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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론(緣起論)

종교학(宗敎學)

by 巡禮者 2010. 8. 18. 16:40

본문

 

연기론(緣起論)

 
 
목차 : (1) 개요.      
         (2) 제존재(諸存在)와 연기(緣起).
         (3) 연기의 법칙성(法則性) 
         (3.1)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
         (3.2) 인연화합(因緣和合)
         (3.3) 무상성(無常性) 
         (3.4) 공성(空性)
         (3.5) 무아성(無我性)
         (3.6) 중도성(中道性)

 

(1)- 개요

 

연기(緣起)라는 말은 범어에 `pratityasamutpada`, 파리어에 `paticcasamuppada`인데 `pratitya`나 `paticca`에는 `의존`의 뜻이 있어서 `인(因)`, 또는 `연(緣)`, 또는 `인연(因緣)`이라고 번역되고, `sam`은 `합(合)`또는 `정(正)` 의 뜻이 있고 `utpada`나 `uppada`는 `생기(生起)`의 뜻이 있습니다. 이래서 `인연생기`라고 번역되는데 무엇이던지 생겨나는 것은 자기 이외의 어떤 다른 것들에 의존해서 그것들이 원인이 되어서 생겨난다는 뜻입니다. 또는 어떤 조건에 말미암은 발생이라는 정도의 뜻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연기의 말 뜻(語義)이 곧 존재의 법칙으로서 곧 부처님의 존재론(存在論)을 말하는 술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연기란 모든 존재의 양상에 따른 존재의 법칙으로서의 법(法)을 말하며, 부처님께서도 보리수 밑에 앉아 `진지하게 사유한` 결과, 일체의 존재는 모두 이 연기의 법칙에 의해 성립하고 있음을 파악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일체의 제법(有爲法)은 모두 가지가지 조건(因緣)이 화합하기 때문에 성립된다는 연기사상(緣起思想)은 불교의 근본 원리입니다. 불교는 이 인생 세계를 우주만큼 크거나 벌레처럼 작거나 관계없이 인연으로 생기고 인연으로 이루어지며 동시에 인연으로 소멸한다고 설명합니다.


`연(緣)이 모이면 생기고 연(緣)이 흩어지면 사라진다.`는 것은 이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일체 제법(諸法) 즉, 모든 존재에 있어서 벗어날 수 없는 법칙입니다.


예를 들면, 마치 눈앞의 한 송이 꽃처럼, 꽃의 씨는 인(因)이며, 토지, 비료, 햇빛, 공기 등은 씨의 생장을 도와 주는 연(緣)입니다. 이것은 인(因)과 연(緣)의 조건이 모두 구비되어야 한 송이의 꽃으로 나타납니다. 만약 주위의 환경(緣)이 나쁘면 꽃이 피지 않습니다. 연이 아예 없으면 싹도 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일체의 모든 존재는 인과 연이 화합해야만 성립됩니다. 또한 나중에 이 인연이 다하면 이 한 송이의 꽃도 사라져 버립니다. 이 사라짐은 성주괴공, 생주이멸의 사상(四相)에 의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생의 지(智), 우(愚), 미(美), 추(醜)와 빈(貧), 부(富), 고(苦), 락(樂)과 가지가지의 다른 유형도 모두 각자 자기의 과거 선천(先天)의 사상과 행위로 말미암아 조성된 업식(業識), 즉, 근본 무명(無明)의 혹(惑)에 의해서 우리 중생이 유전(流轉)하는 원인이 되는 근본식(根本識)의 힘이 주(主)된 원인이 되고, 현세에 부모가 결합한 후천(後天)의 관계가 도와주는 연이 되어서 우리들의 이 신체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이 신체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후천의 가정교육과 학교교육, 사회교육의 각종 관계 도움으로 비로소 우리들은 일생의 업적(業績)을 조성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인생 세계의 어떤 물건도 모두 인연으로 생긴다`고 말하는 이 연기설은 곧 불교의 중심 이론이 됩니다.


