇌이다. 그러므로 열반이나 해탈은 눈앞에 현전(現前)하는 것이다. 다만 중생의 어리석음과 탐욕에 의한 집착으로 '사실과 다르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본래 마음음 고요했고, 우리가 살고 있는 대자연계가 그렇다. 그래서 원효스님은 '열반의 본 바탕은 본래부터 스스로 있는 것이지, 지금에 와서 전혀 없었던 것이 새롭게 생기는 것이 아니다'라 하였으며 수나라의 혜원스님은 열반은 '마음쓰는 것을 근본으로 한다'고 하였다. '있는 그대로를 보되 탐욕과 무명에 의한 주관으로 분별하지 않음'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깨끗한 거울이 사물을 반사하는 것과 같고 파도 없는 호수물 위에 산천경계가 나타남과 같다. 이렇게 잔잔한 호수물에 산천 경계가 일그러지지 않고 나타나는 것을 해인삼매(海印三昧)라고 말한다.


열반을 얻거나 해탈하면 죽음이 없다고 말한다. 죽음이 없다는 것은 생물학적 의미에서 죽음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열반을 얻었다고 지금의 이 육신으로 죽지 않고 영원히 오래 산다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죽음에서 오는 절망과 두려움에서 초월하게 된다는 뜻이다.


죽음이라는 사실을 없앨 수는 없다. 그것은 제행 무상이나 생자필멸(生者必滅)의 법에 정면으로 모순됨이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사실 앞에서 공포감을 갖지 않고 당연히 자기의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고요함'이고, 좌절과 절망이라는 굴레를 벗어남이 '자유로움'(해탈)이다. 그래서 '나에게 죽음의 공포는 없다. 또한 생에 대한 애착도 없다.'고 하셨다.


부처님께서 80세 되시던 해 임종 3개월 전에 자신의 죽음(대열반)을 예언하셨다. 부처님은 죽음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히 있어야 할 것으로 받아들여 오히려 부처님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제자 들을 타이르시면서 위로하셨다. 낡은 수레와 같은 이 육신을 보고 애착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을 향해 '모든 생은 반드시 멸하는 것이다. 그러니 부지런히 힘써 해탈을 구하라'고 하셨음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치신 분의 담담한 모습 그것이었다.


열반이란 말이 '동요를 가라 앉히다. 조용하게 가라 앉는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인 죽음에 당면하여서도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음이 열반이요 해탈이다. 그것은 가장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열반이나 해탈은 죽음의 저편에서 얻어야 할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현실 속에서 반드시 실현해야 할 이상이요, 최고의 목적이다.


이상을 정리하여 보면, 제행무상은 우리가 대하고 살아가는 현실세계가 질서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원리로서 법칙이다. 그것은 시간적 고찰로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시인과'(異時因果)라고 할 것이다.


제법무아는 무상 속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홀로 독립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로 공간적 존재의 모습이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현실 존재 자체의 모습이요, '동시인과'(同時因果)를 보임이다.


열반적정은 무상 속에서 무아로 살아 마음의 평정을 얻어야 할 길이다. 부처님의 모든 교법은 결국 열반과 해탈이라는 이상으로 안내하기 위한 수행의 방법을 보임이다.


5. 법칙성의 내용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며 살고 있는 세계의 바탕은 무엇 하나도 변하지 않는 실체라고는 없다. 원인(因)과 조건(緣)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그렇게 있어 보이는 것이라 해도 그렇게 되게 한 원인과 조건만 사라지면 그렇게 있던 것도 사라질 수 밖에 없다. 수없이 생겼다가 사라져 버리므로 무상이라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변화무쌍한 것들이라 해서 조화와 질서가 없이 생겼다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천차만별로 변화무쌍한 현상계 속에는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되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 그 법칙에 따라 변화무쌍한 현실세계가 있게 되는 것이다. 무상한 현상 속에는 무상하지 않은 법칙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살펴보자.


