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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 [釋迦, BC 563?~BC 483?]

종교학(宗敎學)

by 巡禮者 2010. 8. 18.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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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 [釋迦, BC 563?~BC 483?]

 

싯다르타 고타마(산스크리트어: Siddhartha Gautama, 팔리어: Siddhattha Gotama, 悉達多 喬達摩)는 고대 인도의 종교 지도자로, 불교의 창시자이다. 이름이 '싯다르타'에, 성은 '고타마'이며, 때때로 역순으로 '고타마 싯다르타'로 적기도 한다. 석가족의 왕국인 카필라 왕국의 왕자로 태어났으나 왕궁밖에서 늙고 병들고 죽는 인간의 생애가 고통으로 이뤄져 있으며 이것을 벗어나는 것을 추구하여 왕위와 가족을 버리고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진리를 깨달은 자라는 의미에서 석가모니(釋迦牟尼)라고 불리고, 줄여서 석가(釋迦)라고도 한다. 불교인들은 그를 가장 위대한 부처들 중의 한 사람으로 여기며, 평신도들은 부처와 석가모니를 동의어로 생각하기도 한다

 
우리들은 누구나를 깨닫기만 하면 부처님이라 한다. 그러므로 나도 깨닫기만 하면 부처님이다. 보통 [부처님]이라고 말하는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은 샤카(석가)'족의 '성자'(muni)'를 뜻한다. 본래의 성은 '신성한 소'라는 의미의 고타마(Gotama, 瞿曇)이고, 이름은 싯다르타(Siddhartha, 悉達多;목적을 이룬 사람에게 붙이는 칭호)인데, 후에 깨달음 을 얻어 붓다(Buddha, 佛陀)라 불리게 되었다. 부처님 또는 불타(佛陀)라 말해지는 붓다란 '깨달은 자(覺者)'를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부처님은 사찰이나 신도들 사이에서는 진리의 체현자(體現者)라는 의미의 '여래(如來)', 존칭으로서의 '세존(世尊)'·'석존(釋尊)' 등으로도 불린다.


1. 탄생


부처님은 히말라야 기슭의 작은 부족국가 카필라바스투에서 태어나셨다. 왕비 마야부인은 당시의 풍습에 따라 아이를 낳기 위해 친정으로 가던 중 작은 구릉에서 아기를 낳았다. 여기가 바로 룸비니이다. 룸비니는 지금도 부처님의 탄생설화와 유적을 간직한 채 네팔 정부 그리고 네팔 승려와 티벳 승려들에 의해 수호되고 있다.


그리고 룸비니에서 서쪽으로 14∼15Km 지점에 부처님의 고향인 카필라바스투가 있고 거기서 남동쪽 10Km 지점에 석가족의 도시와 승원터가 남아있는 피프라하와가 있다.


2. 성장


마야부인은 태자가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다. 태자는 이모인 마하파자파티 부인의 손에서 양육되었다. 이 분이 뒷날 최초의 비구니가 된 여성이다. 태자는 정신과 육체가 비범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를 가르친 스승들은 한결같이 그의 총명과 지성에 압도 당하곤 했다. 아름다운 야쇼다라와 결혼도 했으므로 부왕인 슛도다나 왕은 몹시 기뻐했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론 여전히 불안했다. 태자의 성격이 극히 명상적이고 도무지 현실적인 것들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왕은 태자가 태어나고 찾아왔던 아시타 선인의 말이 늘 마음에 걸렸다. "이 분은 세속에 있으면 '전륜성왕'이 될 것이요, 출가하면 대법왕인 부처님이 될 것이다. 슬프다. 나는 늙어 그 때를 볼 수 없으니."라고 한 말이었다.


카필라 왕국은 몹시 강대한 나라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나라는 젊고 유능한 지도자를 필요로 했다.


3. 출가


대개의 불전작가들은 태자의 출가를 "미리 예정되어 있던 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처리방식이라면 태자의 고뇌가 인간적으로 가슴에 와닿지 않는 결점이 있다. 불교가 철저하게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발달해온 만큼, 태자의 출가를 이해하는 우리들의 태도 역시 싯달타의 정신적 고뇌를 이해하려는 개인사적 시각을 지녀야 하지 않을까 한다.


태자의 고뇌는 무엇이었을까. 『불소행찬』의 서술들이 비교적 구체적인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농경제에서의 충격", "나무 아래서의 명상", "사문유관" 등이 태자의 고뇌와 출가 동기에 대한 대표적인 얘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4. 수행의 편력


기원 전 6세기, 부처님의 생존 시에 마가다 왕국은 갠지즈 강 중류에 강력한 제국의 기초를 건설하고 있었다. 또한 이 시기는 새로운 종교가 꽃을 피운 시대였다. 인도 3대 종교의 하나인 자이나교의 창시자 마하비라도 이 시기에 바이샬리에서 태어났다.


