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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1)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배광하 신부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0. 7. 31.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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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1)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배광하 신부

연중제22주일 (마태 16,21~27)
발행일 : 2008-08-31 [제2613호, 6면]

- 심장 속에서 타오르는 주님 말씀 -

착각

19세기를 지나며 과학자들은 빛의 정체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빛은 다양한 길이의 파장을 가지고 있는데, 파장이 짧을수록 온도는 더 뜨겁다는 것입니다. 결국 파장이 긴 빨간색보다 파장이 짧은 파란색이 더 뜨겁다는 것입니다. 파란색은 언제나 차가운 색깔로 인식되어 왔었는데, 파란색이 뜨거운 색이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의 몸을 이루는 가장 작은 물질이자 시작인 원자 역시 파란색이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 말고도 인간의 과학이 발전하게 되면서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속속들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늘 크고 작은 착각과 판단, 편견 속에 살고 있습니다. 신앙에서도 이 같은 착각과 편견은 계속되어 왔었습니다.

이를테면, 인간에게 닥치는 모든 고통을 하느님의 탓으로 돌리는 일, 부활만을 꿈꾸며 십자가는 멀리하는 안일한 신앙, 예수님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을 강조하며 심판과 정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그릇됨, 또는 그 반대의 신앙으로 심판과 징벌만을 강조하는 믿음, 기복적인 신앙만을 추구하며 교회는 복을 주어야 한다고 떼를 쓰는 신앙, 이 모든 그릇된 신앙 뒤에 반드시 존재하는 오류는, 자기 희생의 십자가는 싫고 축복의 부활, 영광, 행복만을 추구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고난을 반대했던 오늘 복음의 베드로 사도는 그 좋은 예입니다. 그 같은 그릇된 믿음을 추구할 때, 우리 또한 예수님의 심한 꾸중을 듣게 될 것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 23)

우리의 믿음은 종종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기의 생각, 편견, 착각, 교만함 속에 있어 왔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는 신앙이 아닌 무엇인가 계속 움켜쥐는 신앙을 추구해 왔습니다. 그러니 자유롭지 못하고 신앙의 참된 기쁨을 만끽하지 못하였습니다.

자유와 기쁨을 살지 못하였기에 십자가는 늘 짐이었고, 신앙의 걸림돌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짜증과 미움과 절망적인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십자가는 피하면 피할수록 지겨움을 만들고, 불평불만을 하면 할수록 더 큰 짐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러나 기쁨으로 받아들일 때는 그 모든 무게가 사라지고 인내가 생겨 힘 있게 안고 갈 수 있게 됩니다.

산 제물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 너무 벅차 하소연 합니다.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고, 조롱과 치욕이 그를 괴롭힙니다.

우리 또한 참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같은 아픔을 겪게 됩니다. 직장 동료들이나 가족, 친지들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고 바보란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사

도 성 바오로의 신학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십자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바보로 사는 것, 손해보며 사는 것, 계산적이지 않고 세속적인 이윤의 잣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가 너무 힘겨워 울부짖던 예레미야 예언자는 그래도 끝내 하느님 사랑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 9)

우리가 세상에서 십자가를 살기에 너무도 힘겨워 할 때,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위로와 용기를 가지면, 말씀 안에서 인간의 힘으로는 감히 형언할 수 없는 주님의 놀라운 권능의 힘을 체험하게 됩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말씀을 믿는 정도가 아니라, 그 말씀이 우리들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 자신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세상의 십자가가 결코 고통의 무게로 다가오지 않게 됩니다. 부활은 분명 십자가의 죽음 뒤에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1975년부터 이슬람 국가인 방글라데시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고 있는 미국인 ‘봅 멕카일’ 신부는 그곳 방글라데시의 무슬림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 무얼 주겠냐는 질문에, “당신이 그리스도교를 믿으면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고통뿐입니다”라고 대답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짧은 대답에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십자가의 역설적인 신비가 다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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