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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1) 교만 일삼는 자신부터 회개하라/배광하 신부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0. 7. 31.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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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주일(마르 1, 14~20) : 옛 것에서 오늘의 회개를 배움
 
발행일 : 2009-01-25 [제2633호, 6면]

모든 사람의 회개

한 국가가 몰락할 때, 그것이 온갖 부정과 불의와 부패로 인한 패망일 때, 지도층이나 기득권을 가진 일부 특정 계층에만 한정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미 몰락의 전염병 증세가 사회 전반에 퍼져있는 경우가 전부입니다. 총체적 타락, 총체적 부정, 불의, 부패로 총체적 위기가 닥친 뒤였습니다. 구약 예언자 시대의 이스라엘도 그러하였고 막강 로마 대제국의 몰락도 그러하였습니다. 크고 작은 차이일 뿐이지 모두가 썩었기 때문에 국가의 몰락이 있었던 것입니다.

중국 현대사의 개혁가인 ‘루쉰’(1881~ 1936)은 주로 억압받고 학대받는 민중을 비판합니다. 루쉰이 비열한 지도층을 비판하지 않고 고통 받는 민중을 비판한 까닭은 변혁의 주체가 돼야 할 민중의 정체성을 알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그는 ‘허광평’이란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가장 긴요한 것은 국민성을 개혁하는 일입니다. 그것을 못한다면 전제정치건 공화정치건, 그 무엇이 되건 아무리 간판이 바뀌더라도 물건이 같아서는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오늘 요나 예언자는 부정과 부패와 타락의 도시인 니네베에서 회개를 외쳤습니다. 요나의 외침을 들은 니네베 사람들의 변화를 요나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 옷을 입었다”(요나 3, 5).

회개는 모두의 회개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뉴스를 보면서 정치인들, 흉악범들의 모습이 나오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온갖 험한 말을 퍼붓는 사람치고 자신의 행실이 거울에 비친 듯 투명한 사람은 없습니다. 수입산 음식을 국산으로 둔갑시켜 팔아먹고, 장터에서 온갖 거짓으로 상업을 하며, 크고 작은 눈속임으로 자기 주머니를 살찌우는 사람들이 꼭 큰소리치게 되어있습니다. 소리치는 것으로 자신의 죄가 감추어지지 않습니다.

회개란 남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나라든 교회든 정의와 공평과 애덕의 제 갈 길을 걷지 못할 때, 회개란 남 탓이 아니라 제 탓을 외치고 제 가슴을 쳐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왜 내 몫을 다하지 못하였는가를 깊이 반성하며, 나부터 제 자리에 돌아오는 것, 그것을 회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

인간의 근본적인 죄를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6, 9). 주님을 멀리하고 세상 것이 힘이 되리라 생각하는 것이 가장 큰 죄이며,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축복이 된다고 성경은 누누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시편의 시인은 노래합니다.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시편 33, 18).

나아가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나밖에는 다른 신이 아무도 없다. 의롭고 구원을 베푸는 하느님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이사 45, 21).

그런데 이사야 예언자는 개인이든 집단이든 인간이 지니는 두 가지 기본적인 성향을 들어 죄를 고백합니다. 그 첫째가 ‘인간의 의존성’이었습니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표현이 있듯이 인간은 서로 서로가 의존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 사회가 분업화 되면서 수많은 직업과 취미, 여가활동 등에서 여러 만남의 모임이 생겨나는 것도 인간 상호간의 의존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의식주에 대한 의존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에만 의존하여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는 신앙의 혼란, 가치관의 혼란과 상실의 죄를 이사야 예언자는 고발한 것입니다. 이 같은 죄의 유형은 실로 심각한 형태로 교회 내에서도 그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으며, 그 병폐를 알지 못하는 지경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그릇된 두 번째 성향을 이사야 예언자는 자기 과시와 과대 평가의 교만함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죄를 범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들들을 기르고 키웠더니 그들은 도리어 나를 거역하였다.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제 주인이 놓아 준 구유를 알건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이사 1, 2~3).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양, 그것을 차지한 것이 모두 자신의 노력과 업적 때문이라는 오만함으로 은덕을 저버린 인간의 죄를 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본 것입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이들이 하느님께 돌아오기가 어려운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회개하기 어려운 것은 세상 것이 전부인양 그것에 맹신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도 성 바오로는 오늘 우리에게 또다시 경고합니다.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코린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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