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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8) 희망으로 시련·고통 이겨내자/ 배광하 신부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0. 7. 31.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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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8) 희망으로 시련·고통 이겨내자/ 배광하 신부

연중 제31주일(마태 5,1-12ㄴ)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발행일 : 2009-11-01 [제2670호, 10면]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

지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일컬어지는 ‘칼 라너’(1904-1984) 신부는 <영을 체험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를 변명하고 싶은데도, 부당한 취급을 받았는데도 침묵을 지킨 적이 있는가? 우리는 아무런 보상을 못받고 남들은 오히려 나의 침묵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데도 남을 용서해 준 적이 있는가? 우리는 하느님과 그분의 뜻이라고 부르는 저 신비롭고, 소리 없고, 헤아릴 수 없는 분 때문에 순명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아무런 감사도 인정도 받지 못하면서, 내적인 만족마저 못 느끼면서도 희생을 한 적이 있는가? 하느님을 사랑하면 죽을 것만 같은데도 하느님을 사랑한 적이 있는가?… 그와 같은 일이 내게 있었다면 영을 체험한 것이다.”

이어서 칼 라너 신부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영을 체험한다는 것은 곧 영원의 체험이다. 영은 이 시간적 세계의 일부 이상이라는 경험, 현세적 인간의 의의란, 행복으로는 다할 수 없다는 경험, 세상적 성공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아무 근거도 없이 그저믿고 뛰어드는 모험의 경험이다.”

그래서 천상의 성인 성녀들은 이 같은 영의 체험으로 용서와 희생, 가난과 순명, 겸손의 삶, 낮은 자리에서의 만족, 고독과 하느님을 향한 갈망, 죽음의 고통을 뛰어넘는 사랑, 순교의 강한 열망이 가득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분들에게는 살아 숨쉬는 나날이 인간적 눈으로는 환난이었고 역경이었던 것입니다. 단 하루도 쉬운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같은 역경을 이겨냈기에 불멸의 희망 속에 영원한 기쁨을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을 일상의 삶에서 이겨 내셨기에 오늘 천상의 영복을 누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묵시록의 저자는 천상 성인들의 삶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묵시 7,14)

천상의 성인들은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겪으신 시련과 고통을 알고 있었고, 그 길을 자신들도 그대로 따라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린양이 계시는 옥좌에 그들 또한 자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주님을 뵙게 될 희망

티벳 불교의 뛰어난 스승인 ‘소걀 린포체’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끔 나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죽은 뒤에는 생이 없다고 그토록 철석같이 믿게 하는가? 그렇게 주장할 무슨 증거라도 있는가? 내세 따위는 없다고 계속 부인하다가 죽어서 그런 것이 있음을 알게 되면 어쩔 셈인가?’ 마음 수련을 계속한 사람은, 자기 마음에 관하여 전에 모르던 것들을 많이 알게 된다. 마음이 제 참 본성을 향해 활짝 열리면서 그동안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안다고 생각했던 지식들이 깨어지고 이번 생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생들이 있었음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흘낏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스승들이 들려준 삶과 죽음, 죽은 뒤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모두 진실임을 깨닫기 시작한다.”

죽은 뒤 내세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슬프게 생을 마감한 인류 역사의 수많은 죽음들, 때론 전쟁 중에, 때론 갖가지 질병으로, 때론 여러 자연재앙으로, 때론 억울하게 죽음으로 생을 끝마친 가엾은 이들에게 내세가 없다는 것은 너무도 잔인한 처사가 아닌가? 나아가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어느 누구가 자신을 희생하여 보다 나은 세상, 사람 살만한 세상을 위하여 투신하겠는가? 만약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세상은 모두가 저만의 영욕을 위하여 살게 될 생지옥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살이에서 겪게 되는 여러 시련과 고통을 이겨낼 필요도 없이 극단적인 선택을 내리게 될 것이고, 세상은 대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이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서도, 가엾은 인간의 짧은 생을 위해서도 내세는 반드시 존재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정의로운 심판에 의해서 선과 악의 구분, 상과 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악이 아니라 선을 택하게 됩니다. 그 같은 희망이 있어야 우리는 진정 최선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고, 의로움을 향하여 정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신을 투신할 수 있고 희망을 향한 숭고한 죽음을 잘 준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뵙게 될 이들은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마음이 가난해야 합니다.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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