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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0) 부를 때마다 응답 주시는 주님 / 배광하 신부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0. 7. 31.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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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0) 부를 때마다 응답 주시는 주님 / 배광하 신부

연중 제22주일 (마르 7,1-8·14-15·21-23) : 가까이 계시는 주님
발행일 : 2009-08-30 [제2662호, 10면]

우리 안에 심어진 말씀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 평안함보다 늘 고뇌하는 인생을 살았다고 고백한 ‘구상’(1919-2004) 세례자 요한 시인은 일본 유학 중이던 때에 ‘폴 클로텔’이라는 프랑스 시인의 글을 접하며 느꼈던 체험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제가 일본에 가기 직전까지 프랑스 주일 대사를 지낸 인물로서, 열아홉 살엔가 파리의 노트르담성당에서 신비체험을 했는데 어느 정도 강렬한 체험인가 하면, 자기는 성경에 씌어진 것보다도 더 명백히 하느님을 체험했다고 증언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만일 그대들이 하느님을 참되게 알았을 때, 하느님은 그대들에게 동요와 불안을 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참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당하신 것처럼 그분과 함께 사지가 찢어지는 아픔을 함께 견디고 참고 이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지가 찢어지는 아픔을 설명하기를, 선과 악이 자기 안에서 잡아당기고, 사랑과 미움이, 이성과 감정이, 영혼과 육신이 자기 안에서 잡아당기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것이 곧 십자가요, 그 십자가를 메고 그분을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 신자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과 현존을 체험 했던 수많은 성인 성녀들은 그같은 체험 후에 마음이 평온한 순탄한 길을 걸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모든 분들이 그같은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때론 자신이 만난 하느님 체험에 대해 의심을 품기도 하였고, 그분을 깊이 알고자 하면 할수록 두려움과 갈등만 커져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와 같이 엉엉 울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연약한 믿음을 보이며 “주님, 제가 죽을 것만 같습니다. 저를 살려 주십시오. 당신을 따르기엔 제 의지와 기도가 너무도 부족합니다” 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구상 시인의 체험은 바로 이것입니다. 성인 성녀들은 끝내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주님께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자신의 기도가 공허한 메아리로 되돌아올 때마다 끝까지 주님을 붙잡으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야고 1, 21).

우리가 부를 때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깊은 신앙 체험을 할 때에도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온갖 혼돈은 그대로 존재합니다. 그것은 진정 믿는 이들의 아픔이며 고통입니다. 예수님의 현존을 직접 체험한 사도 성 바오로도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 7,15?19).

그같이 신앙의 길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교회 역사상 그 모든 신앙인들이 끝까지 그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주님께서 자신들 곁에 항상 계시다는 확신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족하더라도, 선과 악의 싸움에 갈등을 하며, 사랑과 미움의 대립에 끊임없이 아파하여도, 영과 육의 치열한 유혹 중에도 주님의 자비를 바라며 그분을 간절히 부를 때마다 그분의 응답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끝내 주님을 찾았고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 모세가 확신을 갖고 말한 희망의 주님인 것입니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신명 4,7)

세상 모든 것이 캄캄한 절망일 지라도, 희망을 잃고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넋을 놓고 있을 지라도 그 삶 한 가운데에 함께 계시는 주님의 현존을 믿으며 그분을 부를 때, 분명 주님께서는 우리의 하소연을 들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정녕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님은 우리 인간들처럼 까탈스러운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을 옭아매는 여러 전통과 관습에 얽매일 분이 아니십니다. 손을 씻지 않는다 하여, 규칙을 어긴다 하여, 조상들이 지켜오던 여러 예절들, 이러한 것들이 인간의 고귀한 자유를 침해하면 견딜 수 없어 하시는 분이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인간이 행하는 것이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규정과 교리가 인간에게 주신 하느님의 고귀한 선물인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무엇 때문에 아파하는지를 가장 잘 알고 계시는 사랑의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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