부처님의 출가행로는 이 마가다국의 서울 라자그리하를 향하고 있었다. 도중에 수많은 선지식을 만났지만 대표적인 수행자는 아라라 칼라마와 우드라카 라마푸트라다. 그들은 각기 많은 제자들을 거느린 훌륭한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궁극적인 깨달음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이들에게서 수행의 기초와 정신상의 여러 가지 단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들의 학설이 초기 경전에는 자주 등장한다.


5. 성도


라호르 박물관에 있는 "태자의 고행상"이 보여 주는 것처럼 부처님은 지독한 고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부처님은 라자그리하를 떠나 가야의 산에 머물고 계셨다. 결국 그는 고행을 끝내기로 결심했다. 함께 하던 다섯 명의 수행자들로부터 빠져 나왔다. 뒷날 "양 극단에 머물지 말라"고 가르친 가르침도 이 때 얻으신 경험이었다.


전정각산을 거쳐 나이란자라 언덕에서 수자타의 우유죽으로 정신을 차린 후 보드가야 큰 보리수 아래를 수행처로 삼고 보편적인 수행생활로 들어갔다. 좌선의 명상법이었다. 어느날 새벽별을 보며 의심이 없는 확실한 경지에 도달했다. "무상정각無上正覺"을 얻어 부처가 된 것이다. 동·서학자들이 "지고한 통찰력"이라고 부르는, 인류의 교사로서 명실상부한 성자의 안목을 얻으셨던 것이다. 부처님의 일생체험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 대목에 대한 경전의 서술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그리하여 내게 지견智見이 생겼다. 나의 해탈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내 마지막 생애이고 이 이상 다시 태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생은 이미 다하고 청정한 수행은 이루어져 소작도 죄도 다 가려졌네. 다시 유有를 받지 않으며 진여를 알다." <불타 석가모니>


"더러움은 모두 없어져 버렸다. 더러움의 흐름은 모두 멎었다. 이 이상 태어나는 길을 따르지 않으리. 이것을 고뇌의 최후라고 이름한다." <잡아함, 열반경>

 

6. 최초의 설법


정각을 이루신 부처님은 여행을 떠나 녹야원에서 함께 수행하던 다섯 동료 수행자에게 최초의 설법을 행하신다. 드디어 법왕의 법이 굴러가기 시작한 것이다. 보드가야에서 녹야원이 있는 바라나시까지는 240여 Km, 당시 여정으로는 짧은 거리가 아니다.


부처님은 깨달으신 다음에도 정진을 계속하셨으며,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설법 여행을 계속했다. 또한 부처님의 말씀은 너무나 개혁적이어서 법문을 받아들이기에 누구나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7. 죽림정사와 기원정사


현존하는 건물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지만, 부처님에 관한 유적은 여러 지방에 걸쳐 남아있다. 그중에서도 교단사적인 측면에서 라지기르의 죽림정사와 쉬라바스티의 기원정사가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죽림정사는 승단 최초의 정사로 의의가 크며 입멸 후 이곳 근처에서 최초의 경전 결집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기원정사는 부처님의 고향이 가까운 인도 중북부 평원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부처님은 스물다섯 번의 우기를 지내셨다. 또한 이곳은 당시 코살라국의 서울로 아요드야, 코삼비, 카필라 등 부족국가를 예속시키고 있던 정치중심지였다.


아함경의 대부분 경전이 여기에서 설해졌고 우리가 수지독송하는 금강경을 비롯해 수많은 경전이 기원정사에서 탄생되었다. 7세기 중국의 현장 삼장이 이곳을 순례했을 때만 해도 승려와 가람으로 활기찬 곳이었으나 12∼13세기 이교도의 침입으로 퇴락, 지금은 유적의 형태만 스리랑카와 버마 승려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8. 부처님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합리적이어서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쉽다는 느낌을 받는다. 따라서 분석적이고 논리적이라는 귀결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일어나므로 해서 이것이 일어난다는 '연기론'은 세계를 이해하는 중심 테마이지만 거기서 한 걸음 나아가 열반 즉 평온 에 이르는 네 단계의 성스런 관찰을 통해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언어, 바른 행위, 바른 삶, 바른 정진, 바른 생각, 바른 선정을 실천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합리적 사고로 출발하고 이성적 비판을 거쳐 완전한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말씀들은 매우 쉽고 간결하며 다양하다. 이것은 민족과 사상에 구애받지 않고 인간이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융화적인 태도이다. 불교는 생명력 있는 사고만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9. 열반


