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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9) 하느님 나라 위한 겸손·정의 실천/배광하 신부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0. 7. 31.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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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9) 하느님 나라 위한 겸손·정의 실천/배광하 신부

주님 세례 축일 (마르 1, 7~11) : 하늘이 열립니다
발행일 : 2009-01-11 [제2631호, 6면]

사랑하는 아들

세례자 요한의 인품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겸손’입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세례 운동 당시 예수님보다 군중들의 인기가 높았습니다. 더구나 많은 제자들이 그를 예언자로 여기며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며 예언자도 아니라고 소개합니다. 그저 주님 오실 길을 닦는 광야의 소리에 불과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서는 끊임없이 작은 자로서의 겸손을 보입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 27).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마태 3, 14)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 30).

인간이 태초에 지은 원죄는 교만이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조물주이신 하느님과 같아지려 하였던 교만이 원죄였던 것입니다. 교만으로 말미암아 닫혀진 하늘 문이 세례자 요한의 겸손과 구세주 예수님의 낮추임으로 오늘 요르단 강에서 열립니다. 하늘을 열리게 만든 사건은 진정 ‘겸손’이었습니다. 이 겸손이 폭력과 미움과 시기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고, 하늘과 땅의 막혔던 담을 헐어버리고 소통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가장 작은 자로서의 낮추임이며 우리 또한 세례를 받음으로 그렇게 낮아짐의 삶을 살라는 초대입니다.

중국 현대사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히는 ‘루쉰’(1881~1936)은 1918년 그의 첫 작품인 ‘광인일기’에서 현대인들의 비극적인 삶에 대하여 이렇게 비판합니다.

“자신은 사람을 잡아먹으려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잡아먹힐까 두려워 모두들 매우 의심쩍은 눈초리로 서로 얼굴을 훔쳐본다. 그런 생각을 버리고 마음 편히 일하고 길을 걷고 밥 먹고 잠을 잘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그건 단지 문지방 하나, 작은 고비 하나 넘는 일인데, 그런데도 그들은 부자, 형제, 부부, 친구, 스승과 제자, 원수들과 서로 모르는 사람들까지 모두 한패가 되어 서로 격려하고 견제하면서 죽어도 그 한 발자국을 넘어서지 않겠단다.”

한 발자국을 넘어서는 것은 자신의 낮추임입니다. 이 같은 낮춤이 없어 인간과 인간 사이, 하늘과 인간 사이의 문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도무지 실행하지 않기에 오늘 하느님께서 스스로 낮추시고 먼저 요르단 강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마음에 드는 아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서 행하신 세례 운동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과 같은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전과 사제들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사제들은 백성이 죄를 짓고 그 죄를 속죄하는 뜻으로 바치는 제물을 먹고 살았습니다.

그것이 도를 넘어 속죄 제물을 탐욕하는 타락으로 변절되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구약의 예언자들은 이를 신랄하게 고발하였고 질책하였습니다.

“그들은 내 백성의 속죄 제물을 먹고 살며 내 백성이 죄짓기만 간절히 바란다”(호세 4, 8).

백성들이 자꾸 죄를 짓고 속죄 제물을 바쳐야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성전 사제들,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저항의 고발이 세례 운동이었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는 날마다 성전에 올라가 속죄 제물을 바칠 필요 없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뉘우침을 행실로 보이며 강물에 몸을 담그면 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이 받아야 할 세례를 받으신 것은 죄인인 우리에게 당신 스스로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또다른 한편 당신께서 세례자 요한을 찾아 가심으로써 이제부터 시작될 공생활 복음선포의 내용은 당시 기득권을 쥐고 있었던 타락한 성전과 종교 지도자들과의 단절을 선언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 세례와 세례자 요한의 행동은 ‘겸손’과 ‘정의’였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한 겸손, 그리고 그 나라의 정의의 실현이 세례의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겸손과 참다운 정의의 실천이 있을 때, 하늘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미 5세기 초에는 1월 6일에 그리스도의 탄생과 함께 이 놀라운 세례를 기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건을 긴밀하게 잇는 찬가를 불렀습니다.

“우주만물 그분을 소리 높여 부르고 동방박사들 그분을 소리 높여 부르며 별이 그분을 소리 높여 부르노니, 보아라, 이분이 임금님의 아들, 하늘이 열리고 요르단 강에 거품 일고 비둘기 나타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노라!”

세례는 분명 몸을 씻고 죄를 씻는 종교 예식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으로 살겠다는 다짐과 행실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주된 행실은 겸손과 하느님 나라의 정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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