통상의 사람들은 아직 우주와 인생이 연기하는 도리(道理)를 잘 알지 못하고, 결국 우주와 인생은 신(神)의 창조에 의한 것이라고 여기며 의론만 분분하게 하고 일치된 결론을 내리지 못합니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처럼 그 참 모습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무인론(無因論)`을 주장하며 "인생의 빈, 부, 지(智), 우(愚)와 세계의 염(染), 정(淨), 고(苦), 락(樂)이 모두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원인이 있거나 원인 없거나 아무런 상관이 없다. 우리들은 다만 그대로의 고락(苦樂)에 만족하며 `오늘 술이 있으면 오늘 취하고 내일 돈 없는 것은 내일 걱정할 뿐`, 그렇게 만족해야지 쓸데없는 것에 마음쓸 필요가 없어!"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인생을 방임적(放任的이고 낭만적인 태도를 취하여 방종하고 타락하는 낙관파(樂觀派)가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인생관은 부정확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우연히 생기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꽃이 씨앗에서 생기지 결코 단단한 바위 위에 우연히 갑작스럽게 생겨나는 그런 일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은 확고한 일반적인 사실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연기의 도리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정명론(定命論)`을 주장하며 인생 일체 모두가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어서 변경할 수 없는 것으로서 설령 노력을 한다고 해도 쓸데없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부귀하고 안락한 사람은 자기는 영원히 부귀하고 안락할 것이라고 인식하고 현실에 스스로 만족해버립니다. 가난한 사람은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포기하고 다만 소극적이고 비관적인 길로 들어가서 자기에 대한 희망을 일찌감치 버리게 될 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현세 개인의 궁(窮), 통(通), 고(苦), 락(樂)은 모두 각자 자기의 과거에 지은 업인(業因)을 말미암아 조성된 것입니다. 다만 자기 현재의 행위와 노력에 의해서 수시로 전변(轉變)할 뿐, 운명적으로 정해져서 변경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을 믿고 가르침에 따라 성실하게 수행함으로서 현세의 이 몸으로도 악업을 닦고 선업을 증장하여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안은(安隱)한 세계에 머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교의 연기론을 세상을 부정하고 비관하는 관점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우리의 인생을 개척해나가는 근본 사상으로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원시경전(原始經典)에 나타난 연기(緣起)에 대한 것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 형태의 연기설(緣起說)이 있습니다. 그러나 크게 연기법(緣起法)과 십이연기법(十二緣起(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십이연기법은 늦게 성립된 것이므로 별도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초기의 연기법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제존재(諸存在)와 연기(緣起)

 

그러면 일체의 모든 존재가 연기로서 파악될 때 원시경전에서는 과연 제존재(諸存在)를 어떻게 설하고 있고 또한 어떻게 보고 있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원시경전에는 제행(諸行), 제법(諸法), 일체(一切)라는 것을 동일한 모든 존재(諸存在)에 대한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행의 행(行)과 제법의 법(法)은 그 교의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차이 있습니다.


제행의 행은 우리들의 존재를 이루게 하는 것, 또는 의사(意思)에 의해서 형성되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형성되어진 것이란 곧 모든 조건지어진 것, 상호연관적인 것, 상대적인 것, 정신적, 물리적 사상(事相)이나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성된 것 즉 조건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은 주관적 객관적인 모든 것을 가리키는 말로서 정신, 육체적인 모든 인식작용 또는 거기에 근거한 행위, 그 결과 등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행이란 곧 연기론적인 입장에서 설하여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행은 모든 것은 연기적인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말해준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제행에 대하여 잡아함경 1권 1경에 오온(五蘊)이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즉 오온은 모든 존재를 의미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다음 제법의 법은 유지, 지탱의 의미를 가집니다. 조건지어진 것이든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든 이 법이란 말속에는 우주 안팎에 있어서의 상대적이거나 절대적이거나 좋거나 나쁜 것이나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의 제행의 행과의 관계를 볼 때, `일체 중생은 행으로 말미암아 있다.`라고 하고 있듯이 행은 오히려 법에 포함되고 있으면서 또한 같이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잡아함경 제1권 제9경에 제법은 제행과 같이 오온이라고 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아함경제7권 상적유경 제10에는

`만일 연기를 보면 곧 법을 보고 법을 보면 곧 연기를 본다.`

고 설하고 있듯이 법은 곧 연기임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법을 모든 존재를 칭한 것이 라면 그것은 곧 연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일체(一切)란 제행과 제법의 뜻과 같이 모든 존재를 의미합니다.


