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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사상 - 맹자

東洋哲學

by 巡禮者 2010. 8. 18.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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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孔子)가 죽은 후, 제자들은 공자의 사상을 계승하여 계속 전파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유가학파는 8개의 유파로 분화되었는데, 그 중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것은 맹자의 맹씨지유(孟氏之儒)와 순자(성씨를 손 孫이라고도 함)의 손씨지유(孫氏之儒)이다. 초기 유학가 중에서 맹자와 순자는 공자의 뒤를 계승한 가장 유명한 사상가이며, 그들은 유가학설을 새롭게 발전시켰다.

 

맹자(孟子, 약 BC372~BC289)는 이름이 가(軻), 전국시대 노(魯)나라 추(鄒, 지금의 산동 山東 추현 鄒縣) 사람이다. 그의 일생은 공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제(齊), 송(宋), 노(魯), 등(?) 위(魏)나라 등지를 다니면서 사방에서 유세를 하였으며, 제(齊)나라에서는 관직을 역임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제후들의 신임을 얻지 못한 채 자신의 정치적 생애를 마감할 수밖에 없었기에 추(鄒)나라로 돌아와서 제자들을 양성하면서 저술에 힘썼다. 그의 저작인 ≪맹자(孟子)≫는 공자의 ≪논어≫와 마찬가지로 유가(儒家)의 경전이다.

 

맹자사상의 가장 큰 특징은 공자의 '인(仁)' 사상을 계승 발전시켜 공자의 '인'을 정치에 응용하여 '인정설(仁政說)'을 제기한 것이다.

맹자는 '백성이 가장 귀중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며, 군주는 중요하지 않다(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고 생각하였다. 즉, 군주는 오직 인민과 그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어야만 비로소 천자(天子)가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국왕은 반드시 국민들에게 '인정(仁政)'을 실행하여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윤택하고 화목한 생활을 보장해야 하는데, 만약 국왕이 '인정'을 실행하지 못하여 국민들의 원성을 사게 되면 당연히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맹자는 '인정' 사상을 바탕으로 하면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천하를 통일할 것을 주장하고, 제후들 사이의 겸병(兼倂)전쟁을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이러한 '인정' 사상은 맹자가 사상가로써 이미 민중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맹자사상의 두번째 특징은 '성선론(性善論)'을 제기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인정' 사상의 이론적 기초이면서 유가학설에 대한 또 하나의 공헌이기도 하다. 유가사상은 사람들에게 덕성(德性)을 수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선을 행하고 악을 저지르지 말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적 근거에 대하여 공자는 직접적인 답변을 하지 않았지만 맹자는 분명히 밝히고 있다. 맹자는 선(善)과 인성(人性)을 함께 연계시켜 인성은 본래부터 선한 것이며,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공경지심(恭敬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 즉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네 가지 도덕 정감, 바로 양심(良心)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학습을 필요로 하지 않는데, 이것이 바로 사람이 금수(禽獸)와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점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맹자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 네 가지의 선(善)을 확충해야만 되며, 만일 그렇지 않으면 인성(人性) - 선성(善性)을 상실하게 되어 금수만도 못하게 될 것이라 인식하였다. 맹자의 '인정설'은 이러한 이론에 의거하여 나온 것이다. 그는 사람은 모두 동정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동정심을 정치상으로 확대 응용한 것이 바로 '인정'이라고 생각하였다. 맹자가 제기한 '성선론'은 후세에 매우 많은 영향을 미쳐 고대 중국의 봉건시대에 정통적인 관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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