1. 반드시 그럴만한 원인이 있으면 그것에 상응하는 결과가 나타난다. '콩심은 데 콩나고, 팥심은 데 팥난다'는 간단한 비유이다. 콩을 심었는데 팥이 나서는 원인과 결과가 맞지 않는다. 그러나 씨앗으로 뿌린 콩과 다시 열매로 열려진 콩이지만 꼭 같은 콩이 아니다. 그래서 씨앗으로 뿌려진 콩을 인(因 : hetu)이라 하고, 결실되는 콩을 과(果 : phala)라 한다. 수확되는 콩은 씨앗으로 뿌려진 콩과는 '다르게 익었다' 하여 이숙과(異熟果 : vi-paka)라고 말한다. 이러한 '다르게 익은' 것이 없으면 우리가 선행을 한다 해도 선의 결과가 있다고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있음은 '다르게 익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떠한 종류의 품종에 대하여 품종개량을 시도하는 것은 이 '다르게 익음'을 믿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사람이 선행을 하고, 악행을 하였을 때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2. 씨앗(因)은 반드시 열매(果)를 맺을 수는 있으나 반드시 씨앗만 있다고 해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씨앗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여건(緣 : pratyaya)이 모여야(和合) 한다. 연(緣)이란 말은 '---으로 향해 가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원인을 도와 어느 방향으로 향해 가게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인연화합 (因緣和合)이라 한다. 위에서 이숙과(異熟果)라고 할 때 '어떻게 다르게 익느냐' 하 는 것은 바로 연(緣)의 작용이다. 연(緣)의 조건에 따라 본래의 씨앗보다 좋은 열매 가 열리기도 할 것이고, 본래의 씨앗보다 못한 열매가 맺어지기도 할 것이다. 좋은 (+) 조건이 있을 것이고 나쁜(-) 조건도 있는 것이다. 좋은 여건을 만들면 좋은 결실을 거둘 것이나 나쁜 여건을 만들면 좋지 않은 결실을 거두게 된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적 사실이다. 사람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선(善 : +)의 환경이 있을 것이며, 악(惡 : -)의 환경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똑같은 생(生)이지만 훗날 훌륭한 사람이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되는 것은 환경이라는 여건의 작용이 크다 할 것이다. 우리가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좋은 연(緣)을 맺어야 한다는 뜻이다. 꼭 같은 사람이지만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세월이 흐르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선지식(善知識)을 가까이 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삿된 사람을 가까이 하면 삿된 사람이 될 것이고, 올바른 사람을 가까이 하면 정의로운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꼭같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어떠한 교육을 받느냐에 따라 종사하는 분야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씨앗을 직접적인 원인(親因)이라 하고 싹이 터서 자라게 한 조건을 간접적이라 하여 소연(疏緣)이라 말한다. 원인만을 보는 것을 숙명론이라면 조건(緣)을 중요시하는 것을 창조적이라 할 것이다. 불교에서 인연(因緣)이나 인과(因果)를 설하고 있는 것은 원인(因)을 중요시 하는 것이라기 보다 현실적인 연(緣)을 중시하는 사상이라는 것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경전에 '사람은 그 출생에 따라서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또 출생에 따라서 성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행위에 따라서 천한 사람도 되고 성스러운 사람도 된다'고 하였다.


3. 씨앗만 있어도 안되고 좋은 조건(緣)만 있어도 결실이 맺어지는 것이 아니다. 씨앗은 조건을 필요로 하고, 조건은 씨앗을 필요로 한다. 서로서로 의존하고 관계를 맺어야 한다. 즉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성은 씨앗이 열매를 맺었으나 그 열매가 다시 씨앗이 되는 관계로 이루어진다. 일회성이 아니라 거듭 반복되는 것이다. 이것을 인연생기(因緣生起)라고 한다. 시간적으로 '이것이 일어나서 저것이 일어남'이 되니, 제행무상한 생멸변화의 질서관계이고, 공간적으로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게 됨'이라는 제법무아한 의존의 조화를 이룬다. 질서를 이루고 있어 원융(圓融)이요, 조화를 이루고 있어 무애(無碍)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조화와 질서를 이루고 있어 원융무애한 중중무진 인연(重重無盡 因緣) 관계를 이루고 있는 불가사의한 법계(法界)를 보이게 된다. 한톨의 씨앗 속에 한해의 모든 것들이 들어 있어 우리는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 方)이기도 하다. 그것은 한 티끌 속에 온 우주가 들어 있음이기도 하다.


4. 이 세상의 모든 것(諸行)은 한 시도 쉴 사이 없이 변화하고 있다. 세계 자체가 움직음을 속성으로 하고 있음을 제행무상에서 고찰하였다. 그러나 천차만별한 삼라만상의 변화를 유지시켜 주는 원리(法)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무상한 것들(諸法) 속에 항상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법주법계(法住法界)라 한다. 이러한 법은 누가 만든 것이 아니다. 법계에 그냥 있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것이고 그것을 말씀하셨을 뿐이다.


