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610) 찾으려는 갈망 있을 때 하느님 만나/배광하 신부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0. 7. 31. 08:57

본문

 

(610) 찾으려는 갈망 있을 때 하느님 만나/배광하 신부
연중 제2주일 (요한 1, 35~42) : 무엇을 찾느냐?
발행일 : 2009-01-18 [제2632호, 6면]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인간은 정말 조화의 묘공이로구나! 이성은 숭고하고 능력은 무한하지 않은가. 자세와 거동은 얼마나 찬탄할만한 일인고! 행동은 천사와도 같고 이해력은 그야말로 신과 같은 존재! 그는 과연 세계의 꽃이요 만물의 영장이로다.”

이 말은 영국의 자존심이요 영광인 윌리엄 셰익스피어(1547~1616)의 작품 ‘햄릿’(1600년)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셰익스피어를 비판하는 이들은 그를 남성 우월주의자요, 제국주의자이며 인간 중심주의자라고 혹평합니다.

실제로 그가 활약하던 시대 유럽은 인본중심주의 르네상스 운동이 불길처럼 일어났던 시대였습니다. 중세 하느님 중심의 시대를 암흑기라고 칭하며 인간에 대한 찬탄과 환희가 물결쳤으며, 인간 해방에 대한 모든 사상의 조류가 폭발할 지경이었습니다. 이처럼 신선해 보였던 인본중심 사상은 곧바로 하느님을 잃어버린 사생아의 시대로 전락해 버리고 인간의 교만은 하늘을 찌를 듯 커져갔습니다. 넘치는 교만의 힘은 곧바로 식민지 경쟁과 강자에 의한 약자의 지배와 착취, 파괴와 유린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인류의 대 재앙인 1, 2차 세계대전으로 번져갔습니다.

결국 르네상스시대가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가를 깨달은 시대였다면, 그 이후의 역사는 교만의 인간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이기적이며 파괴적인가를 극렬히 보여준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이 하느님을 멀리하고 배반한 역사요, 하느님을 잊어버린 역사였지만, 하느님께는 끝없이 인간을 찾아 나선 사랑과 용서의 시간이요, 인간을 향하여 목메어 부르시는 역사였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그분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모세를 부르셨으며, 소년 사무엘을 부르셨고, 수많은 예언자들을 부르셨고, 마리아를 부르셨으며, 사도들을 부르셨고, 바오로를 부르셨으며, 오늘 또다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는 급변하는 세계화 시대에 오직 경제적인 논리 앞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배신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돈이라는 우상을 세워놓고 하느님 부르심의 소리에 귀를 막고 있습니다. 인간의 능력이 지상 최고라는 교만 속에 제2의 잘못된 르네상스를 살아가려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소년 사무엘을 부르시듯 우리를 찾기 위하여 애타게 부르고 계십니다. 이제 인간은 하느님을 등진 걸음을 멈추고 그분 부르심에 응답하여야 합니다.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 10).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세례 받은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뜻입니다. 모두가 그 뜻에 동의해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정도가 아니라 그분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토록 부르시는 주님 말씀에 응답하여 그분과 한 몸으로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사도 성 바오로는 세례 받은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확실히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 3, 27).

오늘 안드레아는 자신의 형 시몬 베드로에게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 41).

그러나 바오로는 한 발 더 나아가 그분을 우리 모두가 옷 입듯이 입어 한 몸이 되었다고 가르칩니다.

플라톤(B.C 429?~347?)의 중기 대화편인 ‘향연’에는 이 같은 글이 있습니다.

“신들이 인간을 처음 만들었을 때, 인간은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현재 인간의 모습과 비교할 때, 그 때 인간은 두 사람을 합체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인간은 전후좌우 모든 방향을 볼 수 있고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두 개의 얼굴, 네 개의 팔, 네 개의 다리를 갖고 있었다. 그러다 인간은 신을 모독하게 되어 신은 인간에게 그 벌로 몸을 둘로 나누는 형벌을 내렸다. 원래 한 몸이었던 사람들이 둘로 나뉘게 되자 자신의 반쪽을 찾아 헤매게 되었다. 여기서 원초적 욕구와 욕망의 문제가 생겨났다.”

어떻게 이 같은 말이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의 믿음과 신앙으로 보자면, 인간은 분명 하느님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이기에 만들어 주신 분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끝없이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을 찾습니다. 우선은 내가 그분을 찾으려는 갈망이 있을 때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무엇을 찾느냐?”(요한 1,38)

그럴 때 우리는 복음의 제자들과 같이 물을 수 있습니다.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요한 1, 38)

세상 욕망의 짝을 찾기 위한 허망함의 찾음이 아니라, 영원불변의 진정한 창조주를 찾아 나설 때 우리는 비로소 그분을 만날 수 있고 타인들에게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 41).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