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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9) 부활은 사랑을 회복하는 것/ 손용환 신부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0. 7. 31.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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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9) 부활은 사랑을 회복하는 것/ 손용환 신부

예수 부활 대축일 (요한 20,1-9) : 부활이 뭘까요?
발행일 : 2010-04-04 [제2691호, 10면]

부활이 뭘까요?

부활이 뭘까요? 육신의 소생이 부활일까요? 아닙니다. 정신의 소생이 부활입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갔습니다.(요한 20,1) 그녀가 가서 보니 빈 무덤이었습니다. 빈 무덤이 부활이라는 게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분의 시신은 사라지고 말씀만 남았다는 게 신기하기만 합니다. 부활은 그분 말씀의 소생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뭘까요? 이천 년 전에 그분은 죽었지만 지금도 그분께서 부활하신 날을 수십억의 사람들이 기억한다는 게 부활입니다. 이천 년 전에 그분은 죽었지만 지금도 그분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사람이 있다는 게 부활입니다.

이천 년 전에 그분은 죽었지만 지금도 그분처럼 살기 위해 그분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있다는 게 부활입니다. 그분의 시신은 사라졌지만 그분의 정신이 남아있는 게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의 삶 속에서 육신만 남았다면 어떨까요? 의사가 먹고 살기 위해 환자를 돌본다면 어떨까요? 스승이 제자들을 소명 없이 가르치면 어떨까요? 정신이 없는 세상은 지옥입니다. 영혼이 없는 세상은 죽음입니다. 부활은 사랑의 정신이 소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10년 전에 함께 살던 병사였습니다. 그는 저를 찾아와서 늘 뵙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그가 왜 저를 보고 싶었을까요? 제 모습에서 예수님의 조각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늘 보고 싶은 사람으로 남아있는 게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삶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배어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활의 목격증인들도 예수님을 사랑한 순서대로입니다. 그 첫 번째 목격증인이 바로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그녀는 아직도 어두울 때에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시신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었지만 그녀는 시신을 보기 위해 무덤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받은 과분한 사랑이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 그녀는 주님의 시신이라 하지 않고, 주님이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그분을 부활시켰기 때문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습니다.(요한 20,3-4) 그러나 그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뒤따라왔던 시몬 베드로가 먼저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부활의 두 번째 목격증인이 됩니다. 왜 그에게 그런 영광이 돌아갔을까요? 그것은 사랑의 깊이 때문입니다. 배신과 참회를 겪은 사랑이 더 깊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사도행전 10,39-40.43) 부활은 죄의 용서를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보고 믿었습니다.(요한 20,8) 그가 본 것은 뭘까요? 빈 무덤입니다. 그가 믿은 것은 뭘까요? 자기에게 특별한 사랑을 주신 스승의 부활입니다. 그래서 그는 부활의 세 번째 목격증인이 됩니다. 부활은 사랑을 회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부활이 뭘까요? 사랑의 회복이 부활입니다. 내 안에 묻어놓은 사랑의 흔적들을 세상에 꺼내 놓는 게 부활입니다. 당신도 부활하고 싶지 않습니까?


손용환 신부 (군종교구 쌍용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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