부처님께서 구루손이라는 목장 근처에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또한 어떤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여래가 이 세상에 태어나거나 태어나지 않거나 법계에 항상 있는 것이다. 여래께서 스스로 이 법을 깨달아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었고, 모든 중생을 위하여 쉽게 분별하여 펼쳐보여 나타내는 것이다. 이른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게되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러한 모든 법은 법주 법공 법여 법이하여 법은 현상 그대로의 모양을 떠나 있지 않고, 현상 그대로와 다르지도 않다고 하셨다. 법은 삼라만상 가운데 있는 것이 법주(法主)이고, 인연으로 모여 있어 본 바탕이 텅비어 있는 것이라 함이 법공(法空)이며, 현상계 모양 그대로라고 함이 법여(法如)라는 것이며, 법은 인위적 조작을 가하지 않고 스스로 본래부터 그러한 것이라 함이 법이(法爾)이다. 그것은 본래 자연적이라 하여 법이자연(法爾自然)이라고도 말한다. 위에서 부처님께서 이러한 법을 깨달아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었다고 하였다. 이 말은 현대적 개념으로 보면 등(等)은 평등이니 일반적, 보편적 이라는 의미이고, 정(正)은 옳음, 바름이니 타당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등정각이란 '보편타당한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다.


불타의 교설을 믿는 사람에게만 타당하고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타당하지 못하면 보편성이 결여되어 진리라고 할 수가 없다. 시대의 조류나 유행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냥 받아들여 보편적이라 해도 그것이 객관적으로 옳지 못하여 타당성을 잃어버리면 그것 또한 진리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불타의 교설로서 법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 그 누구라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열려 있는 진리이다. 불교는 과학이 있어 과학과 충돌하지 않고, 철학이 있어 철학을 배척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불교사를 통하여 잘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만들지 않았다는 것은 설사 부처님께서 깨달아 가르치신 법이라 해도 부처님 또한 법 안에서의 존재이지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별개의 존재로 있는 것이 아님을 보이신 것이다. 다만 법을 법답게 보시고, 법답게 받아들여, 법답게 사시다가, 거역하려 들지 않고 법답게 거두심이다. 무상한 법 속에 무상한 존재로 계셨으니 인연이 다하심에 무상하다는 법을 힘주어 가르치셨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오직 법에 의지할 것을 말씀하셨다. 법만이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이다. 그 누구라도 무상한 법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있었던 중생(모든 생명)은 일찌기 없었다. 사람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이외의 모든 것들도 무상 앞에서는 모두가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불교의 뛰어난 진리성이며 객관적 보편성이다.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불타의 가르침'을 믿는 것이지 육신으로 사바에 출현하셨던 석가모니 자체를 믿는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분의 형상 앞에서 예배하고 공양하는 것은 그분의 가르침과 그분의 덕이 훌륭하고 거룩하여 그분 앞에 공경심을 표하는 것이지 맹목적으로 매어달림이 아니다. 경전에 '물질적 존재인 육신으로 나를 보려 한다거나 말소리에 매달려 나를 찾으려고 한다면 이런 사람은 삿된 길을 가는 사람이므로 끝내 나를 볼 수 없다'고 하셨음을 잘 알아야 할것이다. 이것은 가르침인 법을 보라는 것이요, 법을 통해서만이 불타를 알 수가 있다는 말씀이다.


'만약 연기를 본다면 그것이 바로 법을 보는 것이요, 법을 본다는 것은 바로 연기를 보는 것이다' 라고 하셨고, '연기를 보는 것은 법을 보는 것이 되리라, 참으로 법을 보는 것은 나를 보는 것이 되니라'고 하셨으며, '법을 본다는 것은 바로 부처를 보는 것'이라 하셨다. 그러므로 불교인이 불교인 다워지는 것은 맹목적인 믿음에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통하여 법을 바르게 보는 데서 시작한다. 바르게 보지 못하는 데서 인간고(人間苦)는 발생하고, 지혜로서 바르게 보는 데서 생의 즐거움은 전개되는 것이다.


우리가 마땅이 보아야 할 법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 그것이다. 삶의 눈앞에 있는 것이듯이 법도 눈앞에 있는 것이다. 나아가 깨달음이라는 것도 목전(目前)에 있는 것이다. 즉 해탈은 현전(現前)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죽음 후에 극락에 가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 법답게 사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살아 생전에 법답게 보고 법답게 산 사람은 이미 해탈을 누리고 열반을 얻은 사람이니, 죽은 다음에도 극락에 왕생한다는 것은 자명한 논리적 귀결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현전하는 법 가운데서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달아, 스스로 증득하여' 현실의 법 가운데서 즐거움을 얻어 현재의 법 가운데서 기쁘게 살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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