이상과 같이 제존재를 원시경전에서는 제행, 제법, 일체란 말로 쓰면서 그 교의의 내용은 다 같이 오온(五蘊), 육처(六處), 12처(處), 십팔계(十八界), 명색(名色), 육계(六界) 등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인도 당시의 바라문교에서 주장하는 제존재의 근본원리로서 범(梵)을 설정하고 이것이 전변(轉變)하여 삼라만상이 생겼다는 전변설(轉變說) 일반사상계의 우주 최초부터 독립된 다수의 요소(要素)가 있어서, 이 요소들이 어떤 형식으로 결합하여 우주의 모든 것이 생기게 되었다는 요소설(要素說)과는 달리 인간중심의 존재 즉, 의식과 그 대상으로서 모든 존재를 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제행, 제법, 일체로서의 연기적 존재임을 설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원시불교의 제존재의 의미를 제행, 제법, 일체에서 찾을 수 있고, 그 교의의 내용이 오온, 십이처, 십팔계 등을 설하고, 그것은 곧 연기적 존재임을 보고 있습니다. 

 

(3)-연기의 법칙성(法則性) 

 

일체존재는 생멸변화(生滅變化)하고 이합집산(離合集散)하여 항구불변(恒久不變)의 것이 하나도 없다는 즉, 제존재(諸存在)가 연기적 존재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렇게 무상변이(無常變易)하고 있지만, 그런 현상이 아무렇게나 멋대로 행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 속에는 일정한 법칙이 상주(常住)하여 그에 입각해서 그런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상(無常)하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무상한 것 속에 상주(常住)하는 이 법칙의 존재야말로 더욱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러면 그 제존재의 양상에 따른 즉, 제존재가 연기하는 각각의 법칙성은 어떤 것이 있는가 하는 것으로서, 원시경전에서 대체로 여섯 종류의 법칙성의 유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상의성(相依性), 인연성(因緣性), 무상성(無常性), 무아성(無我性), 공성(空性), 중도성(中道性)이 그것입니다


(3.1)-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


 
먼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는 십이처설에 입각해서 주체적 인간(六根)과 객체적 대상(六境)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면, 인간은 능동적 작용을 일으키는 힘(意志)을 갖고 있으며, 객체적 대상에 그런 작용(힘)을 가하면 대상은 그에 상응하는 반응을 필연적으로 나타냄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과 자연물 사이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이런 관계가 성립합니다. 남이 내게 잘 해주면 나도 그에게 잘 해주지 않을 수가 없고, 남이 내게 나쁘게 대하면 나도 그에게 나쁘게 대해지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따라서 주체적 인간과 객체적 대상 사이에는 인과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의지적 작용이 원인(因)이 되어, 대상의 필연적 반응이 결과(果)로서 따르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그런 의지적 작용을 `업(業, karma)`이라고 부르고, 이에 대한 대상의 필연적 반응을 `보(報, vipaka)`라고 부릅니다. 인과업보(因果業報)라든가, 업인과보(業因果報)라는 말은 이렇게 성립됩니다.


이런 뜻에서 인간의 의지는 세계의 생멸변화를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동시에 인간의지의 절대성을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관찰해 보면 이것이 지나친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계 속에 던져진 인간은 세계에 영향을 끼치지만, 동시에 세계의 영향도 받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있기 때문입니다. 즉, 존재와 존재 사이에는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연화합(因緣和合)에 의해 어떤 결과가 발생하게 되면 그 결과는 다시 그를 발생시킨 원인을 포함한 다른 모든 존재에 대해서 직접적인 또는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단순히 결과로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원인이 되고 연이 되어 다른 존재에 관계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상의상관성이란 말은 바로 이러한 관계를 나타내는 술어입니다. 상의성은 상응부에


`비구들아 연기란 무엇인가 비구들아 생(生)이 있는 것으로 말미암아 노사(老死)가 있느니라. 이 사실은 내가 세상에 나오든 안나오든 법으로서 확정되어 있는 바이다. 그것은 상의성이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현대 불교학자들은 불교 경전에서 이런 상의상관성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교설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즐겨 인용합니다.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생함으로써 저것이 생한다(此生故彼生).
이것이 없음으로써 저것이 없고(此無故彼無)
이것이 멸함으로써 저것이 멸한다(此滅故彼滅)."<잡아함 卷15> 


그리하여 이것을 `연기(緣起)`, 또는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의 기본공식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상의성의 기본공식 중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생함으로써 저것이 생한다(此生故彼生)를 연생(緣生)의 공식, 이것이 없음으로써 저것이 없고(此無故彼無), 이것이 멸함으로써 저것이 멸한다(此滅故彼滅)를 연멸(緣滅)의 공식이라고도 합니다.


