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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4)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씨앗/배광하 신부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0. 7. 30.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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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4)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씨앗/배광하 신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1, 25~30)
발행일 : 2008-07-06 [제2606호, 6면]

- 사랑하는 교우들 보아라 -

사제의 길

일전에 모 방송국에서 제작한 <차마고도>라는 특집 방송을 시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차와 말을 바꾸기 위한 상인들의 고단하고 위험한 여행은 실로 감동 이상이었습니다.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죽음을 무릅쓴 여행은 인간 의지의 장한 승리를 보는 듯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172년 전인 1836년 조선의 세 소년(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이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 변문을 넘어 중국 대륙을 횡단합니다. 약 6개월에 걸친 대장정의 길을 15세의 어린 소년들이 걸어간 것입니다. 가족의 부양이 아닌 사제의 길을 걷기 위하여 그 모진 여행을 감행한 것입니다.

1836년 12월 겨울에 출발하여 이듬해 1837년 6월 초여름에 도착하는 죽음을 무릅 쓴 사제가 되기 위한 길, 순교의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중국 마카오 신학교에 도착하여서도 사제의 길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음식과 언어, 기후와 풍습 등이 낯선 곳에서 신학 수업을 받아야 했고, 그토록 사랑했던 동료 최방제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던 슬픔이 있었고, 마카오 민란으로,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공부를 계속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모든 시간과 세월은 그냥 흘러간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조국의 교우들을 위한 피나는 노력의 세월이었던 것입니다.

이승의 시간으로는 너무도 짧았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사제생활, 1845년 8월 17일 사제수품, 이듬해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시기까지 1년 1개월간의 짧은 사제생활을 위하여 바치신 10년의 세월은 가슴 절절한 아픔이 있는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교우들의 신앙을 위해 선교사 영입 운동, 스승 신부님과 주교님들께 조선 천주교회를 위하여 보낸 많은 서신들 속에 담긴 복음선포의 노력, 후배 신학생들을 위한 애정과 헌신 등, 그리고 많은 순교자들을 위한 조사와 보고는 이 땅에 신앙의 초석을 쌓기 위한 황금 같은 세월이었습니다.

단 하루를 살아도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은 사제, 희생 제사의 제물이 될 사제의 삶을 택하신 거룩한 삶이었던 것입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주님 사랑과 교우들 사랑은 마치 아가서의 말씀을 꼭 빼어 닮았습니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정열은 저승처럼 억센 것, 그 열기는 불의 열기 더할 나위 없이 격렬한 불길이랍니다. 큰 물도 사랑을 끌 수 없고 강물도 휩쓸어 가지 못한답니다”(아가 8, 6~7).

순교의 길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비롯한 이 땅의 103위 시성식 강론에서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치명자들의 죽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닮은 것은, 그들의 죽음도 새 생명의 시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이 새 생명은 그리스도를 위해 죽음을 당한 그들에게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남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와 증인들의 산 공동체로서의 교회 안에 누룩이 된 것입니다. ‘치명자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씨앗’이라는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의 격언이 우리 눈앞에서 확인된 것입니다.”

제3대 조선 대목구장을 지낸 페레올 주교님의 서한에는 마지막 순교 장면이 생생하게 나옵니다. 새남터의 군문효수 형장에서 김대건 신부님은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였으니 여러분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을 한 것은 내 종교를 위해서였고 내 천주를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천주께서는 당신을 무시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벌을 주시는 까닭입니다.’

이런 말을 한 후 옷을 반쯤 벗기었다. 관례에 따라 그의 양쪽 귀를 화살로 뚫고 화살을 그대로 매달아 두고 얼굴에 물을 뿌리고 그 위에다 회를 한줌 뿌렸다. 그런 다음 두 사람이 그의 겨드랑이에 몽둥이들을 꿰고 그를 어깨에 맨 채 그 원 둘레로 빨리 세 번을 돌았다.

그런 다음 그의 무릎을 꿇리고 머리채를 새끼로 매어 말뚝 대신 꽃아 놓은 창 자루에 뚫린 구멍에 꿰어 반대쪽에서 그 끝을 잡아당겨 머리를 쳐들게 하였다. 칼을 든 군사 12명이 싸움하는 흉내를 내면서 김대건 안드레아의 주위를 빙빙 돌며 제각기 순교자의 목을 쳤다. 머리가 여덟 번째 칼을 맞고야 떨어졌다.”

김대건 신부님은 1846년 6월 5일 체포되시고도 순교 때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문초를 받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신앙을 지키기 위한 순교의 길을 용감히 걸으셨습니다. 그분 순교의 피가 이 땅에 흘러 소중한 신앙의 꽃이 피어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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