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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사상 - 공자

東洋哲學

by 巡禮者 2010. 8. 18.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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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孔子)와 유가학설의 창립 -

 

중국의 유가사상은 공자(孔子)에 의해 창립되었다. 공자(孔子, BC 551~BC479)는 성이 공(孔), 이름이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며, 춘추(春秋)시대 노(魯)나라 사람으로 중국 고대의 위대한 사상가이면서 교육가이다.

 

공자가 생활한 춘추시대는 바로 노예제도가 이미 쇠락하고 봉건제도가 바야흐로 흥기하여, 중국사회에 대변동이 발생한 시기였다. 당시에는 각종 사회 사조가 활기를 띠어 많은 학파가 출현하였다.

 

공자가 성장한 마을은 노성(魯城: 지금의 산동 山東 곡부 曲阜)인데, 이곳은 당시에 노나라의 수도이면서 서주(西周) 초기의 유명한 정치가였던 주공(周公)의 봉지(封地)로써 문화가 비교적 발달하여 공자에게 매우 많은 영향을 미쳤다. 공자는 어린시절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였으며, 30세 때에는 이미 매우 높은 학문적 수양을 갖추어 사회 국가통치 교육 등에 대하여 자신의 사상 주장을 완성함으로써 저명한 대학자가 되었다. 이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가르침을 구하였던 것이다. 공자는 그의 지식을 전수하기 위하여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였으며, 개인의 신분으로 제자를 모집하여 학문을 가르치는 사학(私學)의 기풍을 처음으로 열었다.

 

공자는 51세 때에 중도재(中都宰)의 관직(즉 중도현 中都縣 현장 縣長)을 역임하였으며, 52세 때에는 노나라의 대사구(大司寇)에 임명되어 전국의 치안 사법 대권을 관장하였다. 그 후에 다시 대리재상(代理宰相)에 임명되었으나, 정치적으로 실권자인 계손씨(季孫氏)의 배척을 받아 국왕의 신임을 잃었다. 공자는 55세 때부터 침통한 심정으로 노나라를 떠나 열국(列國)을 두루 유람하기 시작하였다. 공자는 14년간의 유랑생활 중에 곳곳에서 유세를 하면서 자신의 사상과 정치적 주장을 피력하다가, 68세에 이르러 다시 노나라로 돌아왔다.

 

공자는 귀국한 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그대로 견지하였기 때문에 관직에 중용될 수 없었다. 이에 공자는 교육과 고문헌 정리 작업에 전력을 기울여 유가학설과 유가학파를 창립하였던 것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공자에게는 3,000명의 제자가 있었고, 우수한 자가 72명이 있었는데, 그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은 후에 정치적으로 유능한 인재가 되었다고 한다. 공자가 정리한 유가경전인 ≪서(書)≫ ≪시(詩)≫ ≪예(禮)≫ ≪악(樂)≫ ≪역(易)≫ ≪춘추(春秋)≫는 후래에 '육경(六經)'이라 일컬어졌으며, 이것은 중국 상고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공자가 죽은 후 그의 제자들은 그의 언론(言論)을 편집하여 한 권의 책으로 엮고 이름을 ≪논어(論語)≫라 하였다. ≪논어≫에는 공자의 사상이 집약되어 있으며, 그것은 역대로 유가사상 체계의 창시적 저작으로 간주되었다. 중국에서 ≪논어≫의 지위는 서양의 ≪성경(聖經)≫에 버금간다. 공자 본인은 중국 고대의 최대의 성인이면서 우상이 되어 이후 대대손손 중국인의 숭배를 받았다.

 

1) 공자의 주요 사상

 

① 예(禮)

 

공자는 '예(禮)'로써 나라를 다스릴 것을 극력 주장하였는데, '예'는 바로 그의 사상의 핵심이다. 그가 말한 '예', 즉 '주례(周禮)'는 좁은 의미에서 말하면 제례(祭禮), 혼례(婚禮), 상례(喪禮), 외교례(外交禮), 작전례(作戰禮) 등의 각종 예의를 포괄하고 있으며, 넓은 의미에서 말하면 주대(周代)의 모든 전장제도(典章制度)와 도덕규범을 가리키는 것이다. 주례의 기본 원칙은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君君臣臣父父子子)'는 것이다.