이러한 상의상관(相依相關)의 연생연멸(緣生緣滅)의 공식은 잡아함경 제12권에서는 갈대의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즉


`세개의 갈대가 빈 땅에 서려고 할 때에는 서로서로 의지하여야 서게 되는 것과 같나니, 만일 그 하나를 버려도 둘은 서지 못하고 만일 둘을 버려도 하나는 또한 서지 못하여 서로서로 의지하여야 서게 되는 것이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연기의 법칙성은 연생연멸의 상의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류의 철학적 사유에는 제일원인(第一原因)에 대한 탐구가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세계 현상은 무엇을 근본원인으로 해서 그렇게 나타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당시의 바라문교에서는 그것을 범(梵)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범은 일체의 창조주이며, 아버지이며, 자존자(自存者)라는 것입니다.<중아함 卷19 범천청불경> 그러나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바라문교의 그런 주장은 현실의 정확한 포착에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결과임과 동시에 원인이기도 한 상의상관성의 측면을 간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을 떠나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절대적 자존자는 이 세상의 어디에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거대한 천체로부터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는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면서 우주의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현상을 전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3.2)-인연화합(因緣和合) 
 

인연성(因緣性)이란 것은 잡아함경 제12권 인연경에


`나는 이제 인연법과 연생법을 말하리라, 어떤 것을 인연법이라 하는가. 이른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는 것이니, 연기를 그대로 따르나니 이것을 연생법(緣生法)이라 한다.`


라고 설하고 있음을 볼 때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 라는 상의성(相依性) 그대로가 인연성(因緣性)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의성이 이것과 저것이 서로 관계하고 의지함에서 파악된다면 인연성의 의미는 전혀 다르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즉 잡아함경 제1권 인연경에 


`물질은 항상됨이 없다. 혹은 인으로 혹은 연으로 말미암아 모든 물질이 생기더라도 그것은 또한 항상됨이 없느니라 수상행식(受想行識)도 항상됨이 없다.`


라고 하여 인연에 의해서 오온은 생기고 그것은 무상한 존재로서 서로 의지하는 상의성보다 오히려 인과 연이 만나서 하나의 형태가 이루어짐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이루어지는 것 즉 생성의 뜻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인연성은 상의성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상의성과는 전혀 의미를 달리하고 있습니다.


사물의 변화에는 원인과 연(緣)의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이 두 조건이 갖추어짐을 불교에서는 인(因)과 연(緣)의 화합(和合, samgati)이라고 부릅니다. 이 중에서 원인은 직접적이고 연(緣)은 간접적이라는 입장에서 `친인소연(親因疏緣)`이라는 말이 있으며, 서구학자들은 원인(原因)을 `primary cause`, 연(緣)을 `secondary cause`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이런 인연화합설(因緣和合說)은 인간의 성패를 해명하는 원리로도 적용될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하여도 외연(外緣)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뜻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도 당사자의 자발적인 노력이 없을 때는 성공이 또한 기대될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3.3)-무상성(無常性)
 

무상성은 잡아함경 제1권 무상경(無常經)에 의하면 

`물질은 항상됨이 없다고 관찰하라. 이렇게 관찰하면 그것은 바른 관찰이니라. 수상행식도 또한 항상(恒常)됨이 없다고 관찰하라` 

라고 하고 잡아함경 1권 과거무상경(過去無常經)에서는 

`과거와 미래의 물질도 항상(恒常)됨이 없거늘 하물며 현재의 수상행식이겠느냐` 


라고 설하고 있듯이 오온(五蘊)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적으로 계속 변화해 감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곧 모든 존재(五蘊)는 무한히 변해간다는 변화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변화하는 무상성은 잡아함경 제1권 인연경에서 설한대로 `오온은 인과 연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곧 무상이란 존재이다.`라고 하듯이 무상성은 바로 인연성과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이루어지는 것은 모두 변하는 것.`이라고 파악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무상의 법칙은 곧 연기의 법칙의 또 다른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상성은 모든 존재(五蘊)의 실체성이 없음을 말합니다. 증일아함경에는