길에서 길로, 오직 법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맨발로 걸었던 부처님에게도 육체의 죽음은 다가오고 있었다. 부처님의 마지막 1년은 공교롭게도 출가의 여정을 되짚어 오는 것이었다. 망고나무 우거진 언덕에서 바이샬리를 돌아보며 "아난아 이제 바이샬리를 보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다."라고 예언하셨다. 가르침이 세계로 뻗어나간 부처님의 열반은 매우 조용하고 평화스럽게 이루어진다.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으라"는 말씀을 남기시며 쿠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드신다.
화장하고 나온 사리와 숯은 일곱 나라의 왕과 한 사람의 바라문이 각기 자기 나라로 가져가 탑을 모셔 봉안했다. 바이샬리의 마지막 안거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법문도 그렇거니와 열반경에 기록된 마지막 말씀은 매우 짧고 간결한 것이었다.

 

"모든 현상은 변천한다.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

 

 


#석가모니의 여러 이름들
 

석가모니는 불교 경전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에 따라서 다음의 이름으로 대칭되어 지기도 한다. (로마자 표기는 산스크리트어 표기)


여래 (如來, Tathagata):참 됨을 몸소 갖추고 있는 분.
아라한 (阿羅漢, Arhat):세상에서 공량과 우러러움을 사고 있는 분.
정각자 (正覺者, Sambuddha):올바로 깨달음을 얻은 분. 길게는 무상정등각자 (無上正等覺者 Anuttara Samyaksambuddha) 혹은 정등각자(Samyaksambuddha)로 일컬어짐.
명행족 (明行足, Vidyacarana Sampanna):하는 일에 허물이 없는 분.
선서 (善逝, Sugata):뛰어나게 참됨에 다다른 분.
세간해 (世間解, Locavit):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분.
무상사 (無上士, Anuttara purusa):가장 높은 자리에 계신 분.
조어장부 (調御丈夫, Purusadamya sarathin):사람을 다루고 바르게 이끌어 가는 분.
천인사 (天人師, Sasta devamanusayanam):신들과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분.
세존 (世尊, Bhagavat):세상에서 가장 높이 받들어지는 분.
팔만대장경의 기록에 보면, 제자들은 석가모니를 "세존이시여", "고담(고타마의 한역)이시여", "여래께서" 등으로 부르고 있다.

 

 

 

#십대제자


십대제자(十大第子)는 석가모니의 제자 중 수행과 지혜가 뛰어난 10명을 가리킨다. 경전에 따라 누가 10명에 들어가느냐는 달라지나, 유마경에 따르면 아래와 같다.


1.사리불(舍利弗): 수제자라 일컫는다. 사리자(舍利子)라고도 쓴다. 지혜제일.
2.목건련(目?連): 사리불과 함께 회의론자 산자야의 제자였으나, 불도에 귀의하게 되었다. 신통제일. 목건라야나(目?羅夜那), 마하목건련(摩訶目?連).
3.가섭(迦葉): 석가모니 사후 교단을 통솔하여, 오백 아라한과 석가모니의 법률을 편집(제1결집)하여 부법장(付法藏)의 1조(祖)가 되었다. 두타제일(頭陀第一).
4.수보리(須菩提): 공(空)에 대한 설법을 잘 하여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 불렸다. 서유기에서 손오공의 스승으로 등장한다.
5.부루나(富樓那): 부루나미다라니자(富樓那彌多羅尼子), 만자(滿慈), 만자자(滿慈子). 설법제일.
6.가전연(迦?延): 마하가전연(摩訶迦?延). 논의제일(論議第一).
7.아나율(阿那律): 아난과 함께 출가했다. 석가모니의 앞에서 졸다가 꾸지람을 듣고 잠들지 않을 것을 맹세한 뒤 눈을 잃게 되었으나, 대신 진리의 눈을 얻었다. 천안제일(天眼第一).
8.우파리(優婆離): 우발리(優跋利), 우파리(優波梨). 지계제일(持戒第一).
9.아난(阿難): 아난다, 아난타(阿難陀). 석가모니가 열반할 때까지 25년간 시중을 들었다. 제1결집 때 그의 기억에 기초하여 경이 편찬되었다. 다문제일(多聞第一).
10.라훌라(羅?羅): 나후라, 라후라. 석가모니의 아들로, 사미승의 시초가 되었다. 밀행제일(密行第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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