 

즉 이것은 바로 주대(周代)의 사회 각 계층의 친소(親疎), 귀천(貴賤), 장유(長幼)의 종법(宗法) 등급 관계이다. 공자는 주례에 규정된 등급제도, 사회질서, 도덕규범, 예의요구가 가장 완벽하고 가장 이상적이어서 단지 개개인이 모두 그것을 엄격히 준수하기만 하면 사회가 안정되고 천하가 태평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춘추시대에 신구세력의 격렬한 투쟁으로 사회적 불안과 예악(禮樂)의 붕괴 국면을 맞이하여 공자는 '정명(正名)'을 주장하고 사람들에게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마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고 요구하였다. 즉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君君臣臣父父子子)'는 등의 예의제도로써 혼란한 질서를 바로잡고자 하였던 것이다. 공자는 그의 유가학설 속에서 '예'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 가장 많은데, 실제로는 사람들에게 노예사회 종법 등급 관계의 합리성을 인정하게 하여 주대(周代)의 전통을 회복하고 계승하고자 하였다.

 

② 인(仁)

 

공자는 '인(仁)'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의 해석은 매우 많지만 주요 내용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人)', 즉 사람과 사람간에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될 수 있는가? 그는 그 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첫째는 '자기가 서고자 하면 다른 사람을 세워 주고, 자기가 이루고자 하면 다른 사람을 이루게 해야 한다(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는 것이고, 둘째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마라(己所不欲, 勿施于人)'는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모두 이 두 가지를 행할 수 있으면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는 화목해지고 사회도 안정될 것이다.

 

공자는 대체로 '예'에 부합되는 사상 행위 도덕은 모두 '인(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기를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克己復禮爲仁)'고 하였는데, 이 말은 자기를 억제하여 그것을 '예'의 요구에 부합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인(仁)'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공자가 '인'과 '예'를 각각 언급하였지만 정신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으로, '예'가 강조하는 것은 외재적인 행위규범이고, '인'이 강조하는 것은 내심의 도덕자각인데, 양자가 결합되어 사회의 안정과 질서를 유지시키고 사람과 사람간의 우애와 화목을 도모하는 것이 바로 그의 이상이라는 설명이다.

 

③ 중용(中庸)

'예'와 '인'은 공자의 이상 원칙이고, 정치생활과 일상 사회생활 속에서 이러한 원칙들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정확한 사상방법이 있어야 한다. 공자는 이 정확한 방법이 바로 '중용(中庸)'이라고 생각하였다.

'

중용'이란 간단히 말하면 극단으로 치닫지 않고 중간을 취하면서 양단(兩端)을 상호 제약하고 보충함으로써 만족스러운 결합에 도달하는 것이다. 만약 한쪽만 돌아보고 다른 한쪽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극단주의'가 될 것이며, 그 결과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그는 '예를 시행하는 데는 조화가 중요하다(禮之用, 和爲貴)'고 주장하였는데, 이 '조화(和)'가 바로 거기에 꼭 맞는 것이다. 공자가 당시에 지적한 최대의 양단(兩端)은 '예'와 '인'이다. '중용' 사상에 의하면, 단순히 '예'만 행하고 '인'을 돌아보지 않아도 안되고, 단순히 '인'만 행하고 '예'를 돌아보지 않아도 안되며, 양자가 '중화(中和)'되어 '중정(中正)'에 도달하여 '예'에도 부합되고 '인'에도 부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의 이러한 '중용'의 도는 후대에 중국인들이 문제를 처리하는 중요한 사상 방법이 되어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④ 천명(天命)관