`몸뚱이(色)는 모인 물거품과 같고 느낌(受)은 떠있는 모인 거품과 같으며 생각(想)은 마치 아지랭이 같고 지어감(行)은 마치 파초 같으며 의식(識)은 허깨비의 법과 같아라.`


라고 하여 오온의 무상함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상경에서는


`모든 것은 덧없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모든 것은 괴롭고 모든 것은 비었으며, 모든 것은 <나>가 아니다. 모든 것은 빈 업의 법이며, 모든 것은 부서지는 법이요, 모든 것은 나는 법이며, 모든 것은 늙는 법이요, 모든 것은 병드는 법이며, 모든 것은 죽는 법이요, 모든 것은 근심스러운 법이며, 모든 것은 번뇌스러운 법이요, 모든 것은 모이는 법이며, 모든 것은 멸하는 법이요, 모든 것은 알아야 하는 법이며, 모든 것은 분별해야 하는 법이요, 모든 것은 끊어야 하는 법이며, 모든 것은 깨달아야 하는 법이요, 모든 것은 증득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악마요, 모든 것은 악마의 세력이며, 모든 것은 악마의 그릇이다. 모든 것은 타고, 모든 것은 불꽃처럼 타며, 모든 것은 사라지는 것이라는 것도 다 위의 두 경에서 널리 말씀하신 것과 같다.`


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아(自我)에 대한 고정적 관념의 부정으로서 모든 존재는 무상하다는 것입니다.


(3.4)- 공성(空性)


 
불교 교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현실 세계(有爲界)가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밝혀주는 부분과, 다른 하나는 진여법계(眞如法界, 無爲界)에 돌아가 올바른 삶을 찾도록 길을 제시해 주는 부분입니다. 유위법은 우리의 전도된 미혹에서 연기한 것으로 인연생멸법(因緣生滅法)을 뜻하며, 그 대표적인 속성(屬性)으로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공(空)` 등을 들고 있습니다.


경에는 유위제법의 무상, 고, 무아, 공 등은 인연이 모여서 생기는 것(因緣會而生)이라고 하며, 다 합해서 모인 제법의 인연을 말미암은 것(皆由合會諸法因緣) 또는 모든 것은 인연이 모여서 생기는 것에 유래하는 것(皆由因緣合會生)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곧 `연기(緣起)`라 할 수 있는데, 경전을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몸(形)은 저절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또한 다른 무엇이 지은 바도 아니라네. 인연이 모여 생겨났다가 因緣이 흩어짐에 곧 스러져 버린다네. 혹 안(眼)이 생길 때에 역시 온 곳을 알지 못하고, 혹 안(眼)이 멸(滅)할 때는 곧 멸하여 또한 간 곳을 알지 못한다. 있지 않다가 안(眼)이 생기며 이미 있었다가도 안(眼)이 멸하나니, 다 합해서 모인 제법의 인연을 말미암은 것이다. 이른 바 인연법이란 있는 것(是有)을 반연하기도 하고 없는 것(是無)을 반연하기도 하는 것이니, 이는 곧 `무(無)`이다. 있지 않다가 생겨나기도 하고 이미 있었던 것이 멸하기도 하나니, 다시 온 곳을 알지 못하고 또한 간 곳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다 합해서 모인 제법의 인연을 말미암은 까닭이다. 다만 아(我)가 없고 아소(我所)가 없나니, 아(我)가 공(空)하고 아소(我所)가 공(空)한 것이다. 법이 생함에 곧 생겼다가 법이 멸함에 곧 없어지나니, 다 인연이 합해 모여서 생김을 말미암음이라."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연기는 여러 가지 조건이 모여서 생기(生起)하는 것으로 `상호인대(相互因待)`의 개념이고, 서로 인대(因待)하기 때문에 모든 실체성이 부정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실체성이 부정되기 때문에 곧 `무아(無我)`이며 `공(空)`인 것입니다.