공자 이전에도 천명관은 중국에서 성행하였는데, 인간의 모든 것은 모두 '하늘(天)'이 부여한 것이며, '하늘' 앞에서 인간은 아무런 힘을 쓸 능력도 없고 어떠한 일도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공자는 옛날의 천명관을 타파하고 새로운 천명관을 제시하였다. 공자는 한편으로는 천명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삶과 죽음에는 운명이 있고, 부와 귀는 하늘에 달려 있으니(死生有命, 富貴在天)', 천명은 아무도 알 수 없고 저항할 수 없으며, 인간에게 행이나 불행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운명(命)이 인간의 정신도덕을 결정할 수 없고, 사람은 비록 현실생활 속에서 자기의 운명을 결정할 수는 없지만, 도덕생활 속에서는 학습과 수양을 통하여 매우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천명관에 의거하여 공자는 귀신에 대하여 '공경하되 멀리한다(敬而遠之)'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부정도 하지 않고 숭배도 하지 않았다. 공자의 이러한 태도는 옛날의 천명 귀신(天命鬼神)관에 대한 변화와 인생에 대한 중시를 반영하고 있으며, 이는 당시 중국인들이 인식상에서 크게 진보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⑤ 교육사상(敎育思想)

공자는 위대한 사상가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교육가이기도 하다. 그는 사학(私學)을 창시하여 관학(官學)의 독점을 타파하였는데, 이는 중국 교육사상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공자는 교육대상에 있어서 '교육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有敎無類)'는 주장을 하여 등급과 종족을 구분하지 않고 배움을 청하는 자라면 누구든지 모두 환영하였다.

 

교육방법상에서 그는 '능력에 따른 교육(因材施敎)'을 주장하여 학생들의 서로 다른 수준과 특징에 의거하여 각기 다른 방법으로써 교육하였다. 그는 계발식 교육을 제창하여 학생들에게 '하나를 보고 열을 알게 하고(擧一三反)', 선생은 학생이 독립적으로 연구에 몰두하는 기초 위에서 계발과 지도를 진행하였다.

 

학습태도상에서 그는 겸허호학(謙虛好學: 겸허하게 배우기를 좋아함)을 주장하여,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고 하였다. 학습방법상에서 그는 반복학습을 강조하여, '옛 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알고(溫故而知新)',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고 하였다. 그는 학습은 사고를 잘해야 하며 학습과 사고가 결합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두워지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게 된다(學而不思則 , 思而不學則殆)'고 하였다. 교육에 관한 공자의 이러한 사상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깊은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2) 공자에 대한 평가

 

첫째, 공자는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었다. 공자는 노예사회였던 서주(西周)의 제도를 따를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당시는 서주의 제도가 이미 몰락하고 봉건제도로 대체되고 있었다. 그가 목도한 예악(禮樂)이 붕괴되는 사회적 혼란은 실제로는 신구 사회제도의 과도시기에 나타나는 정상적인 현상이었다. 그러한 상황하에서 공자는 구제도를 주장하여 사회의 질서를 통일 안정시키려고 했기 때문에, 그의 견해는 상대적으로 신흥 지배계급의 중시를 받을 수 없었는데, 이것이 바로 공자가 일생동안 정치적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던 중요한 원인이다.

 

둘째, 공자는 하나의 완전한 사상체계를 창립하였다. 그는 현실 인생 도덕 지식 교육을 중시하여 사회 정치를 개인의 도덕수양과 결합하였는데, 그 근본 정신은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이고, 그 정신의 본질은 현존하는 사회제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공자의 사상 기초 위에서 형성된 유가학설과 유가학파는 후대에 봉건 지주계급이 정권을 공고히 한 이후에 곧바로 채택되었으며, 아울러 역대 유학가들에 의한 수정과 보완을 거치면서 발전을 거듭하여 2천년 중국 봉건사회의 주요 통치사상이 되어 중국과 중국인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다.

 

셋째, 공자의 ≪논어≫ 속에는 사회, 인생, 교육, 학습 등에 대하여 심오한 철학적인 사상이 풍부한데, 여기에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보편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의 사상은 영원히 후세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줄 수 있는 인류공동의 정신적 재산인 것이다. 실제로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많은 말들은 이미 세상 사람들의 입에 폭넓게 오르내리는 경구(警句) 격언 좌우명 등으로 소중하게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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