공은 본래 `연이생법(緣而生法)의 속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법은 무아이기 때문입니다. 공이라고 말한 것은 상식으로 생각하는 고정적 실체인 `아(我)`와 항유(恒有)하는 `법체(我所)`가 불가득(不可得)인 것, 즉 실체로서의 자성이 없음을 가리킵니다.
제법은 다만 가명시설(假名施設)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대.소승을 통하여 일관된 불교의 가장 특징적인 교리라 할 수 있는 `제법무아(諸法無我)` 곧 `제법개공(諸法皆空)`의 사상은 바로 `연기법`에 그 논리적 근거를 두고 있으며, 연이생법(緣而生法)의 연기 또한 근본적으로 무실체의 `공성(空性)` 즉 무아설을 바탕으로 성립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공(空)`이란 용어는 원시불교에서 설한 `무아`와 `연기`의 개념을 기반으로, 대승불교에 이르러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발달된 것인데, 부처님께서 설하신 여러 경문에는 공이 연기법에 상응하고 연기법을 수순(隨順)함을 매우 깊이 밝게 비추고 있습니다.


이처럼 `연기`의 다른 이름이 `공`이지만, 엄밀하게 고찰하면 연기와 공은 단순한 동일,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닙니다. 공은 부정성을 드러내면서 긍정성을 내포하고 있는 반면에 연기는 긍정성을 드러내면서 부정성을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연기와 공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련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3.5)- 무아성(無我性)

 

무아(無我)는 불교의 오묘한 이치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제법은 연생(緣生)하고 만유는 연기하는 것이라고 설하는, 그 목적은 무아(無我)의 진리를 구명하는 데 있습니다. 무아는 연기의 필연적인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불교도라면 맨 먼저 연기에서 무아의 도리를 인식해야 비로소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관념을 인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연기의 이론에서 우주와 인생을 보면, 이 우주 인생은 흡사 서로 뒤얽히고 서로 간섭된 큰 그물과 같습니다. 일체의 모든 사물이 피차 생멸(生滅)하는 이상 모두가 서로 인이 되고 서로 연이 되는 관계에 있습니다. 각 사물마다 모두 자기만의 독립적인 개성은 없고 반드시 여러 방면에서 도움을 받아야 비로소 사회의 일원으로 생존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한 개인과 기타의 사람, 한 사회와 기타의 사회, 그 가운데 모든 기쁨과 슬픔이 함께 상관하며 존재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러한 뜻 위에서 사회에서 서로 돕는 것(互助)과 인생에서 서로 구제하는(相濟)하는 이론을 전개하십니다. 일체의 모든 보살이 노고를 불사하고 중생을 위해서 힘쓰고, 일체의 모든 부처님이 자기를 버려서 수많은 중생을 위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은, 곧 그들(佛菩薩)이 깊이 이 연기의 이법(理法)을 깨닫고 연기에서 무아를 알고, 무아법 가운데서 자기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능히 자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만약 자기 존재를 생각한다면 곧 아애(我愛)와 아소애(我所愛)가 있는 것이며 그처럼 사사로운 이익을 바란다면, 다시 말해서 사람을 위하지 못합니다.


보통 일반의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신체가, 곧 유일한 자기(我)이며, 이 자기(我)가 일체의 모든 것을 주재하는 상일(常一)하고 불변한 존재라고 인식합니다. 그러나 어떤 한 개인의 생명은 자기의 것이지만, 몸뚱이는 부모의 생육과 가정의 교육에 의한 것이고, 의식주는 사회의 여러 힘이 서로서로 합작해서 있는 것이며, 소유한 재산도 사회 경영에서 오는 것이며 개인의 지식, 기능도 학교 교육과 사회 학습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모, 가정, 학교와 사회의 여러 조건을 제외하면 단독적으로 생존할 수 없습니다. 즉, 고정 불변한 내가 존재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연기하는 것은 모두 무아(無我)인 것입니다. 


(3.6)- 중도성(中道性) 
 

중도성은 상응부 2(24)에

" `일체는 유(有)니라.` 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일체는 무(無)니라.` 하는 이것은 제2의 극단이다. 가전연이여 여래는 이러한 등의 양극단을 여의고 중도에 의하여 법을 설하나니라` 

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또 잡아함경에

`스스로 짓고 스스로 깨닫는다고 하면 곧 상견(常見)에 떨어지고 남이 짓고 남이 깨닫는다고 하면 곧 단견(斷見)에 떨어지는 것이다. 뜻의 말과 법의 말은 이 두 극단을 떠나 중도(中道)에 처하여 설법하느니라. 이른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 `

라고 하고 있습니다.


중도에도 여러 가지 형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어떤 내용이든지 극단에 치우치는 견해를 경계하여 석존은 중도를 설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중도(中道)도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는 상의성에 의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중도도 연기의 한 법칙성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출처 : 법화경 오종법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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